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60/61)

* * *

렘무트가 낮잠에 든 무렵.

나는 라히트리안에게 내어 준 방에 들어와 창가에 올라앉았다. 한 손에는 그에게 줄 선물을 든 채였다.

오늘 밤 라히트리안을 푹 재워 줄 수면에 효능이 좋다고 알려진 찻잎이었다.

향까지 더해지면 효과가 배가 되고, 취급되는 찻잎의 품질이 좋을수록 효능이 발휘되는 속도와 시간도 천차만별이라고 했다. 당연히 최상급으로 준비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걸 먹이고 만다.

“주인 없는 방에 멋대로 들어온 건 마음에 걸리지만, 어차피 내 궁이잖아.”

나는 시야에 들어오는 가구를 하나씩 짚으며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저 테이블 내 거고, 소파도 내 거고. 또 책장도 내 거…….”

역시 그만두는 게 좋겠다. 하나씩 소유권을 주장할 때마다 몰려드는 유치한 수치심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한쪽 창틀에는 머리를 기대고 반대편에는 다리를 올린 채로 라히트리안이 언제 오나 기다려 보기로 했다.

잠시 후, 미세하게 주변의 마력이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처음엔 미처 몰랐던 사실인데, 렘무트를 소환한 이후 마력에 대한 미세한 반응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라히트리안에게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좋은 오전이죠.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 봐요? 나보다 바쁜 것 같아.”

“황녀보다 바쁘기는 하지.”

“윽.”

“업무가 많거든.”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카르센 제도의 업무까지 함께 처리하고 있겠지.

몸이 두 개여도 부족한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되니 미안한 마음이 생겨났다. 여러모로 바쁜 사람인데 혼자 있을 시간까지 뺏은 건 아닐까.

“그럼 쉬어요. 저는 가 볼게요.”

“어딜 가.”

“네?”

“들어오는 건 마음대로 해도, 나가는 건 아니지.”

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방 밖으로 못 나간다고 한 건가.

잘못 들었다는 뜻으로 배시시 웃으면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

묘하게 풀어진 것 같으면서 한편으로는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 상반된 기분이 느껴졌다.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분 안 좋아요? 누구 만나고 왔길래 그래요. 아니면 일이 너무 많아요?”

“에테르온 튜니아트를 만나고 왔어.”

“아. 오라버니가 말을 좀 기분 나쁘게 하기는 하죠.”

나는 이미 익숙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지만, 라히트리안은 처음 만난 거였으니까.

그의 기분이 상할 만도 했다. 나는 열심히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무슨 얘기 하고 왔어요?”

“마룡을 보낼 구실을 만들고 왔어. 필요할 때 적당히 넘기면 돼.”

“아, 렘무트요?”

“그래, ‘그거.’”

네, 그거.

나는 알아들었다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렘무트만큼이나 격한 반응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는 황녀는.”

라히트리안이 어깨에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치며 돌아봤다.

“언제부터 날 기다리고 있었어?”

“음. 별로 안 됐어요. 삼십 분 정도? 바깥 감상하면서 기다리니까 시간도 잘 가던데요.”

나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며 손으로 가리켰다.

라히트리안이 창가에 거의 눕듯이 기대어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문득 햇빛이 드리워진 창가 아래까지 다가온 그가 창틀 가장자리에 팔을 지탱하며 몸을 숙였다.

그는 진심으로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한 채로 날 보고 있었다.

“분명 방에 허락 없이 들어오지 말라 했을 텐데. 이제는 내 방에 들어와서 아예 누워 있는군.”

“으음, 그치만 생각해 봐요. 이 궁은 제 거잖아요. 여기 있는 건 전부 제 소유라고요.”

어쩔 거야.

조금 전 느꼈던 수치감이 다시 찾아왔지만 뻔뻔하게 고개를 들며 우겼다.

라히트리안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아, 여기 있는 거 전부 황녀 거라고.”

“네.”

“그럼 나도 황녀 건가?”

라히트리안이 궁금하다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잠시 사고가 정지되어 있던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란 몸이 휘청거리는 바람에 머리가 그대로 창틀에 박을 뻔했으나, 라히트리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으로 가로막았다.

“그러게 감당도 못 하는 말은 왜 해?”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이런 말실수 하지 말아야지.

그때 내 손목에서 달랑거리며 곱게 포장된 찻잎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히트리안의 눈길이 그곳으로 향했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잖아.

“이게 뭐지?”

“라히트리안이랑 오랜만에 티타임이나 즐기려고요! 이거 특별히 준비해 온 건데 같이 마셔 줄래요?”

제발 넘어 와!

라히트리안은 찻잎을 보다가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내가 갖고 있던 티백이 담긴 조그마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럴까.”

* * *

“이 바보가. 네가 먹고 자 버리면 어떡해?”

