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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72화 (172/470)

제172화

172화

“저도 이제 내공이 많아요. 스승님.”

“그래. 그건 알고 있다.”

아진이 다시 소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소청의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힘이 들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어 주는 거라는 것을 알고 소청은 몸을 비비 꼬았다.

“스승님. 스승님이 더 내공을 아끼셔야 하니까 이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가만히 있거라. 다 네 덕 보려고 이러는 거다.”

아진의 말에 소청이 웃었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아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앉았다.

“이렇게 안 하셔도 도와드릴 거예요. 저는 스승님을 대신해서 죽어도 전혀 억울하지 않은 걸요. 그렇게 죽을 수 있으면 가장 의미 있게 사는 게 될 것 같아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너는 훨씬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아이이다. 그렇게 살아야 하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소청은 또래의 아이들처럼 많이 웃지도 않았다.

사도련의 산하에 있던 사파에 납치되었던 아이들도 지금은 산본의가가 있는 마을에서 연일 햇살을 뿌리는 것처럼 환하게 웃는데 소청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구결을 외우고 초식을 이해하고 무리(武理)를 생각하느라고 늘 집중한 모습이고 기쁜 일이 있어도 어린애답게 크게 웃는 법도 거의 없었다.

“소청아.”

“네. 스승님.”

소청이 눈을 빛내며 아진을 바라보았다.

“스승님은 말이다.”

아진은 잠시 소청을 바라보다 말했다.

“스승님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무시당한 적이 있었어. 그러다가 나중에는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고 부러워하는 사람이 됐지만.”

소청의 눈이 동그래졌다.

소청에게는 자기가 다른 세계에서 헌터였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에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소청이 알기로 아진은 산본의가의 공자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행복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아아 하고 작게 탄성을 냈다.

“제선문이 산본의가를 괴롭혔을 때 말씀이시군요?”

“응? 어…….”

아진은 뭐라고 말을 하는 게 나을까 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스승님. 그때도 스승님 주위에는 스승님을 걱정해 주고 아껴 주시는 분들이 계셨잖아요. 그러니까 그때도 너무 상처를 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아진은 소청이 오해를 하고 자기를 위로하려 하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소청이 정말 자기를 걱정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 상처는…… 응. 알았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기다리고 기다리니까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지난날을 전부 다 보상받게 되더라는 거야. 그러니까 소청이도 그랬으면 좋겠다.”

소청은 아진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은 그냥 웃어 버렸다.

자기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건지 말을 할 수 없다 보니 점점 오해만 더 쌓여가는 것 같았던 것이다.

“스승님은 소청이가 밝게 많이 웃으면 좋겠다. 스승님은 소청이가 정말 좋거든.”

“네. 스승님. 그런데 많이 웃지는 않아도 저는 정말 행복해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생각을 해요. 저는 정말 운이 좋다고요.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고 놀라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래?”

“네. 스승님이 저를 발견하신 것도 그렇지만 스승님이 저와 어머니를 도와주기로 하신 걸 생각하면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그런가 보다 했겠지만 스승님은 그런 걸 싫어하시는 편이잖아요.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다고 도와주시지도 않고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시고요.”

“어…….”

소청이 앞에서 내가 그렇게 군 적이 있었던가 하고 조용히 생각하며 아진은 다시 소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스승님. 오래오래 사세요. 이 제자가 스승님을 꼭 행복하시게 해 드릴게요.”

“그래. 소청이 너를 닮은 아이도 보여 주고. 그러면 스승님은 정말 좋을 것 같다.”

“저보다 스승님이 먼저 그러셔야죠. 아 참. 정의맹에 있을 때 스승님에 대해서 물어 보는 소저들이 엄청 많았어요. 스승님이 어떤 분이시냐고요. 그런데 다 좋은 사람은 아니라서 제가 조금 가려내고 있어요.”

아진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누구를 가려냈지? 어떤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들었어?”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고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예뻐도 스승님에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런 사람이 많아?”

“네. 많은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세상에 그러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예요. 그렇죠?”

소청이도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해서 아진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지어졌다.

“그런데 왜 스승님에게 아무도 말을 걸러 오지 않지?”

“어…… 제가 다 안 좋게 말했거든요.”

“전부 다 마음에 안 들었어?”

“네.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제가 좋게 말씀드릴게요.”

아진은 결국 폭소를 터뜨렸다.

“너 이 녀석. 도대체 이 스승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한 것이냐.”

“그렇게 나쁜 말은 안 했어요. 스승님. 정말이에요.”

정말이라고 할수록 더욱 의심이 가서 아진이 소청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고 소청이 까르르 웃어댔다.

“자기 생각밖에 못 하고 의와 협을 생각하는 걸 본 적이 없고 약한 사람을 봐도 도와주지도 않고 불의를 봐도 꾹 참는다고밖에 안 했어요.”

“이 녀석이?”

아진이 소청의 조그만 어깨에 팔을 둘렀다.

팔을 걸칠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몸이었다.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다시 깨닫고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소청이 아진을 올려다보고 웃었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정말 소청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의와 협.

정파의 무림인들이 추구한다는 그것은 아진에게 상관이 없었다.

아진은 그저 소청이 계속 이렇게 웃을 수 있기를 바랐다.

