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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70화 (70/470)

제70화

70화

이제 성주는 아진이 자신에 대한 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해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아진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컸던 그는 오히려 한 번 그것이 흔들리자 아진에게 더욱 깊이 의존했다.

어떻게 보면 광신자처럼 보일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아진은 쉽게 성주를 요리했고 성주가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 같으면 자기가 진료한 환자 중에 그런 증상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말을 해본 거라는 식으로 간단히 넘어갔다.

린린은 아진이 종종 자신을 바라보는 걸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하는 걸 잘 보고 있다가 나중에 너도 이런 일이 생기면 잘 써먹어.’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린린에게 가르쳐 주려고 성주를 직접 요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주님. 이렇게 저희에게만 시간을 써 주셔도 되는 건지 그게 정말 걱정이 됩니다.”

아진이 말하자 성주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며 두 손을 저어댔다.

“그동안 격무에 시달려왔으니 한 번은 이런 좋은 시간을 보내도 됩니다. 검신 대협의 제자분과 좋은 관계를 만든다면 산동성에도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니 조금 마음이 놓이기는 합니다만 저희는 사전에 아무 연락도 없이 왔고 성주님의 일정은 미리 짜여 있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 자들이야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걱정까지 하시다니. 정말 생각이 깊으시군요.”

“저는 제가 다른 사람의 기회를 뺏는 것을 아주 안 좋아해서 말입니다.”

아진이 계속 그 문제를 신경 쓰는 듯하자 결국 성주도 마지못해 사실을 이야기했다.

“실은 저를 찾아온 사람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자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왔으니 검신 대협의 제자는 그냥 보내버리고 자기하고 얘기를 하자고 하면 그건 분수를 모르는 일이지요. 만약 그렇게 말을 했다면 제가 내쳤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난처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뭐가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러시는 건지요.”

아진은 그 정도에서 말을 멈춰도 되는 거였지만 이제 아주 조금만 있으면 성주가 낚싯바늘에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꺼져가는 불씨를 살렸다.

성주는 그동안 남궁진에 대한 얘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게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진이 그 이야기를 집요하게 하자 조금은 귀찮아졌다.

그러나 초저녁부터 꾸준히 들어간 술이 그의 이성을 조금씩 흐리게 하고 있었고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실수를 했다.

입이 점점 가벼워지고 좀체 나오지 않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왔던 것이다.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죠. 소협도 그 이름을 한 번은…… 아니. 그 사람의 이름은 들어 보지 못했겠습니다. 그래도 가문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가 클클거리며 웃어댔다.

“소협이 직접 그 가문을 도륙 내셨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소협이 그런 식으로 없애버린 조직이 꽤 많아서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남궁세가라면 상당히 큰 규모니 기억을 하시겠지요?”

“남궁세가 말입니까?”

아진은 짐짓 놀라는 척 물었다.

반응을 보여야 신이 나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갈 터였다.

“남궁세가는 그날 전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남은 이들이 몇 명 되었습니다. 그게 당연한 거기는 했을 겁니다. 남궁세가의 사업장에 나가 있는 무인들도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군요.”

북리세가에서는 추살조를 꾸려 남궁세가의 잔당을 찾아내 처리했지만 아무리 그랬다고 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사람이 몇몇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성주님도 모르시는 것 아닙니까? 자기가 남궁세가 무인이라고 말을 한다고 해도 신분 패만 보고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시체 옆에 떨어져 있는 걸 주워서 신분을 도용했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성주는 그것이 도발이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한 채 그에게 넘어갔다.

“저를 너무 우습게 보신 것 같습니다. 소협.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순순히 속아 넘어가겠습니까. 당연히 확인을 했지요. 그는 죽은 가주의 아들입니다. 어미의 신분이 천해서 남들 앞에 내놓지 못했지만 그래도 절기도 알려주고 추궁과혈로 벌모세수도 해 준 것 같더군요.”

“그런 것까지 알고 계신 것을 보면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은데 그자와 친분이 있는 성주님이 이 시간까지 저희를 붙잡아 두신 연유가 슬슬 궁금해지는군요. 저희가 올 거라는 것은 모르셨겠지만 그래도 저희를 보신 후에는 여러 생각이 들었을 텐데요. 저를 죽이고 그자와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아진이 별일 아니라는 듯, 그러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말을 하자 성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정도의 말을 들었으면 정신이 번쩍 들 법도 했지만 술기운이 몸을 눅진하게 만들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소협이 가장 잘 아실 것 같은데 농을 즐기시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아니오. 나는 복수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오. 더군다나 남의 복수에는 더더욱 그렇소.”

“그러면 뭡니까.”

그것은 아진이 마지막에 내놓은 덫이었다.

너무 뻔해서, 덫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는 어떤 것도 없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지만 성주는 저를 바라보는 아진의 눈초리를 보며 아진이 자신을 한없이 얕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인을 향한 깊은 열등감이 그 순간 그의 입에 걸린 자물쇠를 터뜨려버렸다.

“구음절맥에 걸린 여자가 필요했소. 만년화리의 내단을 중화하기 위해서.”

“…….”