“나는 라히트리안이 그렇게 차를 좋아할 줄 몰랐다고요.”

라히트리안의 찻잔이 빌 때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잔도 같이 비어져 있는 걸 어쩌란 말인가.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같이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겁게 감기는 눈꺼풀에 방으로 돌아와 잠들어 버렸다.

나는 여전히 비몽사몽인 상태로 지붕에 걸터앉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잠을 깨기 위해 일부러 얇게 입고 나오기는 했지만 너무 추웠다. 코를 훌쩍이며 어둑해진 하늘을 보니 구름 사이로 초승달이 뜬 게 보였다.

“하아, 춥다. 벨리언은 언제 와요?”

“이제 와.”

렘무트는 반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는 얇고 긴 유리병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게 뭐예요?”

“벨리언 카드리아가 부탁한 거.”

저걸 마시면 그가 원하던 사람의 외양으로 변할 수 있는 건가?

렘무트가 그동안 저 몸으로 구석에서 몰래 물약을 만들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졌다.

하. 시간 엄청 지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안 오지?

나는 입으로 툴툴거리며 중얼댔다.

“오는 길에 들킨 거 아닐까요? 얼마나 지났어요?”

“……너 아직 도착한 지 오 분도 안 지났거든?”

“그래요? 한 시간은 지난 줄 알았는데.”

그때 렘무트의 귀가 쫑긋하더니 고개와 발이 동시에 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서 지붕 위를 도약해 올라오던 벨리언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쿨럭이며 휘청거렸다.

그의 품에서 형형색색의 간식이 후두둑 흘러내렸다.

“왜, 왜 황녀님이 여기 계시는지.”

“좋은 자정이죠, 카드리아 경? 이 시간에 황족을 기다리게 만들다니.”

나는 조심스럽게 지붕 위를 걸으며 간식 하나를 주워들었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가득한 봉지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이게 정녕 벨리언 카드리아의 품에서 떨어진 게 맞는 건가?

벨리언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렘무트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볼 거 없어요, 카드리아 경. 제가 렘 보호자로 따라 나온 거거든요. 누가 간식을 한 보따리 주고서 저런 수상한 물약을 만들어 달라 했다길래요.”

내가 렘무트의 손에 들려 있는 물약을 가리키며 말하자 벨리언이 흠칫했다.

그러나 잠시 당황한 것 같던 벨리언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분명히 우리끼리의 거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기면 대가를 배로 물기로 했던 것 기억하겠지.”

“……내 주인한테 걸렸는데 어쩌라는 거야?”

“그건……. 하아.”

벨리언이 눈가를 문질렀다.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나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대화에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무려 신성 제국의 공작 가문 중 하나인 카드리아가의 후계자랑 마룡이 서로 손을 잡아 놓고서, 진짜 대가로 내놓은 게 ‘간식’이 끝이란 말이야?

“이 바보가! 세상이 얼마나 험난한데!”

나는 뒤로 돌아 자세를 낮춘 다음 렘무트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먹을 거 준다고 냉큼 따라가고 그러면 안 돼요, 렘. 포장지도 봐요. 일부러 화려한 색상으로 고른 거라고요.”

“……너, 내가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넘어간 것처럼 보여?”

“이미 넘어갔잖아요!”

그 증거가 지붕에 흐트러져 있잖아!

반박할 말이 없는지 렘무트가 딴청을 피워 댔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벨리언을 노려봤다.

이런 간식으로 어떻게 내가 데리고 있는 마룡을 꼬드길 수 있느냐는 원망을 가득 담아서.

“그래서 왜 늦었어요?”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렘이 알고 있는 건 저도 다 알고 있어요.”

그러자 배신자 렘을 보는 노을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사실 일이 좀 틀어졌습니다.”

“왜요?”

“제가 잠입할 예정이었던 마을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달받는 바람에…….”

그가 난처하다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후,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꽤나 피곤해 보였다.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모조리 사라졌다더군요.”

“그런 위험한 일에 벨리언이 직접 개입하려는 이유는 뭐예요?”

“제가 아니면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요. 사실 짐작 가는 범인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짐작 가는 범인이 있다고?

“황녀님, 그 남자를 기억하십니까. 적발에 적안을 가졌던.”

나는 자연스럽게 렘무트를 응시했다.

렘무트는 태연자약한 척 서 있었지만 꼬리 끝이 부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나는 혹여나 렘무트의 꼬리가 들키지 않게 슬며시 시야를 가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남자가 왜 범인일까요?”

“실은 황태자가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던 이유가 그 남자 때문입니다. 발작의 고통을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도록 사특한 주술을 걸었거든요.”

…….

나와 렘무트가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국경 지대에 마을이 사라지게 된 원인이 여기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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