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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4화 (24/470)

제24화

24화

아진이 자신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준 것이라고 말하자 가주도 흔쾌히 승낙했다.

부자지간에도 서로 전해 주지 않는 것이 무공이라고 하지만 가주는 형이 건강을 되찾은 모습을 보고 아진에게 아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가는 동안 구경도 많이 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자. 아진아.”

“네. 스승님.”

한껏 기분이 좋아진 채로 북리의천의 처소로 돌아갔을 때 무인들이 급히 그를 찾아 나오고 있었다.

“장로님!”

“무슨 일이냐.”

사색이 된 얼굴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북리의천이 묻자 그들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정 의원이 죽었습니다. 자결을 한 것 같습니다.”

“정 의원이 자결을 했다니. 너희는 뭘 하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자를 지키고 있지 않았느냐!”

“그것이……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면서 저희에게도 다시 명령이 떨어져서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잘 묶어서 가두었기에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송구합니다. 장로님.”

“아니다.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잡은 사람을 지키는 일에 인력을 배치하기에는 세가 내의 일이 긴박하게 돌아가기도 했고. 별수 없는 일이다. 제선문과의 관계를 밝히면 되는 것이니 마음 쓰지 말거라. 자기가 자결을 한 것을 무슨 수로 막겠느냐.”

처음에는 질책을 하던 북리의천이었지만 상황을 깨닫고는 오히려 무인들을 달랬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아진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마주친 거였지만 정진환은 자기애가 강한 자였다.

그런 사람은 어떻게든 자기가 살길을 마련하고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서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내는데 정진환이 너무 일찍 포기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진아. 너는 처소로 돌아가 있거라. 오늘은 아무래도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구나. 나도 같이 도와야겠다. 이곳의 일이 빨리 끝나야 산본의가로 갈 수 있으니 오늘은 조금만 참고 있거라.”

“예. 스승님.”

대답은 했지만 처소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다.

북리의천이 몇 명의 무인들을 이끌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아진이 다른 곳으로 가려던 무인에게 다가갔다.

“저. 무사님.”

“서 공자.”

“아진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런데 정 의원님을 제가 좀 볼 수 있을까요?”

“네가?”

그래도 아직 어린앤데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보게 해도 되는 건지 걱정이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진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본가에 있을 때도 죽은 사람을 자주 봤어요. 그리고 저는 의원이 될 사람이라 시신을 봐 두는 게 도움이 돼요. 사인을 알고 있는 시신을 직접 봐 두면 나중에 역으로 사인을 찾아낼 때도 도움이 되고요. 저에게는 꼭 필요한 일인데 어떻게 안 될까요?”

“그런 거라면 당연히 데려다줘야지. 가자.”

그가 흔쾌히 말을 하며 앞장섰고 아진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가는 동안 아진의 머릿속에서는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정진환이 자결을 하지 않았다면 누군가 죽인 걸 텐데 그렇게 해서 이익을 얻을 사람이 누구고 누구에게 그럴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세가가 이렇게 크니까 안에서 별별 일이 다 생기는구나.’

처음에 북리세가에 왔을 때 엄청난 규모를 보면서 놀라고 부러워했던 게 떠오르면서 이제는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경험하는 것이 나쁜 것 같지도 않았다.

“거기에 들어간 사람은 없었어요?”

“없었지. 문을 잠가두고 우리는 일을 보러 갔으니까.”

“무사님. 혹시 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줄 수 있으세요?”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가주님도 너를 믿으시니까 그렇게 했다고 질책하지는 않으실 거다. 그런데 꼭 혼자 가야 하는 거냐?”

“네. 그렇게 하면 좋겠어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너는 정말 신기하구나. 나는 이 나이에도 죽은 사람이 있는 방에 혼자 들어가라면 못 갈 것 같은데.”

“어려서부터 시체를 많이 봐와서 괜찮아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게 사람의 것이 아니라 괴수의 시체라는 게 좀 달랐고, 어렸다는 것도 무사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여기다. 아진아. 나는 밖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거든 바로 부르거라. 지금이라도 내가 같이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으면 말을 하고.”

“아니에요. 무사님. 감사합니다.”

아진은 혼자 안으로 들어가고 그의 앞에서 문을 닫았다.

지금부터는 모든 감각을 일깨워야 했고 그렇게 얻은 정보가 온전히 정진환의 것만이길 바랐다.

무사의 것을 구분해낼 수는 있겠지만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부탁을 한 터였다.

정진환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죽음에 무방비로 당한 모습이었다.

방에는 정진환이 죽으면서 쏟아 낸 분비물의 냄새가 역하게 퍼져있었다.

죽은 지 오래 지나지 않았다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아진은 정진환에게 다가가 그의 몸에 손을 대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죽은 시간이 언제인지 알 수가 없고 마나의 치유력이 이 경우에도 통할지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마나를 불어넣어 정진환의 몸을 회복시키자 서서히 맥박이 뛰기 시작했다.

‘됐다.’

아진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언뜻 보기에 사악하게까지 보이는 웃음이었다.

정진환은 괴로워하는 얼굴로 눈을 떴다.

“이게…… 어떻게 된……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정진환이 깜짝 놀라며 아진을 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문이 덜컥 열리고 밖에 있던 무인이 달려 들어왔다.

“주…… 주……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

그가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서 빨리 보고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런 것 같았는데 아진은 오히려 잘 됐다고 여겼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말해요. 누가 이런 거예요?”

정진환은 아직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는 듯했지만 이렇게 아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급히 말했다.

