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61)

“……튜니아트에서 서신이 왔다니.”

기어코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오늘 꾼 악몽이 정말 예지몽이었던 건가.

아침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라히트리안이 남기고 간 소식은 내 혼을 쏙 빼놓기 충분했다. 그는 서신이 무슨 내용인지는 끝끝내 알려 주지 않고 사라졌다.

정말로 렘무트가 내 행방을 알려 준 거였다니.

끼긱-.

손에 들려 있던 나이프가 유리그릇을 날카롭게 긁었다. 소름 끼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내렸다.

늘 먹성 좋던 나였지만 오늘만큼은 스테이크가 난도질 된 채 식어 있었다.

“황녀님, 식사가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하하,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요.”

나는 착잡함에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라히트리안은 내게서 하루빨리 받아내고 싶은 게 있었다.

그의 심장.

라히트리안은 자신의 심장을 돌려받고 싶을 테니 내가 빨리 튜니아트로 돌아가기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에테르온에게 마지막 신성력까지 모두 빼앗기고 내 육신이 사라지면 그가 심장을 회수하기도 더 수월하지 않을까.

물론 최악의 결론이었다.

“아, 답답해. 여기 앉아서 혼자 생각만 하면 뭐 해.”

당사자를 찾아가서 물어보면 되는 일인데.

“아니카, 저 어디 좀 다녀올게요! 따라오지 말아요!”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 *

“……죽을 것 같아요. 오늘은 일 못 합니다.”

“엄살 부리지 마, 이안.”

“성을 대체 왜 날려 버리신 겁니까?”

이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침부터 날아가 버린 성을 복구하기 위해 마력을 쏟아 붓느라 기진맥진했다.

라히트리안은 콧방귀를 뀌었다.

“고작 그 정도로 드러눕다니. 이카르센에서 추방시켜 줄까?”

“멀쩡합니다.”

이안이 빠르게 자세를 바로잡아 앉았다. 하지만 정말 기운이 없긴 한 터라 금세 어깨가 쳐졌다.

서류를 검토하던 이안이 힐끔 라히트리안을 보았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지 집요하게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가 오기로 했습니까?”

“응.”

라히트리안은 리즈벳이 어떻게 나올지 기대가 되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아침에 본 표정을 떠올렸다.

성이 날아갔는데 왜 자기 방을 찾아오냐며 순진무구하게 묻다가, 이내 의기양양하게 쏘아붙이기까지 하던 모습에 은근히 심사가 뒤틀렸었다.

그리고 현재, 라히트리안은 느긋하게 리즈벳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지금쯤 올 때가 됐지.’

이 정도면 제아무리 오기 싫다 하더라도 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던진 미끼는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역시나,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황녀님이 저기에서 뭘 하고 계시는 걸까요?”

옆에 있던 이안이 속닥였다. 라히트리안은 즐겁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두리번거리는 작은 머리통이 보였다.

대놓고 은발이 살랑거리고 있는데도 들키지 않을 거라 여긴 건가.

그보다 기척을 죽였어도 속아 주기 민망한 수준인지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놀라는 척해 드릴까요?”

안타깝다는 듯이 이안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곧 맑은 벽안과 마주친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황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등장하시는 겁니까?”

“라히트리안 보러 왔어요.”

“그럼 당당히 들어오시면 될 일을요.”

“그 남자가 도망갈까 봐요.”

도망?

이안이 무슨 뜻이냐는 듯 라히트리안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새초롬하게 바짝 올라간 황녀의 눈썹이 보였다.

그래 봤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기에 라히트리안이 픽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기대되는군. 마음 놓고 들어와.”

“잘됐네요. 이안, 자리 좀 비켜 줄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대화 나누시지요.”

리즈벳의 당찬 기세에 눌린 이안이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더니 집무실을 나갔다.

집무실에 단둘이 남게 되자 생긋 웃고 있던 리즈벳이 표정을 싹 지웠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책상을 쾅 내려쳤다. 그러고는 지나치게 가까울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코끝으로 훅 끼치는 향긋한 향에 정신이 아찔한 것도 잠시.

라히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가 상상한 리즈벳의 태도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 * *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황녀.”

이안까지 내보내는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자 라히트리안은 막 닫히는 문을 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다시 옮겼다.

