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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08화 (108/470)

제108화

108화

“그런데 왜 이렇게 밖이 시끄러운 것 같지?”

편월방 패거리 중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며 중얼거렸다.

소피를 보려고 그런 건지 미리부터 바지춤을 풀면서 나오고 있었는데 아진은 그자를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누구냐! 웬 놈이냐!”

아진의 일격을 맞고 쓰러진 놈이 바닥을 나뒹구는 동안 안에 있던 놈들이 일제히 우르르 몰려나왔다.

“웬 놈이냐!”

그들은 무기를 빼 들며 덤벼들었다.

그러면서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저기에 갇혀 있는 아이들을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게 네놈들이 맞느냐.”

아진은 사람 같지도 않은 놈들과 말도 섞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확인은 해야 했기에 물었다.

그러자 몇 놈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안 그래도 이번에 위로 올릴 놈들이 좀 모자랐는데 제 발로 진상을 하려고 온 건가?”

놈들의 시선이 소청과 린린을 향하는 것을 보고 아진은 더 이상 참지 못한 채 검을 뽑아 들었다.

소청에게 실전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는 것도 잊은 채 검을 휘두르자 검에 검강이 맺혔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왔던 놈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검…… 강? 검강을 다루는 고수가 왜 여기에…….”

그들은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듯 도망칠 궁리를 했지만 이미 그때는 아진의 검강이 검을 떠난 후였다.

우물쭈물하며 움직임도 둔한 자들을 죽이는데 대단한 초식을 펼칠 필요도 없었다.

검강이 날아간 자리에서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쓰러지고 그들의 몸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흑주는 그때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편월방 놈들을 향해 달려가 진기를 빨아들였다.

“으으으아아악!”

흑주가 진기를 빨아들이는 것은 정작 진기를 빨리는 사람보다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에게 더 효과가 컸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어떻게든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도망치려고 안달이었고 소청은 그들이 도망치는 자리를 막으며 검을 휘둘렀다.

강렬한 마기가 소청에게서 뿜어져 나갔다.

그자들이 저지른 참상을 미리 보고 와서인지 소청의 분노가 검에 반응하며 전보다 훨씬 더 검격이 단호해진 느낌이었다.

린린은 여간해서 그런 자리에 직접 나서지 않았는데 소청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게 있었던 듯 이번에는 직접 나섰다.

쓰러진 자의 검이 바닥에 놓인 것을 보고 그걸 발로 차서 허공으로 치솟게 만든 후 손에 쥔 린린이 그때부터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을 움직여 수십 개의 검영을 만들어 냈다.

소청이 그것을 보느라고 집중을 하는 바람에 아진은 얼떨결에 다른 놈들로부터 두 사람을 보호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린린의 눈짓에 소청이 린린을 따라 했고 모두 네 개의 검영을 만들어 냈다.

그중 하나는 형상이 흐릿해지다가 아예 없어졌지만 세 개의 검영은 그럴듯하게 실체를 갖추었다.

“날려.”

소청은 비수가 없을 때 그 방법을 사용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비수를 날리듯 검영을 날렸다.

그것이 날아가 사람들의 몸을 쓰러뜨리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흑주가 날아가 진기를 빨아들였다.

“너무…….”

소청이 입을 열었다가 그냥 다물자 린린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던 건지 물었다.

“너무 쉽게 죽인 것 같아요. 이 자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요.”

“그렇기는 한데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기는 해. 화선에는 이런 방파가 수도 없이 많은데 다른 곳도 사정이 비슷할 것 같으니까.”

린린이 말하자 소청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은 소청이 이런 광경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어 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흔들리고 상처를 받겠지만 그곳에서 자신이 걸어갈 길을 찾아가야 할 거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발걸음을 돌렸다.

거적때기 안에 있던 아이들이 어느덧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언제부터 나와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의원님…….”

청수는 맨 앞에 서서 믿기지 않는 눈으로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 죽었어요?”

“그래. 모두 죽었다.”

“그럼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요?”

“돌아가야지.”

말을 한 아진은 이 아이들에게 돌아갈 곳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살던 곳을 기억하는 사람 있어?”

린린이 물었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있다고 해도 그들의 부모가 살아 있으리라고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청수는 자기들을 데려가 주면 안 되나 하는 간절한 표정을 한 채 아진을 바라보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진은 청수의 곁에 있던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아이들의 뺨에 손을 얹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사라진 혀가 다시 생기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치유력이 강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아버지와 형의 손목이 사라졌을 때도 그것을 이식하는 정도로나 가능했는데 이번에는 이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이 다시 만들어지도록 했던 것이다.

혀와 같은 작은 부위라서 그런 건지 능력이 발전한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우선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차근차근해 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청수에게 미리 얘기를 들었는지, 아진이 마나를 불어 넣는 동안 얌전히 있었고 다른 아이들은 그 뒤로 줄을 섰다.

서로 밀거나 욕심을 내지도 않고 어리고 작은 아이들이 먼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그 아이들을 앞에 세워 주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이들은 아진이 기적 같은 일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을 했을 것이고 그런 일을 할 힘이 무한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더 어린아이들을 앞에 세운 것 같아 아진은 그들을 기특하게 여겼다.

아진 자신도 자기가 얼마나 더 치료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힘이 닿는 데까지 아이들을 고쳐주고 싶었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너무나 험한 세상의 모습을 본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마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농후해지고 흐름이 정교해졌다.

“아…… 아…….”

