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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77화 (77/470)

제77화

77화

녹색 실로 ‘현(玄)’이라는 글씨가 수놓아진 옷을 입은 무림맹의 현무단이었다.

아진과 린린은 그 자리에 멈췄고 말을 타고 온 이들이 두 사람을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북리세가에서 수많은 무인을 봤지만 무림맹을 대표하는 무력부대 소속의 무인들을 보자 기분이 남달랐다.

“우리는 무림맹 현무단 소속입니다. 누구십니까.”

말에서 내린 젊은 남자가 아진에게 물었다.

“지나가는 사람인데 짐승들을 쫓고 있었습니다. 시신을 괴롭혀서요.”

그러자 그가 시신과 짐승의 사체를 보더니 다시 아진을 바라보았다.

“좋은 일을 하고 계셨군요. 이 정도는 관에서 알아서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가 보셔도 됩니다. 이곳은 우리가 맡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아진이 길게 말을 하지 않고 그냥 가려고 하자 젊은 남자가 아진을 붙잡았다.

“혹시…….”

“예?”

“혹시 검신 대협의…….”

“예, 서도진이라고 합니다.”

아진이 포권(包拳)을 취하자 남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 맞군요. 설마 했습니다. 여기에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계십니까?”

“지나가는 길에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현무단주 당채운이라고 합니다. 대협께 말씀을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의원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으십니까, 소협이라고 부르는 게 좋으십니까?”

“의원이니 의원이라고 부르시는 게 낫겠습니다. 소협이라고 불릴 위인은 아닙니다.”

당채운은 아진이 말을 하는 동안 신기한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너무 많은 얘기를 들어서 전설처럼 여겨지던 인물을 눈앞에서 만나게 되자 감격에 겨웠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의원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산본에 안 계시다고 해서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렇게 뵙게 되다니. 이건 하늘의 뜻인 것 같습니다. 의원님. 부디 제가 이번 일을 해결하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큰일을 맡았는데 능력이 미천합니다. 저는 꼭 이 일이 여기에서 끝을 맺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열의가 넘치는 당채운을 보며 아진도 마음이 열렸다.

아진 역시 할 수만 있다면 이 일을 종결시키고 싶었다.

그동안은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자격도 되지 않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자리에 있지도 않아 멀리서 안타까워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어쩌면 이번에는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가진 재주가 미천합니다만 도울 방법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돕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의원님이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가 시원시원하게 웃다가 뒤늦게 린린을 바라보았다.

“이분이…… 혹시 의원님의 동생이신 이린 소저이신지요?”

“예. 제 누이입니다. 이린까지 아실지 몰랐습니다.”

“검신 대협과 함께 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넉 달 정도 함께 지냈었는데 저희의 일과는 의원님에 대한 얘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해서 의원님의 얘기를 듣는 것으로 끝났지요. 그러다가 가끔 이린 소저 얘기도 해 주셨고요. 서도종 의원님에 관한 얘기도 많이 들었고 그래서 산본의가가 남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희 가문 사람들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하는걸요.”

당채운이 말하고 린린에게 인사하자 린린도 반갑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당채운은 내친김에, 함께 온 현무단원들도 소개를 해 주었고 그들 모두 아진과 린린에 대해 얘기를 많이 들었다면서 도움을 부탁했다.

무림맹의 무력부대 무인들이 그렇게 순순히 마음을 연 것은 순전히 북리의천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아진과 린린은 그대로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간단한 소개와 인사가 끝나고 그들은 곧장 현장 감식에 들어갔고 당채운은 아진의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

“의원님. 독고세가 때도 사건 현장을 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같은 수법인 것 같은가요?”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수들의 시신을 보고 현무단원 중에 많은 사람이 구토를 했는데 그게 어떻게 생긴 상처인지 설명을 들은 후에는 더욱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이곳의 일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음에 어느 곳이 목표가 될지 그것을 아는 게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혹시 아시는 게 있다면 얘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아진이 묻자 당채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단편적인 정보들을 모으고 있긴 합니다만 그걸 어떻게 종합을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걸 말씀해 주시는 게 어렵지 않다면 들려 주셨으면 합니다. 제 누이는 그런 것을 아주 잘 다룹니다. 정보를 종합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측하죠.”

“아! 검신 대협께서도 그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의원님을 뵌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린 소저를 뵌 거야말로 천운인 거군요.”

당채운의 눈이 반짝 빛나자 린린이 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너무 기대하게 만들어서 자기를 부담스럽게 했다고 불평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아진은 기대하는 게 있었다.

린린이 무엇을 갖고 태어났더라도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차리려면 계기가 필요했다.

아진은 린린이 가진 그릇의 크기를 알고 있었고 린린이 마침내 그것을 온전히 펼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시신을 살피고 정해진 장소로 옮기며 당채운은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것은 무림맹에서도 극히 일부에게만 전해진 내용이었지만 아진과 린린에게 말을 하는 것에 그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사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당채운은 자기가 너무 큰 일을 맡았다고 생각했다.