아진이 성주의 몸에 진기를 넣어 그의 안을 살필 때 상단전으로 열기가 몰리게 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한 것이 어느 정도 작용을 한 듯했다.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라면 아무리 인사불성으로 취했다고 해도 함부로 말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도 말을 해 버린 것을 보면.

“그러니 성주님이 멍청한 자에게 농락당했다고 하는 겁니다. 만년화리의 내단을 중화하는데 구음절맥에 걸린 여자가 무슨 소용이라는 말입니까.”

아진은 속으로 분노가 치미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 말을 이었다.

풀리지 않고 있던 한 가지가 드디어 풀렸는데 그것이 린린을 노린 것이었다는 생각에 아진은 지금이라도 당장 성주의 머리통을 부숴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사람 말을 이렇게 못 믿으시니…… 저에게는 만년화리의 내단이 있습니다. 아무리 소협이라고 해도 그것을 직접 보지는 못 했을 겁니다. 구경을 시켜드릴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없군요.”

성주가 비죽 웃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극양의 영약을 잘못 섭취하다가는 제가 죽을 수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강해지기를 바란 것이지 죽자고 그런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남궁진 공자가 그 문제까지 해결해 주었지 뭡니까? 구음절맥에 걸린 여자에게 그걸 먹이면 몸에서 중화작용을 일으킬 거라고 하더군요. 구음절맥을 앓는 여자의 극음지기가 만년화리 내단의 양기를 중화할 거라고 했지요.”

아진은 우선 노여움을 참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는 알지 못했다.

정작 린린은 그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었다.

‘그렇게 되는 건가? 내 몸이 극양의 영약을 복용하면 중화가 되나?’

“결국 그 기운이 안에서 폭발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겠지만 몸 안에 남은 기운이 사라지거나 외부로 떠나기 전에 불태워 가루를 물에 섞어 마시면 영약의 기운을 모두 흡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진의 신형이 무섭게 움직였다.

성주는 아진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고 그와 동시에 소름 끼치는 통증을 느꼈다.

성주의 목뼈를 당장이라도 부술 것처럼 움켜쥔 아진은 잠시 생각했다.

그를 죽이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라도 생각난다면 멈추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유가 떠오를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생각은 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을 정하기 전에 손가락에 먼저 힘이 들어갔다.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팔을 전부 다 쓸 필요도 없었다.

세 개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자 그것으로 끝이 났다.

성주는 눈알이 돌출되고 핏줄이 터지더니 그 상태로 숨을 거두었다.

“신기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알고 있었어? 정말 내 몸이 그걸 중화할 수 있어? 대단하네!”

린린이 와아, 하고 감탄하면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아냐?”

아진은 성주의 몸을 저만치 던져 버렸다.

목숨을 잃은 성주의 몸에서는 일시에 긴장이 풀리는 동시에 악취가 풍겼다.

“그래도 아직은 성주가 죽은 걸 들키면 안 되니까 의자에 그럴듯하게 앉혀 놓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러고 보면 린린은 늘 그랬던 것 같았다.

미쳤어, 오라버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오라버니가 지금 사람을 죽였다고!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기나 해? 이 사람이 누군지 아냔 말이야!

그런 반응은 린린에게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린린이 보이는 반응은 아진에게 현실감을 쾌속으로 안겨 주었다.

“큰일은 큰일이네. 관은 건드리지 말라고 아버지가 그러셨잖아. 아무리 무인들이 강해도 혼자서 수천 명을 이길 수는 없다고.”

“…….”

아진도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현령까지는 수습한다고 해도 성주는 아무래도 너무 나갔다.

현령을 응징한 것보다 성주를 죽인 것이 아진에게는 더 자연스러웠지만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슬슬 고민이 되기는 했다.

‘튀어야 하나? 이럴 거면 내가 누군지 말을 하지 말걸. 내가 도망가면 나를 잡으러 산본의가로 사람들이 올 텐데. 본가까지 위험해지겠어.’

아진은 뒤늦게 후회했지만 린린이 그것을 알아차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린린. 소청이와 부인을 모시고 본가로 돌아가. 그리고 아버지께 이 일을 말씀드려. 나는…… 이걸 사고로 위장해 볼게.”

“내가 옆에 있는 게 나아. 사고로 위장하는 게 끝날 때까지는 같이 있을게. 그다음에는 오라버니가 시킨 대로 할게. 어차피 나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고 현장이나 만들어.”

린린이 말하고 있을 때였다.

아진이 린린이 설득하려 하기도 전에 한 사람이 창문으로 걸어왔다.

그곳이 6층짜리 전각의 꼭대기 층인 것을 생각하자면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아진은 말을 하다말고 창문 앞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린린도 아진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럴…… 수가. 저기 지금 밑에 아무것도 없잖아. 저 사람 지금 허공에 떠 있는 거야? 별 볼 일 없는 사람 아니었어?”

린린이 말했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머릿속에서 해야 할 생각을 그대로 입으로 흘리는 듯했다.

“그러게 말이다.”

아진은 일찌감치 검을 빼 들었다.

상대와 겨루게 될 일이 생겨도 웬만해서는 자기가 먼저 검을 뽑아 드는 일은 없는 그였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그런 식으로 싸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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