“천의. 그 자일 거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지고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는데…….”

그러다가 그가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한테 먼저 손을 쓴 거군. 언제 그런 거지?”

“곧 다른 사람들이 올 거예요. 그러면 나하고 말할 기회도 사라질 거예요. 생각은 혼자 하고 나한테 꼭 해야 할 얘기나 하세요.”

자기를 죽이려고 한 사람에게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었다.

정진환은 아진을 힐끔 보더니 어물거렸다.

“네가 나를 살린 거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천의라는 사람이 왜 그런 거죠? 그 사람은 제선문 의원이 아니라는 것 같던데?”

“사람들이 모두 같은 동기로 움직이는 건 아니지. 나한테 무영검 장로를 죽이라고 했다. 네 치료가 잘못돼서 죽은 것처럼 하려면 서둘러야 할 거라고 했어. 약재를 구해 준 사람도 천의다. 그리고 나한테 서문 세가의 수석 의원 자리를 제안했지. 이 일을 해결하면 나를 거기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천의가 의원님을 죽인 거라는 거죠?”

“내가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든 사람이야 많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나를 죽여야 할 정도로 강한 동기를 가진 사람은 천의다.”

그는 그 생각을 하자 화가 들끓는 것 같았다.

“너한테 궁금한 걸 물어도 되겠느냐.”

“묻는 거야 상관없어요. 다 대답해 주겠다고 장담은 못 하지만요.”

“어떻게…… 한 거냐. 어떻게 죽지 않은 거지? 너는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나도 몰라요.”

아진이 말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들어왔다.

정진환이 죽은 걸 봤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소스라치게 놀랐고 그중에는 귀신을 본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자도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아진아.”

그들과 함께 온 북리의천과 가주의 놀라움은 다른 사람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주 죽은 건 아니고 가사상태에 빠져 있었어요. 가지고 있던 환단을 먹였더니 깨어났고요.”

아진은 되는대로 갖다 붙였다.

환단을 먹였다고 하면 따로 증명할 필요도 없을 터라 그렇게 둘러대자 이제는 두 사람의 시선이 무인들에게 향했다.

“가사상태에 빠진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는 말이냐.”

가주가 말하자 아진이 나섰다.

“약재를 이용해서 장기의 기능을 멈춘 거라 다른 분들이 옆에서 봤으면 다 죽었다고 믿었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북리의천이 생각나는 것이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 중에 귀식대법이라는 것이 있지. 그걸로 심장이 뛰는 걸 멈출 수 있다고 하더구나. 가끔 그렇게 죽은 것처럼 하고 적진에 남아 있다가 사람들을 죽인 자들이 있었지.”

북리의천이 말을 마치고 정진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것도 감추지 말고 소상히 말하거라. 네가 네 죄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자 정진환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제가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 북리세가에 큰 해를 끼칠 뻔했습니다.”

“네가 왜 그런 건지는 대충 이해를 하고 있다. 네가 제선문의 살수라지.”

북리의천의 말에 정진환은 아진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기가 말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때부터 정진환은 북리의천이 묻지 않은 것까지도 줄줄이 고백하기 시작했다.

“천의가 그랬다는 말이 사실이냐. 네놈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려고 괜히 천의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가주가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호통을 쳤지만 정진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그는 북리의천이 나았다고 했을 때 의원들이 모여서 나눈 이야기도 전부 들려주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전부 상세히 얘기하자 북리의천이 웃었다.

“너는 그때 무슨 말을 했느냐. 그 이야기를 조용히 묻고 넘어가려고 하니 이야기가 맥이 끊기는 것이 아니냐.”

“그, 그것은…… 그것이…….”

정진환은 차마 자기가 한 말은 할 수가 없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가주의 호통을 받고야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제가 질투에 눈이 멀어서…… 저렇게 어린아이가 무영검 장로님의 병을 고쳤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북리의천은 가주를 바라보았다.

“세가의 의방이 이렇게 뿌리 깊게 썩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형님. 아진이가 아니었다면 믿을 수 없는 자들에게 몸을 맡겨야 했겠습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의술을 모르는데 저자들이 필요한 처방이라고 하면서 죽을 방도를 가르쳐주면 우리는 그 말을 믿고 그대로 따랐겠습니다.”

“은아가 의술에 뜻을 둔 것이 다행인 거군요.”

그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천의를 처리할 방법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아진이 너에게 좋은 생각이 있느냐? 천의를 어떻게 잡아 들이면 좋을 것 같으냐.”

“천의는 아직 정 의원님이 살아난 걸 모르니 그걸 이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정 의원님이 살아났다고 소문을 내면 천의는 스스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은 정 의원님이 죽었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놓고 있을 텐데 정 의원님이 살아서 사실을 밝히면 안 될 테니까요.”

“그렇구나. 우리는 함정을 파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구나.”

“네. 스승님.”

“그럼 작전을 세워보아라. 함정을 어떻게 파면 좋을지. 네가 하자고 하는 대로 하겠다.”

가주의 말에 아진이 웃었다.

“정 의원님을 가두고 갑자기 일이 생긴 것처럼 해서 세가의 무인들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천의가 다시 정 의원님을 처리하러 오지 않을까요?”

“좋구나. 아진이 네가 사라진 것처럼 하면 되겠다. 그러면 무인들을 동원하는 것도 이해가 될 거다. 재미있구나. 천의가 혼자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으니 이번에야말로 그자와 관련된 자를 뿌리째 뽑아낼 수 있겠다.”

북리세가에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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