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182화
“…….”
역천마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린린을 바라보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그냥 이렇게 받아들여지고 믿어지면 안 되는 건데 역천마의는 자신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지는 것을 알았다.
그 웃음이 도무지 지워지질 않았다.
“역천마의. 이거 지금 좀 심각한 상황이야. 흑주가 요즘 좀 예민하거든. 상처를 받는 일이 있어서 감정 변화가 좀 커. 진기를 흡수하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까칠할 거야.”
“뒤져야 하는 놈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면 되는 거죠?”
“그래. 역천마의한테는 적들이 바글바글하잖아.”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흑주라고 했니? 너 정말 잘 찾아왔다. 내가 너. 배 터지게 해 줄게.”
역천마의가 말하자 흑주가 신이 나서 역천마의의 옆에 딱 붙었다.
“정말 교주님이세요? 아니지. 물을 것도 없지. 교주님이 아니면 누가 이러겠어요?”
“초씨세가야? 우리 어디로 가?”
“초씨세가죠. 제1 마후 죽인 게 천마라는 걸 뻔히 알면서 천마는 무서워서 못 건드리겠으니까 저를 잡아다가 석 달 동안 계속 고신을 하기도 했고요. 아…… 열 받아.”
“잘됐네. 거기면 딱 좋겠어.”
린린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아진을 바라보았다.
봤냐는 듯이.
린린이 잘 한 건 없는 것 같았지만 아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 *
초씨세가의 경내는 어두웠다.
그러나 그 내부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가주전에는 늦게까지 잠들지 못한 세가의 수뇌부가 모여 있었다.
“아가씨의 기일이 지나는 대로 역천마의를 마후로 맞아들이시겠다 합니다.”
교주전에서 교주가 역천마의에게 했던 말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나왔다.
“기어이 그리하신다는 것인가.”
“그분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알고 있다. 하지만 역천마의라면 다르지. 그년을 잡아 오너라. 기필코 오늘을 넘기지 않고 그년을 죽일 것이다. 그년의 시신을 보아도 차마 동정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게 찢어발겨 버릴 것이다!”
가모가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치자 무인 몇 명이 포권을 취하고 사라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형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괴력에 가로막혔다.
“거봐. 내가 말했지. 오라버니? 우리 역천마의가 이런 애야. 아무 데나 대충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어도 역천마의에 대한 살해 모의 얘기가 나온다니까?”
“그래. 대단하신 분인 것 같다.”
아진은 역천마의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게 미안했지만 대답을 할 때까지는 린린이 멈추지 않을 것 같아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검을 빼 드는 것은 잊지 않았다.
“조용히 해야 하는 거지? 검강은 쓰지 말고 그냥 조용히 죽이는 게 낫나?”
“아무래도 그렇지? 당분간은 교주에게 들키지 않는 게 좋잖아. 그래야 지내는 게 편하고.”
“알았어. 네가 기막을 둘러.”
“그거 되게 귀찮은데. 그럼 오라버니가 기막 둘러.”
“네가 해.”
역천마의는 두 사람 사이에 쉴새 없이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천마가 틀림없다고 점점 확신했다.
그러면서 천마 패월악을 쥐잡듯하는 이 남자는 도대체 누구인 건지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큰 키나 잘생긴 얼굴, 대단한 내공이나 압도적인 무위.
그런 건 전부 다 소용없고 그저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천마에게 할 말을 다 하는 모습이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으익!!”
린린은 억울해하면서 기막을 둘렀다.
억울해하면서도 말을 듣다니.
패월악이 어디 그런 사람이었던가.
억울한 일이 있으면 꾹 참는 사람이었지 억울해하면서 말을 듣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이 남자는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
말하는 걸로 봐서는 오라버니라는 것 같기는 한데 친오라버니인 건가?
역천마의는 적의 소굴 한 복판에 들어와 있는 형국이면서도 도무지 다른 일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당장 역천마의를 잡아 오라며 부들부들 떨고 있던 초씨세가의 수뇌부야말로 갑작스럽게 펼쳐진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생전 그런 모욕은 당해 본 적이 없다고 느꼈다.
신교를 떠받드는 네 기둥이라 불리는 명문 마가 중 하나.
그 초씨세가는 원래 인원이 많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집안에 대대로 자식이 많지 않았다.
무가에서 혈연으로 이어진 구성원의 수가 적다는 것은 큰 약점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초씨세가가 그 오랜 신교의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사대 명문마가에서 이름이 빠진 적이 없었던 것은 초씨세가의 무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무위가 강해서였다.
모두가 일류 이상이었고 절정에 이른 자도 수두룩했다.
그것은 초씨세가가 막강한 부를 바탕으로 영약을 먹이며 세가의 무인들을 수련시킨 것이 컸는데 지금 그곳에 있는 자들의 무공만 해도 상상을 초월했다.
가주와 가모가 모두 초절정 고수였고 역천마의를 잡으러 나섰던 두 무인도 절정의 끝이었다.
이제 한 발을 내디디면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설 사람들.
“역천마의. 네가 드디어 미친 것이냐. 이 자들이 누구란 말이냐! 신교에 지금 누구를 들인 것이냐!”
가모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진이 린린을 보았다.
“저런 말 다 들어야 하는 거 아니지?”
“그럼. 그냥 죽여.”
“그래. 아아. 이럴 게 아니네. 조용히 죽일 거면.”
