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120화
“오라버니라면 어떨 것 같아?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천마다.’ 그러면?”
“응. 별 미친놈 다 봤다고 생각하겠지. 게다가 지금 네 실력은 네가 천마였을 때보다 훨씬 약하잖아. 맞지?”
린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던 것이다.
“일단 네가 할 수 있었던 무공은 다 할 수 있게 된 다음에 그걸 가지고 증명하는 게 어떻겠어?”
“정말 그 방법밖에는 없는 건가?”
“내 생각에는 그럴 것 같은데.”
린린이 한숨을 푸욱 쉬었다.
“그걸 어떻게 다시 하지? 오라버니는 다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어?”
“응.”
나오는 대로 말을 한 것은 아니었고 아진에게는 그게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린린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진짜 뼈를 깎는 고통이었는데.”
아진은 그런 린린을 격려해 주었다.
“그래도 솔직히 말해서 전보다는 나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거잖아. 공력도 가지고 있고 초식에 대해서도 다 이해하고 있고. 뒤에서 광풍을 맞으면서 가는 거랑 마찬가지잖아. 안 그래?”
그때는 린린도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도와줄 거지. 오라버니?”
“당연하지. 언제는 안 그랬냐? 우리 만두. 잘할 수 있을 거니까 힘내.”
끄덕거리며 가만히 힘을 내 보는 린린이었다.
* * *
린린은 황궁에 같이 들어가지 못했다.
아진의 고집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자기도 같이 갈 거라고 우기던 린린은 황상의 눈에 들고 싶은 거냐는 아진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대단한 린린이라고 해도 황상의 눈에 들어 버리면 그때부터는 골치 아파질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참. 역용술은 할 줄 몰라? 어려운 것도 아닌 것 같던데. 기다리면서 역용술이나 익혀놔. 어쩌다가 마주칠 때가 생길 수도 있잖아.”
“그건 지금도 할 수 있어.”
그러면서 린린은 아진의 앞에서 갖가지 모습으로 얼굴을 변형했는데 아진은 신기해하면서 린린이 바꾼 여러 얼굴 중 한 가지를 지정해 주었다.
“이거 좋다. 파도에 깎인 돌멩이 같아.”
아진은 린린에게 열심히 연습하고 나중에 자기에게도 알려달라고 말을 해 두고는 혼자서 황궁으로 들어갔다.
그는 황궁으로 들어가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황제가 그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조금 미안한 마음마저 들기도 했다.
여러 사람의 안내를 받아 마침내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을 때 아진은 용상에 앉은 황제를 보았다.
황제의 얼굴에서는 감정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짐짓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는데 아진은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기가 얼굴을 구기면 상대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황제의 오해였다.
현대 세계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아진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다만. 그래. 무슨 얘기부터 하고 싶으냐.”
“우선은. 천문관을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듣고 싶습니다. 폐하.”
“그건 네 얘기를 먼저 들어 봐야 할 것 같구나.”
“저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폐하. 제가 잘하는 것 중 하나가 비를 내리는 일이라고 해서 제가 천문관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는 거군.”
광오한 말이었지만 황제는 그렇게 말하는 아진이 싫지 않았다.
비록 그의 곁에 서 있던 태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면서 저런 놈은 당장 목을 쳐 버려야 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어도 황제는 오히려 그 상황이 재미있었다.
그러면 왜 성주에게 그렇게 말했느냐고 따질 수도 있었겠지만 황제는 그런 말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짐도 그 문제로 오래 생각을 해 보았다. 네 말대로 너는 다재다능하고 그중 한 가지를 가지고 한 자리에 묶어 두는 것도 아깝지. 그래. 네가 말을 시작했으니 끝도 내 보도록 해라. 어떤 자리를 내어 주면 짐을 위해서 네 힘을 다해 충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럴 생각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기에 아진은 잠시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이런 말이 황제에게 통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미친 척하고 한 번 질러보기로 했다.
“폐하께서 그동안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을 사람이 되도록 해 주시는 것은 어떠시겠는지요.”
왠지 아진이 그 말을 했을 때부터 그곳에 함께 있던 태감은 물론이고 몸을 숨기고 있는 밀영들조차 머리카락이 쭈뼛 솟는 기분을 느꼈다.
저자의 입에서 또 무슨 어처구니없는 말이 나오려는 건가 하는 생각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황제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래. 일단 말이나 들어 보자.”
“폐하의 말벗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급봉은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관직도 내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
황제는 표정 없는 얼굴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것으로 자기가 뭘 얻을 수 있다는 건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태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황제의 앞에서 머리를 찧으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 이 자를 엄벌하시옵소서. 이렇게 광오한 자를 그냥 두셔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나 황제는 손짓으로 태감을 치워 버리게 했다.
“나쁜 제안은 아니다. 나는 이런 자를 본 적이 없고 서도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기대된다. 서도진은 내가 알지 못하는 바깥세상의 일들을 많이 알고 있고 짐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진은 의외로 황제에게 순진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다.
“그러면 그것은 언제부터 할 생각이냐. 짐의 말벗이 되어 주겠다는 것 말이다.”
“지금부터도 상관없습니다. 폐하.”
