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173화
아이는 약을 다 토하고 나서인지 기운이 없는 모습이기는 했지만 다른 이상이 보이지는 않았다.
가끔 그런 일이 있기도 하기에 가주는 돌아왔고 일단 그 일을 기록해 두기는 했다.
나중에 그 아이에게 약을 쓸 때 기억해 두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다 다른 아이에게 약을 썼다가 같은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이 한 번 더 반복됐다.
하루에 수백 명의 사람에게 처방하고도 부작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던 평범하기 그지없는 약초인데 왜 그 아이들에게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제선문주에게 그 방법을 알아봐 달라고 했을 때 문주는 당장 그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약재 중 어떤 것이 문제를 일으킨 건지 알아보기 위해서 각각의 약초를 종류별로 나눠서 미량을 먹여보고 아이들의 몸이 몇 가지 약초에 거부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아냈다.
가주가 먼저 아이들에게 그 일에 대해 설명하자 아이들은 드디어 자기들이 도움이 될 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하며 기꺼이 그 일에 동참했다.
제선문주는 충독의 알에 장기를 먹혔던 아이들을 전부 불러들이고 그 아이들 모두에게 자기가 발견한 약초를 미량씩 먹여 보았다.
반응은 모두에게 똑같이 나왔다.
그냥 맹물이 나올 때까지 전부 다 토해냈던 것이다.
혹시 그게 충독의 알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제선문주는 자기를 도울 사람을 달라고 가주에게 부탁했다.
가주 역시 자기들이 아진을 도울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우선적으로 인력을 그쪽으로 배치했다.
그때부터 아이들의 체질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시작됐고 아이들의 몸이 공통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는 재료를 찾아냈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이들을 대할 때 주의하도록 하게. 납치됐던 곳에서의 일은 웬만하면 언급하지 말고. 괜한 기억을 떠오르게 해서 괴롭게 할 것 있나.”
제선문주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면 그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알 수 없었다.
직접 제선문의 살수를 키워낸 데다 북리세가를 지워 버리려 했던 사람이었는데 어느덧 산본의가에서 사도련주에 대항할 방법을 찾으면서 아이들까지 걱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의 인생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듯했다.
“충독의 알을 강제로 이식받고 알을 깨고 나온 벌레에게 장기를 먹혔던 아이들의 몸이 이 약초들에 이렇게까지 극렬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그 벌레들과 약초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네. 우리가 방법을 찾는다면 서 공자가 좀 더 편하게 싸움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
“이미 벌레에 잠식된 사람에게 먹여서 그걸 잠잠해지게 할 수 있는 약을 만들 수 있을까요? 몸 안에 있는 벌레만 죽도록요?”
허우천이 물었을 때 제선문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될지 어쩔지는 모르네만 나는 그걸 목표로 하려고 하네. 몸 안에 있는 벌레를 죽인다는 건 서 공자 말고는 어려운 일일 것 같아. 그렇지 않은가? 자네들이라면 몸 안에 있는 벌레만 죽이려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생장기를 먹고 자란 벌레.
숙주는 살리고 그 벌레만 죽이는 방법.
그것은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는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답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수백 종의 약초가 모였고 아이들은 그것을 먹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미 사도련주에게 당한 일이 있던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실험체로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몸에 조금만 이상한 반응이 오더라도 바로 말을 해야 한다. 얘들아. 여기에서 항상 우리가 대기하면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은 언제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채로 실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설명을 들은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주의 깊게 지켜보는 동안 약초를 먹었다.
어떤 것에는 다른 이들과 별반 차이 없는 반응을 보였지만 어떤 것은 달랐다.
확연히 구분되는 것들이 추려지고 또 추려졌다.
제선문주는 점차 거기에 확신을 했고 자기가 생각한 대로 배합을 맞춰 약을 만들었다.
만약 그의 생각이 맞다면, 벌레의 숙주에게 약을 먹였을 때 효과를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살아 있는 숙주의 몸 안에서 벌레가 요동칠 때의 고통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벌레를 죽이지 않으면 숙주가 살 가능성은 없었다.
바닥에 있던 생존 가능성을 그래도 조금이라도 끌어올려 보자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고 거기에서 더 크게 다른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마침내 설탕을 졸여 만든 것 같은 환단 서른 개가 금박에 싸여 작은 목함에 들어갔다.
제선문주는 그것을 소중하게 챙긴 채 가주를 찾아갔다.
가주는 제선문주의 얼굴이 그사이에 십 년은 늙어 보인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기함했다.
가주 자신은 약을 만드는 기술에는 특별한 재능이 없어 그 일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제선문주를 보면 영약과 같은 약을 만드는 일에는 약을 만드는 사람의 여명도 어느 정도 들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가주님. 이걸 서 공자에게 전해 주었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문주님. 이제 문주님은 보신에 힘을 쓰도록 하십시오.”
“괜찮다면 저도 그곳에 가 보고 싶습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걸 추측만 해서 만들어서 거기에서 직접 보고 성분을 바꾸거나 재료를 바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만들어진 벌레는 전과 다를 수도 있는 거고 말입니다.”
가주는 제선문주가 그 몸을 해서 여정을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됐지만 제선문주의 고집은 지금까지 볼 만큼 봐 왔기에 바로 마차를 준비하도록 했다.
가는 길이 멀었지만 제선문주는 손에서 그 목함들을 내려놓지 않았다.
* * *
제서성에서는 잔치가 열렸다.
산본에 인접해 있던 의개성의 성주가 그곳으로 새로 부임해 온 것은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사람들은 새로 부임해 온 성주를 환영했다.
