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161화
황궁 내에는 비록 황제와 선이남 둘 뿐인 세력이었지만 황제에게는 그 어디보다 애정이 가는 세력이었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세워둔 밀영보다도 선이남과 아진에게 더 믿음이 간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황제는 전보다 과묵해졌고 동창과 금의위, 구문제독부 할 것 없이 그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황제의 마음에 뭔가 변화가 생긴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어서 각 조직의 수장들은 머릿속이 비상하게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산본의가에는 황제의 특별한 선물이 비밀리에 전해졌다.
고급스러운 목각으로 된 침통 안에 황금 침이 종류별로 들어 있었는데 표면적으로는 선이남이 보낸 선물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산본의가의 수뇌부들은 그것이 황제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북궁세가를 무너뜨리기까지는 황제가 산본의가와 거리를 두는 것처럼 하려고 있어서 그 사실을 숨겼다.
그래도 처음부터 산본의가를 지켜 왔던 하명준이나 허우천은 그것을 받고 한참을 울었다.
도종과 북리소은도 감격을 감추지 못했고 아진도 신기해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신기하잖아요? 어느 날 천문관이 하늘의 별을 보지 않았으면 황제 폐하와 이렇게 연결이 될 일은 없었을 텐데요. 산본의가에서 황의가 나올 일도 없었을 거고요. 그때 천문관이 하늘을 봐서 오늘 이런 일이 생긴 거고요. 그날 하늘에 떴던 별은 본가를 위해서 일한 거였던가 봐요.”
아진의 말에 사람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그 일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아진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 * *
북리소은을 꼭 닮은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사랑스러웠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떠나지 못했다.
“우르르 까꿍! 우르르 까꿍! 아이구. 큰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쪄요?”
아이의 앞에서 그러고 있는 게 북리의천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차마 못 볼 꼴을 봤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독고소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단 시선이 아이에게 닿기만 하면 그들도 북리의천과 다른바 없는 모습을 하며 어린애같이 굴었다.
“그래쪄? 할머니가 최고야? 그렇지? 아이구. 우리 랑랑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오묘한 말들이 독고소영의 입에서 연이어 터져 나왔다.
잊었을까 해서 말하자면 그녀의 별호는 빙!소!검후였다.
중대한 회의를 위해 모였건만 우리 랑랑이는 뭐 하고 있을까 하는 말이 북리의천의 입에서 나오더니 랑랑이를 보면서 회의를 해도 되지 않겠냐고 서종욱이 이어받았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도 컸지만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진은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일단 그 두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원으로 향했고 북리소은은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이 그들을 맞아들였다.
아기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붓기가 다 빠지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북리소은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아기를 보느라고 회의가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그러나 회의 같은 건 어떻게 되건 사실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것에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건 나중에 형님이랑 아진이가 결정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저희가 하던 걸 열심히 하겠습니다.”
서종욱이 그렇게 말하자 모두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리 아진이도 빨리 아이를 낳아야 할 텐데. 아진아. 언제까지 이런 소리만 할 게 아니다. 이번에는 참한 소저를 한 번 알아보자. 너와 네 형님이 두 살 밖에 차이가 안 나지 않으냐. 그러면 너도 이제 슬슬 혼인할 때가 되었다.”
조카를 본 건 좋은데 조카에 너무 만족한 사람들이 아진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리곤 했다.
“사도련주가 잡히면 그때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승님.”
아진은 그때마다 그 이유를 대며 간신히 간신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놈의 사도련주. 잡히기만 하면 당장 다리 몽둥이를 잡아 부러뜨려버리는 건데!”
사도련주에 대한 증오는 다른 어느 때보다 더 커져만 갔다.
향화문에서 물샐 틈 없이 곳곳을 수색하는데도 사도련주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 흔적도 찾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다 보니 련주가 어딘가에서 죽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실정이었다.
사도련주라는 막강한 주적(主敵)의 존재 때문에 정의맹과 무림맹은 힘을 소진하지 않고 공통의 목적 아래 소극적으로나마 협력을 해 오고 있었고 사도련주가 나타날 때를 대비해 각 무가와 문파가 힘을 기르는 것에 합의를 이루었다.
무림맹은 시간이 흐르면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무림맹을 구성하던 굵직굵직한 무가와 문파들이 정의맹으로 나간 후 필연적으로 닥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무림맹에서는 부족해진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돈을 내게 했고 과중해진 부담을 떠안고 싶어 하는 곳은 없었다.
어쩌다 보니 무림맹에 남은 곳들은 전부 살림살이가 힘들어졌고 정의맹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자발적으로 정의맹에 상납을 하는 상단이나 표국이 많아져 정의맹에 속한 곳들은 따로 돈을 부담하지 않고 오히려 정의맹에 들어오는 돈과 영약 같은 것을 나눠 갖기도 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무림맹을 탈퇴해 정의맹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곳도 점점 늘어났다.
“그러고 보니 제선문에서 산본의가 출신 의원들이 의방을 연 곳 바로 옆에 무료 의방을 낸다는 말이 계속 들려오던데 그러면 타격이 크지 않은가. 아우.”
북리의천이 말하자 서종욱도 고개를 끄덕였다.
