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17화
“미안하구나. 아진아. 백부님께 그런 부탁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 그건 너를 위해서도 좋지 않을 것 같고 말이야. 의술을 배우는 자로서 이런 말을 하는 건 나도 싫지만 백부님은 오래 사시지 못할 거야. 그런데 잠시라도 무공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백부님 곁에서 지내다가 사별하게 되면 네가 마음의 병을 얻을 수도 있어.”
“그러면 한 달만요. 한 달만 배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아니. 보름만요. 그다음에는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서종욱은 아진을 알았다.
전부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럴 때는 일단 아진을 믿고 도와주는 게 좋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소저.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대협께 말씀이라도 드려 준다면 나도 참 고마울 것 같구려.”
“……예?”
북리소은은 가주가 나서서 말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이것은 떼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닌데 가주가 아이를 혼내기는커녕 오히려 같이 부탁을 하고 있어서였다.
그것은 그동안 북리소은이 가주에 대해 들었던 얘기와도 달랐고 그곳에 와서 느낀 바와도 달랐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혼자서 이유를 깨닫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누님. 저를 한 번만 믿어 보세요. 무영검 대협께서는 혼인도 안 하셨고 아이도 없잖아요. 그러면 지금쯤 후회가 남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제자가 생긴다고 하면 좋아하실 수도 있어요. 누님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누님은 무영검 대협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지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북리소은은 다시 호위들을 바라보았다.
호위들은 여전히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북리소은은 아진을 보았다.
“그래. 좋아. 나도 여기에서 신세를 져야 하고 가주님께 부탁을 드려야 하는 입장이니까 너를 본가에 데려가 줄게. 그리고 백부님께 인사를 드릴 수 있게 해 줄게. 그렇지만 거기까지야. 백부님이 너를 제자로 받아 주겠다고 하시지 않으면 그때는 너도 고집을 꺾겠다고 약속해. 그러면 받아들일게.”
“좋아요. 누님. 역시 말이 잘 통하네요. 그러면 언제 갈까요? 지금이라도 상관없죠? 뭐 타고 오셨어요? 걸어오신 건 아니죠?”
아진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으려는 것처럼 서둘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서종욱이 다급해졌다.
“아진아. 정말 그래야겠다는 말이냐. 그러면 바로 준비를 해야겠구나. 이럴 때는 뭘 준비해야 하는 건지. 이럴 게 아니다. 네 어머니에게 먼저 얘기를 하고 와야겠다.”
북리소은은 이번에야말로 더욱 놀랐다.
아무리 아이가 그렇게 말을 해도 가주가 그건 안 된다고 말을 하고 먼 길을 가야 하니만큼 준비를 꼼꼼히 해야 한다고 말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네. 아버지. 사실은 지금이 기회가 가장 좋아요. 그리고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올지도 모르고요. 지금은 제선문도 본가에 위해를 가하지 못할 거예요. 혈천방이 본가를 지켜주기로 했고 남궁세가는 직접 움직이기가 어려울 테니까요. 하지만 나중에는 제선문이나 남궁세가에서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고 그때는 저도 본가가 걱정돼서 외부에 있을 수 없을 거예요.”
“남궁…… 세가요?”
북리소은은 거기에서 왜 갑자기 남궁세가 얘기가 나오는 건가 하는 얼굴이었다.
아진은 그 이야기가 비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정체를 밝힌 북리소은에게 비밀의 대가로 남궁세가에 대한 얘기를 흘려 주었다.
사실, 제선문의 뒤에 남궁세가가 버티고 있어도 북리세가가 산본의가의 힘이 돼 준다면 앞으로는 산본의가를 중원 제일 의가로 키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그건 가면서 얘기하죠. 누님.”
북리소은은 정말 이대로 가는 건가 하면서 아진과 가주를 보았다.
“가주님…….”
“북리 소저. 부탁하겠소. 일단 아진을 무영검 대협께 소개만 해 주구려. 그다음 일은 전적으로 무영검 대협의 뜻에 따를 것이오. 대협께서 불편해하시는 것 같으면 북리 소저가 아진을 데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되오. 그러면 그때부터는 아무 군소리 없이 내가 북리 소저에게 의술을 가르쳐 줄 것이오.”
북리소은은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는 모양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가주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니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북리소은이 무인들을 바라보며 갈 준비를 하라고 말하자 아진이 북리소은의 팔을 잡았다.
“누님. 한 분은 여기에 머물게 해 주면 안 될까요? 한 분은 계셔야 제가 안심이 될 것 같은데요.”
북리소은은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아이구나. 그래. 알았다. 그렇게 하자.”
요즘 들어 산본 사람들 사이에서 신의라 불리는 서종욱에 대한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북리소은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주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진은 얘기가 끝나자마자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며 달려나갔고 도종도 아진과 함께 달렸다.
“아진아. 너 정말 괜찮겠어?”
아진의 옆에서 나란히 달리며 도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응. 형님. 나는 제대로 된 분에게 검술을 배우고 싶어. 무영검 대협이라면 딱 좋을 거야.”
“그런데 그분이 너를 제자로 받지 않겠다고 하면? 너도 알지만 오래 투병 생활을 한 사람들은 성격이 아주 까탈스러워지잖아. 절대 상처받지 말고 실망하지도 마. 아진아. 알았지?”
“응. 형님.”