“나도…… 나도 말할 수 있어. 나도 생긴 것 같아.”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혀를 내밀고 새로 생긴 혀를 보여 주며 놀랐다.

다른 아이들은 자기들도 곧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기대에 부푸는 듯했다.

그럴수록 아진과 린린의 마음에는 조바심이 생겼다.

이러다가 마나가 부족해지면 치료를 받지 못한 아이들의 절망감이 더 커질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린린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이제 아진이 고친 아이는 거의 절반 정도가 됐고 그 때문에 그때까지 조용했던 곳이 꽤 떠들썩해졌다.

“의원님은 누구세요? 의원님이라고 해도 이럴 수는 없잖아요. 혹시 의원님은 신선님이세요?”

“신선님이 맞는 것 같아.”

아이들은 신기해하면서 아진이 다른 아이를 고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당해 온 고통은 기억하지 않고 그 순간의 희망을 새로 품고 사는 아이들을 보면 경이로웠다.

이 아이들과 오래 같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우선은 뭐라도 해 보자는 생각으로 린린은 소청을 데리고 움직였다.

패월방파의 패거리들이 있던 전각으로 가자 요리를 하는 곳이 있었다.

린린이 먼저 요리를 준비하자 소청이 거들다가 뒤늦게 정신이 든 듯 제 머리를 딱 쳤다.

“맞아. 예월 누님!”

그러고는 마차로 달려가 벽예월을 데려왔고 벽예월은 겁에 질린 얼굴로 숨어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상황을 바로 이해했다.

“아이들에게 뭐라도 해 먹이려고 지금 음식을 준비하고 있어요.”

소청이 말하자 벽예월도 고개를 끄덕이고 린린을 도우러 갔다.

아무래도 그런 일은 린린보다는 자기가 나을 거라는 자신감 때문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벽예월의 오해인 것으로 판명이 났다.

“물을…… 데워서 아이들을 씻겨 줄까요?”

벽예월이 소심하게 묻자 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도 하고 싶은 것 같은데 그렇게 하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산본의가에서는 질병의 예방을 위해서 청결을 중시했는데 린린도 벽예월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그거야말로 중요한 일일 것 같기도 했다.

물을 데우는 동안 아이들이 와서 그들을 도왔다.

청수는 날아다니는 것처럼 다니면서 음식도 같이 준비하고 어린아이들도 씻겼다.

“오라버니가 내공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다른 곳에는 우리끼리 가야 할 것 같다.”

“그러게요. 다른 곳에 있는 아이들은 이런 일까지는 겪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린린과 소청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벽예월은 아이들을 씻기고 머리까지 감긴 다음 깨끗이 닦아 주었다.

“여기에서 나가면 머물 곳이 있어야 할 텐데. 어디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린린이 말했지만 일단 얘기가 그쪽으로 가기만 하면 아이들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갈 데가 없었던 것이다.

청수는 혹시 자기들을 데려가 줄 수는 없을까 하는 듯 가련하게 바라봤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일단은 식사부터 하자.”

린린이 아이들에게 배식을 해 주자 아이들이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고 린린은 그러면 안 된다고 주의를 시켰다.

“너희.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것 같은데 이렇게 급하게 먹으면 배탈이 나. 천천히 먹어. 그렇게 해도 되니까.”

아이들은 조그만 머리를 끄덕이고 린린의 말대로 했다.

벽예월은 그 모습을 보면서 울컥해졌다.

위험한 별을 품고 태어난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태어난 운명을 바꾸고 삶을 새롭게 개척해 나갔다.

천기는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이들은 너무 강해서 운명조차도 이들을 묶어둘 수 없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천문관이 되지 않아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며 벽예월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린린과 함께 아이들에게 음식을 먹였다.

린린은 아진이 모든 아이를 다 고칠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그러다 무리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린린은 많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열심히 치료하는 아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진의 곁에 얼핏 보면 아이들의 머리통과 달라 보이지 않는 동그란 것이 보였다.

‘흑주?’

흑주가 거기에서 뭘 하는 건가 하면서 급히 다가간 린린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죽어 가는 이들에게 진기를 빨아들이며 그 진기를 모아 두었던 흑주가 아진의 곁에서 진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저 흑주가 아진의 몸에 닿은 채 허공에 떠 있다고만 생각했을 테지만 린린에게는 진기의 흐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

아진은 흑주의 도움 때문인지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이 아이들을 계속 치료해 나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아이들은 세 명이었고 아진은 그들을 보면서 웃었다.

“오래 기다렸다. 너희도 고칠 수 있을 것 같아. 얼마나 긴장했을지 알겠다. 정말 대견해. 나라면 너희처럼 이렇게 의연하게 참지 못했을 것 같아.”

아진의 말에 맨 앞에 있던 아이가 눈물을 툭 흘리고 그것을 닦았다.

“자. 시작해 보자.”

아진이 아이의 얼굴에 손을 댔고 아이는 눈을 감았다.

린린은 북받치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산본의가 사람들은 미련했다.

다 미련했다.

그곳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그것을 한두 번 깨달은 게 아니었다.

아버지야말로 그 최고봉에 서 있는 사람 같았지만 가만 보면 어머니도 만만치 않았고 두 오라버니도 틈틈이 정상을 노렸다.

그냥 자기들의 이익만 위해서 살려고 했으면 지금쯤 고루거각이 수십 채는 있는 커다란 장원에서 백 명이 넘는 고용인들을 두고 떵떵거리며 비단옷을 입고 살았을 텐데.

그러나 린린조차도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루어낸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도 알았다.

그래서 이 사람은 지금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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