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43화
정진환은 문주에 대해 생각했다.
그라면 북리세가의 무인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끔찍한 고신을 가하면서 얼마든지 웃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살수를 가르칠 때 문주는 후보가 된 이들을 한 공간에 불러 모았다.
사방이 석벽으로 막힌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제선문의 의녀들을 눕혀놓고 아직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피부를 가른 채 장기를 보여주고 그곳에 침을 놓으면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 보여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경악하던 이들도 시간이 지나고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죽어 가는 의녀들에게 동정을 느끼지 않게 됐다.
그러면서 그들은 제선문의 살수로 새롭게 태어났다.
“손이 그렇게 돼서 침을 던지는 건 보여 주지도 못하겠네요.”
아진에게 그 정도 것을 고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정진환은 아진의 말을 들으며 다시 자기를 고쳐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라고 여겼다.
깊은 한숨이 나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다시 돌이킬 방법은 없는 걸까.
그러나 아진은 정진환의 이야기를 들어 줄 생각은 없는 듯했고 살수의 비전을 전수하라며 채근했다.
정진환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든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어느덧 포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눈앞의 조그만 어린아이에게 점점 겁이 났고 어쩌면 제선문의 문주가 차라리 상대하기가 편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아진은 정진환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런 것이 그냥 듣기만 한다고 터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도 아진은 꼼짝 않고 이야기를 들었다.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정진환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가 배운 것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끝이에요?”
“끝이다.”
이제는 뭐라고 말을 해도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었다.
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잊기 전에 천의를 찾아가 구슬을 보여 주었다.
“이걸 본 적이 있는지 기억해 보세요. 여기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으면 최대한 선처를 베푸시도록 가주님께 말씀을 잘 드려볼게요.”
아진이 다녀가고 난 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하던 천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픈 척을 해야 하는지 정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해야 하는지 헷갈렸다.
그러나 아진이 전부 다 아는 것처럼 말을 하자 별수 없다는 듯 구슬을 받아들었다.
“이건 어디에서 얻은 것이냐.”
그는 그런 구슬을 본 적이 없었다.
뭐가 대단해서 아진이 가져온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 아진이 자기를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찾아오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기억을 더듬는 척했다.
아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작 천의 자신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천의의 몸 주위로 물안개가 피어나는 듯하더니 그 기운이 빠르게 구슬을 향해 빨려들어 갔던 것이다.
“이제 주세요.”
아진이 손을 내밀며 말했지만 천의는 구슬을 꽉 쥔 손을 뒤로 돌렸다.
“기억이 난다. 전에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걸 어디에서 본 건지 그게 기억나지 않는 것뿐이다.”
“그냥 주세요. 고집부리지 말고요.”
천의의 행동을 보면 천의 자신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듯했다.
“구슬이 진기를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요. 구슬을 던지세요.”
아진이 말했지만 천우는 실소를 흘리더니 나중에는 그것이 광소로 변했다.
“재미있구나. 정말 재미있는 말이야. 너라는 놈은 정말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건방지게 군다는 것이냐.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다니. 거짓말을 하려면 최소한 성의라도 보여라. 차라리 지금 밖에 범이 나타났다고 하지 그러느냐.”
“범은 없어요. 하지만 구슬이 진기를 빨아들이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아진은 잠시 갈등을 일으켰다.
하얀 물안개 같던 것이 점점 색을 달리했다.
투명한 물에 진한 핏방울 하나가 번진 것처럼 아주 희미한 붉은 빛이더니 그것이 순식간에 암적색으로 변하다가 마침내 묵빛으로 치달았다.
변화는 더 이상 거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생기가 빠져나가고 그렇지 않아도 노쇠해 보이던 천의의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눈을 한 번 깜빡거리는 사이에 10년은 늙어 가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천의 자신도 변화를 알아차린 듯했다.
“이…….”
그는 당황한 듯하더니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네놈이 지금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구슬을 놓지 않은 것은 그의 탐욕 때문인지 구슬의 저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천의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북리세가의 무인들이 아니라 북리의천이었다.
그 뒤에 독고소영이 따라 들어왔다.
두 사람은 천의의 몸에서 나오는 진기를 알아보고 짧게 비명을 터뜨렸다.
“아진아. 이리 오너라!”
북리의천이 놀라며 아진의 팔을 잡아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독고소영에게 아진을 넘겼다.
“아진을 잘 지켜야 한다. 소영.”
독고소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진을 꼭 안았다.
그녀의 다른 손은 이미 검파에 얹어져 있었다.
아진은 북리의천의 뒤쪽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천의를 살폈다.
묵빛은 점점 더 짙어졌다.
그보다 더 짙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계와 상상을 벗어나며 계속해서 더욱 진해지고 있었다.
칠흑같은 밤을 지나 지옥의 심연을 연상케 하는.
세상의 모든 빛을 빨아들여 버린 것 같은 완벽한 어둠이 천의의 주위를 감돌았다.
아진은 천의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구슬을 놓지 않는 것을 보고 있었다.
천의가 움켜쥔 건지, 버리려고 하는데도 버릴 수가 없는 건지 아진은 그것을 알고 싶었다.
