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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 외전 After 11화
“미, 미국엘 간다고?!”
한상혁의 목소리가 좁은 거실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갑작스럽게 전달받은 소식이 꽤나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서, 설마 김준우가 보내는 거냐?! 그 자식 제정신인 거 맞아? 미국에서 깽판 치다가 헌터까지 잘린 놈을 다시 미국에 보낸다고?!”
“호들갑 떨지 마. 전에도 한 번 갔다 왔는데, 뭘.”
한유빈은 짐을 챙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게, 에덴을 찾기 위해 미국 전역을 뒤졌을 때가 고작 3년 전이었다.
그때도 별문제 없었는데 이제 와서 저러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때랑 같냐?! 그땐 김준우도 같이 갔었잖아. 그리고 애초에 지부에는 얼마 있지도 않았다면서.”
“…그렇긴 하지.”
정곡을 찔린 듯, 한유빈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한상혁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3년 전 또한 악연이 있는 동료들과 마주칠까 내심 걱정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그녀가 지부 건물에 머무른 시간은 고작 두 시간 남짓이었고, 나머지는 다른 지역 파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를 마주치긴커녕, 애초에 사람을 구경할 일이 없다시피 했다.
마치 누군가가 최대한 접촉을 피할 수 있게 일정을 맞춘 것처럼.
당시엔 김준우가 일부러 신경 써준 건가 싶었지만…….
‘그런 걸 신경 썼으면 이번에 날 안 보냈겠지…….’
한참 지나고 보니 그럴만한 위인은 아니었다는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이번엔 김준우도 없이 혼자 가는 거잖아.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아영 씨도 같이 가는 거야. 그리고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어쨌든 활동은 혼자 한다면서. 분명 이전 동료들이랑 마주칠 텐데?”
“마주치면 뭐. 니콜 일도 몇 년이나 지난 마당에 그때 인간들 만난다고 주먹질이라도 하겠냐?”
“…….”
어째 대답은 없는데, 표정만큼은 죽도록 긍정하고 싶어 보였다.
뭐, 사실 그녀 또한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머리로는 안 된다고 생각해도 늘 주먹은 말을 들어 먹질 않았으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니 할 일이나 잘해.”
“…그래. 니 알아서 해라. 깜빵 가면 연락하고. 면회는 못 갈 것 같으니까.”
한상혁은 반쯤 포기한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한유빈은 계속해서 짐을 챙겼다.그러던 중, 문득 시선이 책상 위에 있는 작은 액자로 향했다.
니콜과 찍은 유일한 사진.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한유빈도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민하길 잠시.
‘가는 김에 잠깐 들를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캐리어에 액자를 집어넣었다.
***
뉴욕 국제 공항.
이아영은 장시간 비행에 몸이 퍽 찌뿌둥한 듯,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면서 한유빈을 슬쩍 흘기자 고민에 잠겨있는 듯한 그녀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출국 때부터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평소답지 않게 얌전한 모습.
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사실 뻔하긴 했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요.”
“…네?”
이아영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내자 한유빈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본인도 지금 걱정되는 거죠? 괜히 사고 치지 않을까, 일 벌이지 않을까… 뭐,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유빈 씨, 본인 생각보다 훨씬 냉철한 사람이니까.”
“그, 그걸 어떻게…?”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뭘.”
이아영이 피식 미소를 짓자, 한유빈도 그제야 멋쩍게 따라 웃었다.
“전 의자에 앉아서 말과 종이로 싸우는 건 할 줄 몰라요. 그래서 헌터 자격도 박탈당했고, 미국 지부에서도 쫓겨났고요.”
이내 한유빈은 퍽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본부장이니 뭐니 하지만…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중요한 일인데 제가 또 문제 일으키면…….”
“후후.”
그녀의 말을 끊고, 이아영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웃어요?”
“유빈 씨가 여태까지 감정적으로 나서서 일을 그르친 적이 있어요?”
“……?”
한유빈은 그 말의 의미를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보길 잠시.
이내 그녀는 머리가 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그동안 이 일을 하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나선 게 몇 번이나 있었는데도…….
그 때문에 일이 틀어진 적은, 최소한 그녀의 기억으론 없었으니.
“애초에 준우 씨는 유빈 씨 성격을 다 알면서도 그 자리에 앉힌 거예요. 그게 문제가 됐으면 여기 보내지도 않았겠죠.”
“처음부터 다 계획하고 절 투입했다는 거예요?”
“글쎄요.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이아영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아는 건, 최소한 유빈 씨는 그 사람의 최고 전력 중 하나라는 거예요.”
“…….”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 말고, 일이나 신경 쓰자고요.”
한유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중을 나오기로 했던 미국 협회 관계자가 보이지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기에 택시라도 잡아타기 위해 게이트를 나서는 순간.
“잠시만요. 거기 두 여성분.”
굵직한 목소리.
누군가 뒤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공항 검역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공항 경찰을 대동한 채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이아영이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검역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도난 신고가 들어와서 수색 중인데,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거죠?”
“가방 수색을 할 수 있게 캐리어를 열어주십시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해할 수가 없네요. 저희가 왜 가방을 열어야 하죠? 이미 검역대랑 세관 신고까지 전부 마치고 나왔는데?”
“열지 않으시겠다면 강제 집행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뭐라고요…?”