무슨 꿍꿍이냐는 듯 치켜 올라가는 눈썹이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 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인데. 그것도 내 의지로.

물러날 기미 없이 또렷하게 그를 쏘아보자 문득 입꼬리를 움찔거리던 라히트리안이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지그시 눌러 뒤로 밀어냈다.

“윽.”

“얼굴 좀 치우지.”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치워낼 정도로 못 봐줄 얼굴은 아닌데.”

이 정도면 무척 예쁘게 생긴 편 아닌가.

속내를 들여다보면 튜니아트 황실이 좀 미쳐 있는 건 맞지만, 하나같이 다들 뛰어난 외모를 자랑하는데.

입술을 비죽거리자 라히트리안의 입꼬리가 비딱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래서 할 말이 뭐지?”

“오는 길에 생각을 좀 해 봤어요.”

“말해 봐.”

그는 어디 들어 보겠다는 듯 여유롭게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라히트리안을 쏘아보았다.

흥미로움으로 반짝거리는 자안에는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에 나는 묘한 확신이 생겨났다.

라히트리안은 나를 아직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거라는 직감에 가까운 확신이었다.

그럼 아침에 왜 그런 거지?

난데없이 아침에 남의 방에 들이닥쳐 꼬치꼬치 이상한 질문만 골라 하지를 않나…….

이제는 못된 심술까지 부리고 있다. 그리고 그 심술의 증거는 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새하얀 서신일 것이다.

‘대체 왜?’

너무 황당하면 화도 안 난다는데 지금이 바로 그랬다. 나는 어이가 없어 맥이 탁 풀렸다.

그리고 절대 진심일 리 없는 말을 줄줄 읊어댔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튜니아트로 돌아갈까 봐요.”

“……뭐라고 했지?”

역시나, 예상했던 말이 아니었는지 라히트리안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나는 담담하게 생긋 웃었다.

“이카르센 제도에 오래 머무는 것도 민폐니까요. 그리고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돌아가면 무슨 일을 당할지 알고 있을 텐데.”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라히트리안의 얼굴에 아주 작은 동요가 피어올랐다. 그럴수록 나는 여유를 되찾았다.

사실은 집무실에 오자마자 바로 따져 물으려고 했었다.

‘렘무트가 아직 황성에 있는 걸 다 아는데 왜 내게 그런 협박을 하는 거냐고 말이지.’

아침에는 막 잠에서 깬 상태였던지라 이성적으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창밖에는 성 머리가 날아가 있고, 눈앞에는 절대 찾아올 리 없는 라히트리안이 떡하니 서 있는데 어떻게 평상시 같은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집무실로 오는 길.

튜니아트 황성에서 탈출하던 당시 렘무트가 했던 말이 기적처럼 떠올랐다.

“네가 오백 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와 봐.”

무려 오백 년 만에 자유를 손에 얻었으니 렘무트는 그걸 지키려는 의지가 누구보다 강할 것이다.

‘그러니까 튜니아트 황실에 정보를 알려 준 거겠지.’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고, 황실은 나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그의 심장을 노리는 렘무트가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 라히트리안이 날 내보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면서 튜니아트에서 온 서신으로 약을 올려? 돌려보낼까 봐 무서워할 걸 알면서?’

내 침묵이 길어지자 라히트리안이 픽 웃었다.

“설마 튜니아트 황실의 상황을 모르는 건가?”

“제가 그것도 모를까 봐요. 아니까 도망쳐 나온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제가 여기 있고 싶다고 언제까지나 머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건 진심이었다. 언젠가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가 빼앗긴 신성력을 모두 되찾아 오고 싶었다.

금단술을 창시한 게 만약 정말 라히트리안이라면 그에 대한 기록도 이곳에 남아있을 거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아직 이카르센 제도에 적응하느라 그 방법을 찾는 시도도 못 하고 있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그게 문제가 아니니 일단 제쳐 두기로 하고.

“저는 라히트리안 생각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거든요. 당신이 내게 말하지 않은 것까지도요.”

그러니 이제 서로 피곤한 눈치싸움은 그만두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라히트리안이 미동조차 하지 않고 굳어 버렸기 때문이다.

숨은 쉬고 있는 건가?

예상치 못한 격한 반응에 나까지 놀라 멈칫했다.