아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들은 아진과 린린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고 그들이 하는 말이 곧 실현될 거라는 것을 모른 채 노도와 같은 화를 참지 못하고 노호를 쏟아 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역천마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하면서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움직인 것은 봤지만 뭘 한 건지 제대로 보지는 못했는데 그때 흑주가 앞으로 내달렸다.
“……!”
역천마의는 흑주야말로 진짜 괴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뿐이지 아직 생명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다가가 진기를 빨아들여 생명을 거두어 버린 흑주는 진기를 흡수하는 동안에도 다른 생명을 탐하며 다음에는 누구를 노릴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안 한 지 오래돼서 잘 될까 했는데 잘 되네.”
아진이 말하자 역천마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 어떻게 하신 건지…….”
“아아. 본가에 내려오는 비법입니다. 요혈을 노리고 침을 날렸습니다.”
“……!”
역천마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초씨세가의 초고수들이 고작 침에 당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거니와 아무리 기습이라고 해도 그들의 몸에 가느다란 침이 날아가 꽂혔다는 것이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요?”
“강기를 씌우면 원하는 속도로 날아갑니다.”
아진은 어려울 게 없다는 듯이 말했다.
역천마의는 기함을 멈추지 못했다.
눈앞의 남자는 이 자리에서 벌어지는 살인을 남들이 모르게 하려고 침을 날려서 공격한 것일 뿐이지, 만약 마음먹기만 했다면 훨씬 더 요란하게 판을 뒤집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주가 둥둥 떠올랐을 때 역천마의는 흑주와 린린을 번갈아 보았다.
“돌아갈까, 역천마의? 아. 전각이 꼴이 그렇게 돼서 오늘은 다른 곳으로 가야 하나?”
“교주님은 어디로 가실 건데요? 교주님이 가시는 곳으로 갈 거예요.”
“그러면 우선은 신교 밖으로 가는 게 나을까?”
“저는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단리서언은 정말 강해졌거든요. 초씨세가주하고는 비교가 안 될 거예요.”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해?”
린린이 사나운 눈을 하고 물었지만 역천마의는 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교주님이 이기를 바라지만 이기지 못하실 거예요.”
“칫. 알았어. 역천마의라면 할 소리는 할 거라는 걸 잊어버렸네. 그래도 비고는 털어갈 거야.”
“들키지만 않으신다면 저도 좋아요.”
할 소리는 하는 사람이지만 린린과 뜻이 맞을 때는 꼭 해야 할 소리도 안 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역천마의에 대한 이해를 마쳤다.
“거기는 경비가 삼엄하겠지?”
아진이 묻자 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를 지키는 경비 무사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니거든.”
“그러면?”
“그냥 가서 봐.”
린린이 너무 대충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역천마의가 아진의 곁으로 와서 속삭였다.
“본교에는 각종 영약이 정말 많이 모여들어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무재가 뛰어난 사람을 골라서 영약으로 키운 사람들이고요. 내공은 모두 사갑자가 넘고 교주님과 후계자들이 익히는 무공 중 한 가지를 배우게 돼요. 그 정도로 비고의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거예요.”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린린이 자기를 그곳으로 데려가는 거라면 자기가 더 강하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열라고 명령을 내려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순전히 무위로 뚫고 들어가야 하는 거라면 단리서언도 들어가지 못할 거예요.”
역천마의는 아진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듯 말했다.
“단리서언이라는 자가 지금의 교주 맞지요?”
“네.”
“그런데 그 교주도 뚫지 못한다고요?”
“네. 네 사람이 합격진을 펼쳐서 막으면 방법이 없어요. 그리고 그들은 비고가 뚫리려고 할 경우에 자기들의 목숨을 버리면서 상대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무공을 익혔고요. 비고의 문이 억지로 열릴 것 같으면 그들은 목숨을 바쳐서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할 거예요.”
아진은 기가 막혀서 린린을 보았지만 린린은 이미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
“하……!”
따라가지 말고 그냥 혼자 당하라고 놔둘까 했지만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역천마의는 린린과 아진이 전부 비고를 향해 경공을 펼치자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결국 자신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 * *
비고를 지키던 네 명의 무사는 천마비동의 극한 수련을 3년 동안 견딘 자들이었다.
교주가 될만한 좋은 핏줄은 타고나지 못했지만 무재만큼은 누구 못지않아서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이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천마신교가 신분이나 가문을 중시하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역천마의만 해도 다른 이들의 목표물이 된 이후, 매일 수십 명의 자객에게 방문 받는 신세가 된 것처럼 다른 이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누군가의 눈 밖에 나면 죽을 때까지 자객의 침입을 받게 되는데 그때 도와주는 가문이 없으면 개인의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계를 명확히 깨달은 사람들은 지존의 그림자로 살기를 자처하고 명문마가의 밑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비고를 지키는 네 사람은 각자가 사대마가에서 추천한 이들이었다.
그들이 천마비동의 극한 수련을 견뎌낸 자들이라는 점에서 이미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오가는 사람도 없는 외딴곳에서 비고를 지키고 있으면서도 서로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기는커녕 그들은 각자가 맡은 자리를 떠나지도 않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버티고 있었다.
린린은 몸을 감추거나 네 경비 무사의 눈을 피하려는 최소한의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그 앞으로 걸어갔다.
‘으이그!’
아진은 왠지 그럴 것 같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