새 성주가 마음에 들건 안 들건 앞으로는 자기들이 그의 마음에 들도록 애를 써야만 했다.
갑자기 성주가 바뀐 것으로 인해 사도련주의 계획에는 변화가 불가피했다.
성주 아들의 정혼자에게 벌레를 집어넣어 그 여자로 하여금 내부에서부터 공격을 하게 하려고 했었는데 이미 그때는 관저를 떠났던 것이다.
취임식을 마친 의개성주는 제서성의 일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고 몇 날 며칠이나 열리는 잔치가 달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역의 유지들과 안면을 트기는 해야 했기에 반나절의 잔치를 허락한 참이었다.
잔치를 연 사람들은 비싼 술과 풍성한 산해진미를 준비했지만 상에 올라왔던 음식들은 그대로 그릇에 담겨 관군들에 의해 제서성 곳곳으로 옮겨졌다.
마을마다 잔치가 열렸고 그곳에 음식과 술이 제공되었다.
새로운 성주가 왔다는 소식은 그렇게 퍼져나갔다.
음식 대부분이 빠져나가 버리고 상은 휑해질 정도였는데 그래도 성주의 표정이 밝아 보여 사람들도 조금씩 마음을 놓았다.
“나는 깐깐한 사람이 아니오. 여러분이 나를 많이 도와줘야 합니다. 혼자서 하는 것은 어려움이 많으니 말입니다. 아니. 어렵다는 말로도 충분하지 않고 아마 불가능할 거요. 그러니 많이 도와주도록 하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덕이 높으신 성주님이 오셨으니 제서의 홍복입니다.”
자리에 있던 이들이 성주를 띄워 주며 말했다.
“앞으로 이각 안에 잔치 자리를 정리하도록 합시다. 제서에는 황상의 명이 내려와 있다고 들었소. 황상의 명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이 나는 내키지 않는구려.”
성주는 관군들에게까지 술이 내려간 것을 걱정하며 말했다.
그렇게 말을 해 버리자 오늘 하루는 작정하고 마음 편히 술을 마셔도 될 거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더 이상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새로운 성주가 어떤 사람인지 그들은 대강 답이 나온다고 여겼다.
앞으로의 생활이 참 재미없겠다는 불평도 각자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그러나 성주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 자들의 기분을 맞춰 줘서 뭘 한다는 말인가.
그는 제서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수장이었다.
수장 한 사람이 바르게 선 것으로 인해 수천수만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나는 한 시진 안에 요직에 있는 분들에게서 제서의 흑도 방파에 대해 구체적인 보고를 듣고 싶소.”
아직 안주와 술을 들고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이건 먹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성주가 노린 것도 딱 그런 거였다.
“많이들 드시오. 그래도 차린 음식이니 남기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소. 아. 남긴다고 해도 상관은 없겠소. 남겨진 음식은 잔치를 준비하느라고 애쓴 이들에게 상으로 내리면 되겠소. 그러면 시간을 조금씩 앞당기도록 합시다.”
성주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가 먼저 일어나 버렸다.
성주가 일어났는데 자기는 더 먹어야겠다며 버틸 수 있는 자들이 있을 리 없었다.
그날 처음 부임해 온 성주인데 그의 앞에서 밉보였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라면 남들이 쉽게 말하지 못할 말도 거침없이 하고 개혁도 단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가 안 좋게 꼬여 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은 굼뜨게나마 움직였다.
그런 이유로, 원래대로라면 술에 취해 비틀거렸어야 할 사람들이 맨정신으로 자리를 떠났고 연회장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성주는 대회의실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며 자기가 우선으로 봐야 할 문서들을 보고 있었다.
황상이 이곳에서 최근 급히 성장해 가고 있는 흑도 무리들을 주시하고 이곳에 자신을 보냈다는 것은 특별한 뜻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성주는 문서를 꼼꼼하게 챙겼다.
‘확실히 지금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군. 이 정도가 되면 스스로 뭘 하려고 하지 않아도 다른 흑도들이 알아서 그 밑으로 기어들어 가려고 할 거야.’
성주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들의 본거지를 먼저 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겠군. 그러기 전에 먼저 관군들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정해진 시간이 되자 대회의실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주는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사안이 중대하지 않은 것은 미루고 흑도 방파의 급속한 성장에 대한 것과 거기에 대한 대비책을 중점적으로 들었다.
“당장 토벌을 명한다면 토벌이 가능하오?”
그 말이 모욕적이라는 듯이 장수가 나섰다.
“놈들은 고작 흑도 방파 놈들입니다. 흑도 방파가 무엇입니까. 사파가 거의 괴멸되다시피 했지만 사파가 남아 있었다면 사도련 산하에 있는 사도 방파 하나가 쓸어 버려도 반나절이 되지 않아 전부 쓸어 버릴 수 있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하물며.”
“내가 이곳의 일을 그만두고 현령이 된다고 해봅시다. 모종의 이유로 그렇게 된다고 해 보시오. 그러면 나는 현령이라는 이유로 무시 받아야 하는 것이오? 나에게는 여전히 성주로서의 자질이 남아 있을 거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흑도 방파가 흑도 방파라는 이유로 전력을 낮게 평가받을 이유는 없소. 사파는 괴멸됐소. 허나 잔당은 어딘가로 흡수되었을 거요.”
“그들이 흑도 방파의 근간이 되었을 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런 가능성을 아예 닫아두지 마시오. 황상의 명이오. 명을 이행하는 그 순간까지 방심하지 말고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흘려버리지 마시오. 결코 자만하지 마시오. 알겠소?”
성주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초리는 날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