달싹거리던 그의 입술이 나지막하게 열렸다.

“……뭘 알고 있다는 거지?”

“그러는 라히트리안은 왜 그렇게 놀라는데요?”

렘무트와의 연결고리를 들킨 게 이렇게까지 크게 반응할 일인가?

‘뭔가 있어.’

확실하다. 내가 모르는 다른 비밀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고 생긋 웃었다. 어디 라히트리안도 한번 당해 보라는 심보로.

“뭐겠어요? 지금 라히트리안이 짐작하고 있는 그거겠죠.”

“……언제부터?”

“설마 다 들킨 마당에 저 떠보는 거예요?”

“…….”

“정말로 내 입으로 다 말해요? 감당할 수 있어요?”

여유롭게 목소리를 꾸며내며 묻자 라히트리안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세상에, 내가 뭘 본 거지.

나는 놀라 벌어지려는 입을 필사적으로 다물고 여린 속살을 깨물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천하의 라히트리안 이카르센이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선으로 피하듯 내려간 시선과 이어지는 긴 침묵이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보였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내 눈치까지 보는 게…….

‘정말 뭐가 있기는 한가 보네.’

그게 뭘까.

라히트리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짤막하게 물었다.

“언제 알았지?”

“……원래 몰랐는데 오늘 알게 됐어요.”

“하.”

그가 한숨을 쉬며 얼굴을 가렸다.

나는 슬쩍 그를 떠보기로 했다.

“그게 그렇게까지 숨기고 싶은 일이에요?”

“황녀라면 들키고 싶었겠나?”

“아니요. 절대 아니죠.”

저 까칠한 말투를 보니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는 건 알겠다.

그럼 설마 이안도 모르고 있는 정보인가?

나는 지나가듯 툭 물음을 던졌다.

“그거 이안도 알아요?”

“……오자마자 이안을 내보낸 사람이 누군데?”

“아, 뭐.”

서로 언성 높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것뿐인데.

아무래도 라히트리안은 다른 이유로 이안을 미리 내보낸 거라고 착각하는 듯했다.

연달아 터지는 잭팟에 입꼬리가 간질거렸다.

그럼 나 지금 라히트리안을 낚은 거야?

그를 한마디도 못 하게 만드는 비밀이 뭔지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증이 치솟기 시작했다.

‘아니야, 놀림받은 걸 알면 저 성질머리에 어떻게 나올 줄 알고.’

이쯤에서 그만해야지.

나는 선심 쓰듯 말했다.

“됐어요. 눈감아 줄게요.”

어차피 모르는 거니 눈감아 주기도 쉬웠다.

그러자 라히트리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했다.

“그냥 넘어간다고?”

“네.”

“…….”

“왜, 안 믿겨요? 내가 넘어가 준다잖아요.”

초조하게 상황을 모면하려는데 라히트리안의 의심 섞인 말이 돌아왔다.

“황녀가 그냥 넘어갈 리 없지. 꼬투리를 잡았으니 그걸로 협상하려고 온 거 아닌가?”

“…….”

“황녀.”

“…….”

뜨악한 내 표정에 라히트리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일자로 내려간 입술이 슬로모션처럼 열리고, 집무실에 음울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잘도 나를 놀렸어.”

“…….”

“잘됐군. 차라리 훨씬 뭘 많이 알고 있다는 건지 말해 봐. 마침 황녀가 이안을 내보냈으니 잘됐어, 그렇지?”

순식간에 상황이 반전됐다.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라히트리안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에 뒷걸음질을 치자 그의 입매가 더욱 진하게 올라갔다.

‘아니 왜 내가 추궁당해야 하지?’

나는 재빨리 다가오지 말라는 의미로 그의 가슴팍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가오던 라히트리안이 걸음을 멈췄다.

“먼저 시작한 사람은 라히트리안이잖아요. 사람 가지고 장난친 게 누군데 그래요?!”

순간 내 처지가 서러워져 울컥, 그동안 억눌러 왔던 감정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솟구쳐 올랐다.

“내가 튜니아트 제국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지 빤히 알면서. 하필 그런 걸로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요?”

“황녀, 잠시…….”

“이럴 거면 왜 데려왔어……. 씨이, 안 그래도 무서워 죽겠는데……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봇물 터지듯 올라오는 서러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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