“미국 같은 큰 나라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당신들만 피해를 봅니다. 그러니 얌전히 요청에 따르십시오. 계속 거부할 시, 체포 및 구속도 가능합니다.”
“…….”
“…….”
이아영과 한유빈은 그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에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거부합니다.”
이아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검역관은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군요. 공무집행 방해 및 지시 불이행으로 체포하겠습니다.”
그와 함께 공항 경찰이 수갑을 꺼내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경고하는데, 우리한테 그 수갑 채우는 순간 후회하게 될 거예요.”
이아영이 두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남자들은 그저 콧방귀를 뀌며 수갑을 열었고.
그 순간.
“당장 그 손 치우십시오.”
그녀들 앞으로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동시에 그 뒤를 따라는 수십 명의 수행원.
딱 봐도 높은 기관에서 나온 듯한 사람들이 공항에 나타나자, 검역관과 공항 경찰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빛이 스쳤다.
“뭐, 뭐야?”
“너희들 누구야? 지금 우리는 공무 수행 중…!”
“당신들, 지금 그분들한테 수갑 채우는 순간…….”
이내 양복을 입은 남자가 서슬 퍼런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뭐, 뭐…?”
“그게 무슨…….”
결코, 농담이라고 볼 수 없는 그 한마디에 검역관과 공항 경찰은 무의식적으로 두 여자에게서 손을 뗐다.
그것을 확인한 남성은 다시금 이아영과 한유빈 앞에서 예를 갖추며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미국 뉴욕 협회 사업부 소속, 마커스입니다.”
“…….”
이아영은 자신을 마커스라고 소개한 남자를 잠시 바라봤다.
그리곤 다시금 검역관을 슬쩍 흘기길 한 차례.
“우리가 도둑질을 했다고 체포하겠다더군요.”
“……예?”
“아무런 근거도, 설명도 없이 단지 추측만으로 외국인을 체포하겠다니…….”
이아영 협회장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사무총장님이 아시면 참 유감스러워하실 것 같네요.”
“……!”
“……!”
그 순간, 마커스를 비롯한 수행원들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전 세계 국가들은 각자의 국력을 기준으로 한 보이지 않는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은연중에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힘이며, 그 어떤 나라도 쉽사리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건 협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협회는 전 세계 토벌 산업의 중심이자 WDSO 아래 에덴과 뱅크 아이템을 모두 보유 중인 곳.
전 세계 모든 협회의 꼭대기에 있는 곳.
이아영과 한유빈은 그런 협회의 수장과 고위 간부다.
두 사람은 그저 다른 협회에 방문한 손님 수준이 아닌, 목숨을 걸고 보좌해야 할 최고 VVIP였다.
그런데 마중에 늦은 것도 모자라, 그사이에 VVIP들이 모욕을 당했다?
이건 그저 그런 징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최소한 이 자리에 있는 목이 두세 개는 날아가도 모자란 상황.
마커스 또한 곧바로 상황을 인지한 듯, 곧바로 검역관과 공항 경찰에게 다가갔다.
“타님발라?”
그 단어를 내뱉자, 두 남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왜, 월급이 만족스럽지 않았나? 아니면 동양의 젊은 여성들이라서?”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증거라도 있어? 우린 정말 도난 수색을…!”
“뭐, 뉴욕 공항 한복판에서 타님발라를 하려는 것도 실수지만, 그보다 더 큰 실수는…….”
마커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을 잘못 골라도, 너무 잘못 골랐다는 거야.”
“……”
“지금 너희 두 사람의 실수로 미국 협회는 외교책 하나를 잃었다. 그러니…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 될 거야.”
마커스는 이내 뒤에 있던 수행원들을 향해 손짓했고, 그에 맞춰 수행원들은 각자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사이 마커스는 다시 한번 이아영과 한유빈에게 다가갔다.
“타님발라, 과거 개도국 공항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유행했던 사기 수법입니다. 미리 가방에 무언가를 넣어두고 후에 그걸 발견한 척 벌금을 요구하는 방식이죠.”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내가 이해가 안 가는 건… 그런 수십 년도 더 된 장난질에, 하필 우리가 당할 뻔했다는 거죠.”
“…….”
이아영이 쏘아붙이자, 마커스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 이제 와서 사과해봤자 뭐.”
이아영과 한유빈은 그 말과 함께 마커스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차량이 대기 중입니다. 일단 숙소로 먼저…….”
“아뇨. 바로 협회로 가죠. 보고해야 할 것도 있고.”
이아영은 마커스를 바라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한유빈을 슬쩍 흘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시작이 좋네요.”
“…네?“
"도착하자마자 벌써 유리한 위치가 됐잖아요.”
한유빈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이아영이 말을 이었다.
“지금처럼, 굳이 싸우지 않아도 충분히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어요. 조직이 갖는 영향력이라는 건 절대 무시할 게 못 되니까. 유빈 씨도 참고해둬요.”
“……그건 그냥 갑질 아니에요?”
“…….”
한유빈이 던진 비수에 이아영이 대답을 아끼길 잠시.
“그런 거 하나하나 따지면 일 못 해요.”
“……?”
“사소한 건 넘어가자고요.”
그 말을 남기며 이아영은 먼저 공항을 벗어났다.
한유빈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저건 너무 닮아버린 게 아닌가.
한유빈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