그들이 양주은에게 갔을 때 그녀는 두 아들이 달려오는 것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보았을 뿐 아진이 무슨 말을 하려고 오는 건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 저 무영검 대협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다녀오려고 해요.”
아진의 말에 양주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도 정도껏이지 이런 말에는 도대체 어떻게 반응을 해 줘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진아…… 어미가 우리 아진이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겠는데 그게 무슨 말일까?”
“말씀드린 대로예요. 어머니.”
그러면서 아진은 북리소은에 대해서 말을 했고 양주은도 북리세가에 대해 익히 알고 있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영검 대협이라면…….”
그러면서 그녀는 아진이 서두르는 이유를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무영검 대협이 시한부라는 걸 알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급한 모양이구나.’
그렇게나 바란다면 아진을 붙잡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양주은은 그때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면서 산본의가에서 가장 귀한 약재와 환단을 보관하는 곳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몇 가지 귀한 약재와 환단을 챙겨서 나왔다.
무영검이 아진을 거절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성의는 보이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그것들을 잘 챙긴 채 북리소은 일행에게 가서 말했다.
“소저. 아진이가 속 썩이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속을 썩이면 조금만 봐주기를 부탁할게요. 이 아이가 지금껏 우리 품을 떠난 적이 없어요. 어른을 대하는 것도 미숙하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도 아직 잘 하지는 못해요.”
양주은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지만 그래도 아진을 보내기로 한 뜻은 돌이키지 않았다.
나중에는 북리세가의 두 무인도 이제는 어쩔 수 없겠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작별 인사가 꽤 오래 이어지고 마침내 말 두 필이 산본의가를 떠날 때 아진은 북리소은의 호위 앞에 탄 채 몸을 옆으로 내밀고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산본의가 사람들은 어차피 아진이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제발 상처만 안 받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아진은 믿고 있었다.
다시 돌아올 때 그는 북리의천의 제자가 되어 있을 거라는 사실을.
* * *
“힘들지 않으냐. 아진아.”
북리소은의 호위인 천이재가 물었다.
북리소은이 천씨 성을 거짓으로 쓰고 있는 것과 달리 천이재는 원래 천이재였다.
북리세가는 다른 대부분의 무가가 그렇듯이 꼭 혈족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외부에서 제자를 받아들여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천이재는 가주가 북리소은을 제선문에 보낼 때 호위를 맡길 만큼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성씨를 따서 복리소은이 천소은이라고 가명을 정한 거였다.
여정이 고되었지만 아진이 조금도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북리소은과 천이재는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무공을 익힌 무가의 아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쯤은 힘들다고 우는소리를 하는 게 맞을 텐데도 아진은 그런 소리가 전혀 없어서였다.
아진이 정말 조금도 힘들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들은 아진이 참는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점점 더 기특하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오라버니. 말이 힘들 테니까 이번에는 제가 아진을 데리고 탈게요. 오라버니 때문에도 무거운데 두 사람이나 태우고 가려면 너무 불쌍하잖아요.”
북리소은의 말에 천이재가 웃었다.
“아진아. 어떻게 하고 싶으냐.”
“저, 저는…… 저는 무사님과 타고 가고 싶습니다.”
북리소은과 천이재는 아진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아진아. 이제 와서 그러면 누님 속상해.”
“그, 그래도 안 돼요.”
그러면서 아진은 먼저 천이재의 말에 훌쩍 올라탔다.
그 모습을 보고 북리소은와 천이재가 서로를 바라본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본의가를 떠나올 때만 해도 혼자서는 말을 타지 못하던 아진이 능숙하게 말에 오른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아진 본인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놀라는 것도 모른 채 말에 타고 천이재를 기다렸다.
“이제 이틀 정도만 더 가면 북리세가에 도착할 것이다. 가만 보니 체력도 좋고 의지도 대단하고 영민하기까지 해서 아주 마음에 쏙 드는구나. 장로님을 뵙거든 나도 잘 말씀을 드리겠다.”
천이재는 아진에게 푹 빠져서 말했다.
북리소은은 말할 것도 없이 아진이 예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오는 동안 제선문과 남궁세가의 관계를 상세히 알려주고 의방에서 소지품을 맡아둔 걸 빌미로 혈천방이 돈을 갈취하려 했었다는 얘기며, 괘씸해서 그들 몸으로 시침 연습을 했다는 얘기까지 줄줄이 해 주자 두 사람은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세상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그런 사람이 정말 있다니. 나는 상상도 못 했어.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시침 연습을 하면서 복수를 했다니 정말 통쾌하다. 순순히 하라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국에는 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됐겠구나. 아종이와 아진이는 모두 산본의가의 신동이라고 소문이 난 아이들이니 말이야.”
북리소은은 그런 점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고 천이재는 혈천방 패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면서도 무섭지 않더냐고 물으며 진심으로 기특하게 여겼다.
“나중에는 약초도 뜯어 오라고 했어요. 어차피 그 아저씨들은 산본을 들쑤시고 다닐 거니까 어떤 게 약초인지 볼 줄 아는 눈을 갖기만 하면 잘 뜯어 올 거예요.”
그 말에는 두 사람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나는 정말 이해가 가질 않는다. 나라면, 내가 아진이 네 나이라면 무서워서 절대 그런 소리는 못 할 거다.”
천이재가 말하며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