“본가에서도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선은 본가의 의원들에게 그 시간 동안 학문에 힘쓰라고 말을 해 두었습니다. 다행히 본가에서 제자들을 돌볼 여력이 있어서요. 제선문에서도 한없이 그렇게 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환자들을 생각하자면 나쁜 것만도 아니고요. 만약 본가에서 제자들을 부양할 여력이 안 되었다면 피를 토할 정도로 마음이 아팠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군. 제선문이 되지도 않을 싸움을 건 거군.”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몰려드는 환자 때문에 하지 못하는 때도 많지요. 그걸 생각하면 제자들에게도 이 시간이 꼭 무의미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 망해 가던 제선문이 그런 일을 할 힘은 없을 테고. 그 뒤에도 북궁세가가 있겠지.”
북리의천은 그 말을 하고 뜨끔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그 자리에 제선문주는 없었지만 북리의천은 앞으로 그 말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선문주는 어떤가, 아우?”
“과거에는 좋은 인연이 아니었지만 의술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감탄하게 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정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문주님이 산본의가에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요. 제가 알지 못하던 치료법을 문주님이 알고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아끼지도 않고 가르쳐 주더군요. 문주님이 알아낸 비율로 약초를 배합해 약을 만들어서 사람을 살리기도 했고요.”
서종욱은 원래도 다른 사람에 대한 칭찬에 인색한 편이 아니었지만 제선문주에 대해서만큼은 할 말이 끊기지 않고 나왔다.
“참 희한한 운명이지. 자네와 제선문주가 이렇게 될 걸 누가 알았겠나. 그렇지만 진짜 운이 좋은 건 제선문주겠지. 랑랑이가 생각해도 큰할아버지 말이 맞아요? 아이구. 그래쪄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랑랑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 * *
앞으로 벌고 뒤로 밑진다.
지금의 하월이 딱 그 꼴이었다.
처음에는 표국을 등 처먹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일이 몇 번 반복이 되고 소문이 나자 이제 표국마다 표행비가 과도하게 높은 표물은 아예 받지 않았다.
표물의 값이 원래의 가격보다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되면 표행을 의뢰한 사람을 관에 고발하는 일도 생겨났다.
그와 관련돼서 막대한 위약금을 물고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는 표국들이 연달아 생겨나자 이제는 표국의 적이 산적이나 도적들이 아니라 표물을 맡기는 자들이 되는 형국이었다.
‘제선문에도 계속 돈이 들어가는데 돈은 전처럼 벌리지 않고…….’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황제의 탄신연이 다가오고 있는데 황제의 요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500명을 더 초대하려고 하니 준비하는 답례품의 수량을 더 늘리라고 했는데 말을 하는 분위기로 보면 꼭 돈을 주고 시키는 것 같았다.
처음에 답례품 하나하나를 그렇게 비싼 것으로 준비하지 않았다면 500명분을 더 준비하는 것이 크게 부담되지는 않았을 텐데 답례품 하나가 황금 반 관치였다.
기왕 하는 것.
황제를 놀라게 하자고 생각하며 시작한 일이 이렇게 발목을 잡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도 그 정도로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가주와 북궁천영이 자꾸 단가를 줄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반감이 생겨 일부러 더 값을 높였다.
‘어차피 전부 다 돌아오게 돼 있다. 폐하께서 모른 체하지는 않으실 거야.’
하월은 그렇게 마음을 먹고 답례품을 더욱 성심성의껏 준비했다.
가주와 북궁천영은 종종 모여 하월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황상께서 하월을 신임하시는 게 맞는 것 같으냐.”
“그것은 확실히 그런 듯합니다. 하월을 자주 부르시고 하월이 곁에 있는 동안 용안이 밝으시다 합니다.”
“그 아이가 번 것이고 우리에게 손을 내민 것은 아니니 하월이 원하는 대로 당분간은 두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기는 하다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도 우선은 그러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와서 손을 떼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하월이 그 일을 맡기로 예부시랑과도 얘기가 다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손을 뗀다고 하면 이제 와 예부에서 준비하기도 벅찹니다.”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500명이나 더 초대하신다고 하니…… 3,000명을 초대한 것도 그간 전례가 없던 일이 아니었느냐.”
“대체 누구의 씨인지. 그렇게 손이 큰 놈은 처음입니다. 그래도 이 일을 제대로 끝내 놓기만 한다면 황상 폐하의 마음은 확실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들인 공이 헛되지 않겠지요. 아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번 돈으로 하는 것이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일이 아닌지요.”
가주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체 누구의 씨인지.
이럴 줄 알았으면 양자로 들일 때 출신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는 건데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가주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 * *
아진이 황제의 침전에 나타나자 책을 보고 있던 황제가 혼자서 고개를 저었다.
-상당히 기분이 나쁘구나. 아진아.
그가 전음으로 말을 걸어와서 아진도 기막을 두를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폐하?
-내가 후궁들과 밤을 보내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느냐. 내가 여기에 있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알고 여기로 온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여기에 안 계시면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아진이 웃으며 대꾸했다.
-황제의 침전에 무인이 나타나는데도 아무도 모르다니.
-크게 걱정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폐하. 저나 되니 이러는 것입니다. 무공을 익혔다고 다 이렇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알고 있다. 내 궁에는 복잡한 진이 설치되어 있다. 진을 만드는 데만 백 년이 걸린 아주 복잡하고 위험한 진이라고 했다.
-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황제는 묻는 것도 지쳤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