세간의 이목이 쏠린 만큼 이번 일을 잘 해결하면 사천당문의 이름이 드높아질 거라면서 잘해 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당채운은 그게 그리 달갑지 않았다.

자기보다 적임자가 있다면 그를 추천해서 이곳으로 대신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자신의 영달이나 문파의 명예를 위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뜻을 같이 품었던 사람들이 맞이한 죽음이었다.

힘을 다해서 그 이유를 밝혀내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은 아닌가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 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아진과 린린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 지금, 얼마나 마음이 놓이고 기대가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하오문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입니까?”

“예. 의원님.”

“그러면 제갈세가의 정보각에서 들어온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처음에 말한 것이 제갈세가의 정보각을 통해 들어온 내용입니다.”

“그건 과거에 일어난 일의 단편적인 통계뿐인데 자기들이 알아낸 것을 혼자만 알겠다는 욕심에 스스로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 같군요.”

아진의 말에 당채운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린린.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아진이 묻자 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린린이 걸음을 옆으로 옮기며 당채운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당채운은 린린이 뭘 하는가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갈세가의 정보각에서 주었다는 정보는 정확히 이런 역할을 합니다. 단주님이 어딘가로 시선을 향하고 있을 때 무의미한 동작을 취해서 단주님의 시선을 다시 돌리는 것처럼요. 제 생각에 단주님처럼 열의를 가진 분이 그동안 이 문제에 열심히 매달리고도 해결을 보지 못한 것은 매번 아주 중요한 시기에 이런 식으로 단주님을 차단한 행동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채운은 어리둥절해졌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더 이상한 것은 아진과 린린이 당채운이 하는 말을 듣고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거였다.

“미안합니다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채운은 자기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조바심을 냈다.

“저희도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단주님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도와드릴 게 있다면 뭐라도 다 도와드릴 것입니다. 검신 대협께서도 그러라고 하실 거고 저 역시 이 사건을 해결해서 다시는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막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지원해 드릴 테니 어려워하지 말고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당채운의 말에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현무단원들도 그 말을 듣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왠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몇 구의 시신은 조금 더 면밀하게 관찰을 해 보고 싶습니다, 단주님.”

“알겠습니다. 곧 조처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림맹 제남 분타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니 그곳으로 가시지요.”

“그러면 객잔에서 제 일행을 데려와야겠군요. 일행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거기에서 뵙겠습니다.”

무림맹 분타에서 다시 보기로 하고 그들은 헤어졌다.

린린은 그렇지 않아도 아진과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있었기에 잘 됐다고 생각했다.

“제갈세가 말이야. 악랄하네. 영악하다고 해야 하나? 제갈세가가 내놓은 정보들은 조작된 것 같지?”

“응.”

아진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아마도 현무단이 개방과 하오문에서 준 정보로 한 발을 앞으로 나가면 제갈세가에서 내놓은 조작된 정보 때문에 그 자리에 묶여 있거나 때로는 뒤로 퇴보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정작 제갈세가 사람들은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이 일의 뿌리를 들여다보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화가 치밀었다.

남궁세가를 등에 업은 제선문이 산본의가를 사사건건 괴롭힐 때 남궁세가의 편에 서서 중재를 한 것도 제갈세가였기에 아진은 그 전부터 제갈세가에 대해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왔는데 당채운에게 얘기를 듣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제갈세가에서 했다는 말을 빼고 보면 논리가 통해.”

린린의 말에 아진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어 있는 부분은 우리가 유추를 할 수가 있고. 제갈세가에서는 이 일을 해결해서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 싶었을 수도 있고 자기들이 이익을 얻으려고 했을 수도 있어.”

“둘 다 포기하기가 힘들기는 했겠지.”

린린이 말을 하고 아진을 바라보았다.

“정보를 독점하고 있었다면 제갈세가는 이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지 몰라. 어느 무가가 공격을 당할지, 어떤 살수 단체를 이용할지 알아내는 것도 어렵지도 않았을 거야.”

“뭔지 알겠어.”

아진이 우뚝 멈춰 서며 말하자 린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구슬이야. 구슬에 대한 소문이 났잖아. 그동안 오라버니가 해 왔던 기행에 대해서도 들었을 테고 그거랑 구슬이 연관됐다고 생각했을지 몰라.”

“빨리 가자. 린린. 내 생각이 맞다면 그 사람들 지금 객잔에 머물고 있을지 몰라.”

제남에 있는 객잔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기에 객잔을 전부 뒤지고 다닐 수야 없겠지만 아진이 걱정하는 것은 소청과 부인이 머물고 있는 곳에 그들이 있다가 서로 맞닥뜨리는 거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객잔에 도착했을 때 아진은 소청의 방이 빈 것을 발견했다.

“……!”

린린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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