북리의천은 구슬이 사이한 힘으로 천의를 잠식한다고 생각하며 천의에게서 구슬을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천의는 구슬을 놓지 않았고 북리의천은 검을 휘둘러 천의의 손목을 잘라냈다.
손목이 잘렸지만 피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고 그 대신 잘린 부위를 통해 완전한 어둠 같은 묵빛 기운이 폭포처럼 구슬을 향해 휘몰아쳐 들어갔다.
천의의 입과 눈이 크게 벌어졌다.
오랫동안 호흡을 금지당한 것처럼 그는 숨을 쉬려고 아등바등하는 것 같았다.
“허…… 허, 헉……!”
그것이 천의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노려본 채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독고소영은 놀라며 아진의 눈을 가렸다.
그러나 아진은 독고소영의 손을 내렸다.
북리의천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
그들의 시선은 서서히 구슬로 향했다.
구슬은 천의의 진기를 전부 흡수하고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묵빛이 더 짙어진 것 같지도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아진아.”
북리의천이 의혹 가득한 얼굴로 아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구슬에 대해 아는 게 있냐고 물었더니 그때부터 꽉 붙잡고 놓지를 않았어요. 처음에는 물안개 같은 게 빨려들어 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색이 붉어지다가 검어졌고요.”
아진은 북리의천에게 설명을 하면서 자기가 아는 것이 정말 빈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리의천은 다시 구슬을 보면서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진이 네가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북리의천은 구슬이 천의를 죽이는 것을 봤기에 그것을 아진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도 갖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부수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독고소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북리의천의 말을 거들었다.
“만약 부수지 못하면 묻어 버리기라도 하자. 어디 먼 곳에 가서. 이건 절대 정상적인 힘이 아니야.”
아진도 그 힘의 실체를 알 수 없는 구슬이 마음에 걸렸고 그들의 말을 따르려고 했다.
북리의천은 그 자리에서 구슬을 부수기 위해 검에 내공을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강기를 덧입은 검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났다.
북리의천은 그대로 구슬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강기에 휘말린 것은 천의의 시신이었을 뿐 구슬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사나운 광풍에 미약하게 흔들리다 멈춘 것이 고작이었다.
그 옆에 있던 천의의 시신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한 줌의 가루로 변해 버린 후였다.
“…….”
독고소영은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북리의천의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면 자기가 해 보겠다고 나서보기라도 하겠지만 조금 전에 북리의천이 보인 검술은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따라 할 수가 없을 듯했다.
“의천…….”
독고소영이 난감한 듯 그를 불렀지만 북리의천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불길하다.
사이한 힘을 가진 구슬을 애초에 아진에게 주는 게 아니었다.
북리의천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들이 순서 없이 뒤엉켰다.
“가져다 묻자. 땅을 깊이 파서.”
독고소영의 말에 북리의천은 아무래도 그 방법밖에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자주 찾지 않는 심산에 가서 구덩이를 수십 장 깊이로 파고 묻어 버리면 괜찮지 않을까 하면서 북리의천은 구슬을 집어 들려 했다.
그러나 구슬은 바람이 불기라도 한 것처럼 아진의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가 그의 발 앞에서 멈췄다.
북리의천은 그 모습에 더 기분이 나빴다.
사악한 것이 어린 제자를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만지지 마라. 아진아. 소영. 아진을 지켜라.”
북리의천이 말하자 독고소영이 다가와 아진을 안아 들었다.
구슬은 아진이 독고소영에게 안기자 조금 더 구르다가 멈췄다.
그러다 북리의천이 구슬을 집어 들려 했을 때 소름 끼치는 뇌기가 그의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곧바로 손을 뗐지만 손끝에 검은 그을음과 함께 화상이 남아 있었다.
통증을 떠나 뇌기 특유의 소름 끼치는 느낌 때문에 다시 만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뇌기인가요. 스승님?”
“그렇구나. 이렇게 강한 뇌기는 본 적이 없다.”
북리의천은 손가락을 보여주었다.
“곧바로 호신강기를 펼쳤는데도 이렇게 됐다…….”
그 말은 구슬에서 나온 뇌기가 북리의천의 내공을 이겼다는 의미였다.
아진은 몰라도 독고소영은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북리의천이 작정을 하고 막았는데 그 호신강기를 뚫고 뇌기가 흔적을 남겼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강호 삼제라고 불리는 이들이라고 해도 북리의천이 미리 대비를 하고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한다면 상처를 내는 것이 불가능할 터였다.
그런데 구슬에서 나온 뇌기가 화상을 입혔다니.
손가락의 기능이 크게 손상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사실만으로 충격적이었다.
아진은 북리의천에게 가서 그의 손을 잡았다.
북리의천은 따뜻한 기운이 들어오며 자신의 손가락 끝의 죽은 살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뇌기도 대단했지만 아진의 힘은 한술 더 떴다.
독고소영도 그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해 볼까?”
독고소영이 말하자 북리의천이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아진을 위해서는 누구라도 그 일을 해야 할 것 같았고 독고소영의 실력을 믿는 마음이 커서 기대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