소청의 눈에 눈물이 맺히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그런 모습으로 지켜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은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아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소청은 사도련주가 움직이기 시작한 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먼저 일어섰다.

“가자. 소청아.”

“네. 스승님.”

두 사람이 동시에 바닥을 박찼고 신형이 허공을 날아갔다.

* * *

북리의천은 독고소영을 자주 보았다.

후기지수들에게 지도 대련을 해 준다고 그녀가 조금 무리를 했던 게 떠올라서였다.

“소영.”

그러나 독고소영은 북리의천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진과 소청이 하던 행동이 이곳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하면 안 된다. 소영.”

“걱정하지 마.”

독고소영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확실히 경공을 하면서 대화까지 할 정도로 내공이 넘쳐나지는 않았다.

지금부터는 내공을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기도 진작 심법을 바꿀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전투를 하는 동안에도 축기를 할 수 있는 심법이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린린은 사람들의 속도를 맞추는 것이 조금씩 초조해져서 북리의천에게만 말을 하고 먼저 아진을 쫓아갔다.

북리의천도 린린이 그렇게 해 주는 것이 한결 마음이 놓였다.

독고소영만 아니었다면 그라도 먼저 갔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던 차에 린린이 먼저 가 준다면 마음을 놓을 수 있어서였다.

린린이 쫓아가는 동안 아진은 얼마쯤 가다가 련주 일행이 다시 멈춘 것을 알아차렸다.

“성으로 가는 모양이다.”

“성요?”

“응. 방향이 그렇구나. 이대로 쭉 가면 제서성이 나온다. 그렇군. 관군에게 복수를 하려는 모양이야. 더 이상은 숨지 않겠다고 선전포고라도 하려는 셈인가 봐.”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제서는 성을 지키는 사람의 수만 해도 많을 텐데요?”

“어림잡아 삼천 명 남짓이다. 왜 하필 제서를 노린 건지 모르겠구나. 자신 있어서 그런 걸까? 제서도 자기들을 막을 수 없다는 걸 보여 주려고? 한 번의 승리로 보여 주는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아진의 생각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 * *

“약쑥을 좀 더 가져와야 하네. 비룡채는 아직인가?”

“예. 가주님. 좀 전에도 가 봤는데 텅 비어 있었습니다. 아직 산에서 내려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있어야 할 텐데. 철이 지나서 구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지금까지 오지 않는 걸 보면 그런 이유가 클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사람들은 손을 가만두지 않았다.

손을 분주히 움직이면서 가주는 약초의 배합을 시작했다.

극도로 긴장되는 정교한 작업이었지만 거침이 없었다.

허우천이 계속해서 그를 돕고 있었다.

가주가 따로 말을 할 필요도 없이 가주의 생각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에게 필요한 약초들을 주었다.

가끔 가주가 거기에서 양을 덜어내거나 조금 더 달라고 하는 때가 있기는 했지만 허우천만한 보조는 없었다.

“문주님은 어쩌고 계시는가.”

“풀무 앞에서 나흘째 떠나지 않고 계십니다.”

“도종에게 자주 살펴보라고 말은 했겠지?”

“예. 그분은 항상 그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약을 만들 때는 당신 목숨은 도외시해 버리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는군. 그런데 그 마음이 약효에 반영되는 건 아닐까?”

“예?”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쓰러지시지 않도록 옆에서 잘 지켜봐야 하네. 괜찮으신지 묻는 건 이미 늦어. 문주님은 당신이 하려는 일을 마칠 때까지는 절대 힘들다고 하실 분이 아니야.”

“예. 도종이도 그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묻지도 않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요. 도종이도 같이 힘이 들 겁니다.”

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본의가는 일주일 넘게 환자를 받지 않고 있었다.

위급한 환자들이 찾아오는 일이 있었지만 그들은 미령 옆에 있는 마을에 난 임시 진료소에 가서 진료를 보고 더 치료를 받아야 하면 다른 곳으로 가도록 안내되었다.

산본의가가 그렇게 오랫동안 진료를 쉰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걱정이 대단했지만 산본의가에서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의가의 넓은 의방 침상에는 사도 방파에 납치됐다가 아진과 함께 마을에 온 아이들이 누워 있었다.

아이들의 변화된 체질을 통해서 아진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먼저 말을 한 사람은 제선문주였다.

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이들을 입양한 사람이 아이들이 몇 가지 약에 이상 반응을 보인다고 말하면서부터였다.

-가주님. 이번에 지어주신 약을 먹고 저희 원중이가 구토를 일으켰지 뭡니까? 약을 전부 쏟아 냈어요. 나올 것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구토하고도 계속 배를 끌어안고 헛구역질까지 하는데 너무 안쓰럽지 뭡니까.

가주는 그 말을 듣고 원중이를 보러 갔다.

직접 환자를 찾아가는 일은 드물었지만 집이 먼 것도 아니고 상태가 걱정돼서 가 보았던 것이다.

아이는 얼굴에 핏기가 없었지만 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지나가는 감기 같은 거여서 따로 손을 쓰지 않아도 낫기는 나을 거였는데 옆에서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게 안타까워서 원중의 아버지가 약을 타러 왔고 가주는 감기 환자에게 처방하는 일반적인 약을 처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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