그거야말로 중요했다.
지금부터 아진은 황제에게 많은 것을 부탁해야 할 처지였던 것이다.
“그렇군. 그러면 자리를 옮기도록 하자. 그런 자세로 말을 하는 것은 너에게도 불편할 것 같으니 말이다.”
황제는 아진에게 선처를 베풀었고 주위의 모든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조석으로 마음이 바뀌고 작은 실수에도 잔인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황제가 벌을 내려도 시원치 않을 아진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아진에게 질문을 해 왔고 아진은 그동안 지내 왔던 이야기를 간략히 해 주며 사도련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나갔다.
황제는 그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이냐.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사도련에서 그런 일을 벌인 것을 그동안 정파에서는 알지 못했던 모양이구나. 그 일로 정파가 오랫동안 골머리를 앓아온 것으로 아는데 그 배후에 사도련주가 있었다는 것이구나.”
“그렇습니다. 폐하.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한동안 그 일은 미궁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네가 큰일을 한 것이구나.”
황제가 말했지만 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알아낸 것이 성주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황제는 재미있다는 듯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있었으면 짐은 그것을 너의 공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상을 내렸을 것인데 왜 굳이 그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냐. 이야기를 들어 보니 성주가 처음부터 너에게 협조적으로 군 것도 아니고 네가 천문관이라는 말을 듣고서 어쩔 수 없이 움직인 것 같은데 말이다.”
“저는 이미 폐하를 뵈었고 폐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제 재능을 폐하께 전부 보여 드리고 감동을 드릴 수 있습니다만 성주는 그러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황제가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와 가까운 사람들은 아진이라 부른다지. 나도 아진이라 부르겠다.”
“그러시지요. 폐하.”
“너를 아진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자랑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을 것 같구나. 어렸을 때부터 봐 왔을 테니.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는 일이 많았을 것 같다. 뭘 먹고 이렇게 재미있게 자랐을꼬.”
살아온 시간을 전부 다 합치면 자기도 황제에게 그런 말을 들을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황제의 기분이 좋은 게 좋은 거라서 아진도 웃어 보였다.
“그래. 그 이야기를 더 해 보아라. 그런데 성주에게 천문관이라고 말했다니. 그 말을 짐의 앞에서 순순히 하는 저의도 궁금하기는 하구나. 너는 천문관이 아닌데 천문관이라고 사칭했다고 짐 앞에서 자백을 하는 것이 아니냐.”
“예. 폐하. 그렇습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저는 제가 폐하께 총애를 받는 신하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제가 폐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걸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폐하를 뵈면 그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황제는 폭소를 터뜨렸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굴더니 그런 사리사욕을 보이다니. 이것도 의외의 모습이라 재미있구나. 그래. 무엇이면 좋겠느냐. 아진아.”
“제가 폐하께서 신임하시는 신하라는 것을 증명하는 패라면 어떻겠는지요. 돈이 필요할 때 전장에 가져가면 원하는 만큼 돈도 받을 수 있으면 좋겠고 각 지역에 있는 위소에 가면 제가 원하는 만큼 금의위 위사들을 쓸 수 있었으면 합니다.”
먹고 싶은 것 있으면 골라 보라는 정도의 어감으로 말을 했던 황제는 점점 일이 커지는 것을 보며 눈이 커졌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해 보라는 말을 지금껏 아진에게만 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온 사람은 결단코 처음이었다.
대개는 그런 말을 해 준 것만으로도 감읍하다는 식으로 고맙다는 말을 길게 했고 그 후에도 몇 번을 사양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아주 소소한 것을 말할 뿐이었다.
그러면 그때 가서 황제가 미리 생각하고 있던 것을 선물이나 상으로 내렸고 그 정도만 해도 모두 놀라면서 크게 기뻐했는데 이놈은…….
황제는 잠시 더 듣고 있으려고 했지만 그러다가는 황실 기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황급히 아진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만하거라. 이놈.”
“아…….”
아진은 자신의 말이 너무 느린 것을 속으로 한탄하고 있었다.
아직 요구할 게 더 남아 있었는데.
중원의 무공비급이 황궁 비고에 숨겨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거기에도 한 번 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섭섭한 표정은 무엇이냐.”
“아직 말씀드릴 게 조금 더 남았습니다.”
“됐다.”
황제는 일단 아진의 말을 막았다.
그런 것을 보니 자기가 말을 한 것은 들어줄 생각이 있는 것 같아서 아진은 기대가 됐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한 달에 사용할 수 있는 돈은 은자 쉰 냥이다.”
“……예?”
무슨 황제가 이렇게 알뜰하다는 건가 해서 아진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용할 수 있는 금의위사는 그 수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 그런데 네가 위소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위소에 있는 금의위사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면 관군을…….”
“그건 안 된다. 태감만 해도 내가 너에게 너무 큰 권한을 부여한다고 생각하며 도끼 눈을 뜨지 않더냐.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밀영들도 아마 같은 생각일 것이다. 밀영들이야 나에게 해를 끼치거나 반기를 들지는 않겠지만 태감들은 다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황제에게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는 거구나 하면서 아진은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