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205화
“형님.”
아진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선이남이라는 사실에 놀라 그에게 달려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형님?”
“왜? 뭐가 놀라운데?”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두 팔을 들어 보였다.
빠른 영전을 하고도 그동안 소식을 전하지 않더니 일단 아진이 먼저 알아보고 말을 하자 그때부터는 그도 숨기지 않았다.
“이 몸이 이제 내의원 부정이시다.”
“네에? 부정요?”
라고는 했지만 부정이 뭔지는 몰랐다.
그래도 선이남 같은 사람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을 할 정도면 엄청난 것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감격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이러고 있어. 아진아? 아아. 뭔지 알겠다. 황상께서 안 보시겠다고 한 거구나?”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산본의가에 있는 저를 부르신 분이 황상이신데요?”
“응. 그러니까. 일단 너를 여기로 부르신 후에 이제부터는 안 보시려고 한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그러자 선이남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정말 너무 무심하지 않았느냐. 황상께서 그동안 네 걱정을 얼마나 많이 하셨는데 이제야 나타난단 말이냐. 나는 사도련을 괴멸시켰다는 말을 듣고 네가 곧 올 거라고 생각했다. 황상께서도 그 말씀을 하시면서 너한테 무슨 상을 내리면 좋겠냐고 물으셨고.”
“아아…… 역시 그러셨군요.”
아진은 자기가 왜 그동안 안 왔는지 말했고 선이남은 그럴 만도 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상은 너를 정말 많이 아끼고 총애하신다. 황상께서 너를 지키려고 그동안 여러 세력과 대립을 하시고 위험도 감수를 하셨어. 특별히 그걸 네가 알아줬으면 하시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너를 생각해서 하신 일을 네가 몰라주는 것 같으면 서운하시지 않겠어?”
“그렇죠…….”
“교주는 만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더라. 그래도 황상께서는 네가 직접 부탁드린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시려고 교주를 불러서 만나시기까지 하셨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그게 사람들이 오가며 기웃거리는 경내에서 나눌 만큼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오래오래 얘기를 해 나갔다.
“교주가 끝까지 아주 광오하게 굴었던 것 같아. 황상의 말씀에 그러겠다고 하기는 했지만 확신을 하기는 어려웠던 거지. 그래서 황상께서 변방의 접경지역과 화친을 맺고 직접 병력을 이동시키시고 교주가 움직일 때를 대비하셨어.”
“……예?”
황제가 그렇게까지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아진은 이제까지 게으름을 부리고 오지 않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두 사람이 계속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태감 하나가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진을 발견하고 혀를 차며 달려왔다.
“서 공자는 어서 나를 따라오시오.”
“왜 그러십니까?”
“그냥 조용히 따라오시오!”
왜 또 화가 나서 이러는 건가 하면서 아진은 선이남에게 인사를 했고 선이남은 무슨 일인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은 채 손을 흔들었다.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가자 그가 화가 난 얼굴로 아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 이놈. 작정하고 짐을 능멸하려는 게지. 그러니 짐이 기다리라고 해도 전혀 근신하거나 반성하는 기색도 없는 것이지!”
아진은 황제가 왜 화가 난 건지 깨닫고 웃었다.
“사형을 만나 반가워서 잠시 얘기를 한다는 것이 시간이 이리 지났는지 몰랐습니다.”
황제는 아진이 괘씸해서 겁이나 좀 먹으라고 바깥에 세워둔 것인데, 이제 나가서 그를 데려오라고 태감을 보내자 그곳에 아진이 없는 것을 보고 태감이 여기저기를 찾아다녔다.
태감은 정말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결과적으로 아진이 있는 곳 빼고 전부 다 뒤지고 다녔던 듯했다.
아진도 처음에는 그냥 자기가 서 있던 곳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선이남을 발견하고 그리로 갔다가 얘기를 하면서 조금씩 걸음을 옮기는 바람에 일이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폐하. 정말 송구합니다. 그런데 사형에게 폐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런 이야기를 직접 해 주시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에게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진이 말하자 겨우 그런 거로 자기가 마음을 풀 줄 알았냐는 듯 황제가 팽 토라져 버렸고 아진은 자기가 잘못한 건 확실히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
황제도 그 시간을 계속 그렇게 낭비하기만 할 생각은 없었는지 아진을 앉혀놓고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러나 물을 것 외에 자기가 해 줄 말도 많았다.
“교주는 정말 희한한 자였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아주 불쾌하고 음습하더군.”
“마기의 특징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자는 이곳에서도 무공을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저도 그렇지 않은지요. 폐하. 이 주위에 만들어 두었다는 진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은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러면서 황제는 교주가 갑자기 코피를 흘리더니 눈과 귀에서도 피가 흘렀다고 말을 했다.
“정말인가요?”
“그러면 짐이 네놈에게 거짓말이나 하려고 불렀다는 말이냐.”
그는 확실히 아진에게 화가 다 풀리지 않은 것 같았고 그 후로도 한참을 더 퉁명스럽게 대했다.
아진은 역천마의가 했던 말 중에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그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 사도련을 괴멸하는 과정에서 역천마의의 공이 아주 컸습니다. 그런데 그 역천마의가 교주에 대해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주가 상대방의 생각을 읽는다는 거였는데 어쩌면 폐하와 함께 있는 동안에도 그랬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닌 것 같다.”
황제는 그날의 대화와 교주의 표정을 떠올리는 듯하더니 나중에는 확정적으로 말했다.
“그건 아니다. 확실히 그렇다.”
“희한하군요. 폐하께서는 내공도…… 아!”
“왜 그러느냐. 아진.”
“제가 드린 내공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 그 내공이 너무 강력해서 교주의 술법이 통하지 않은 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
황제는 정말 그런 걸까 하며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재미있기는 하겠구나.”
“폐하. 정말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 그렇게 엄청난 내공을 제가 폐하께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드렸다니. 이렇게 충성심이 깊은 신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비웃는 것조차 하지 않고 아진을 보며 말했다.
“역천마의라는 자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 보거라. 상당히 흥미롭구나.”
아진은 일부러 역천마의가 여자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동안 잠잠했던 황제의 호색한 기질이 역천마의로 인해서 다시 한번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역천마의는 여러 술법을 할 수 있고 스스로 만든 대법으로 여러 신기한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독한 약품을 많이 다루고, 실험을 하는 동안 사고도 당해서 얼굴이 끔찍합니다.”
“그럴 만도 하겠구나.”
황제는 어차피 역천마의를 남자라고 생각해서 외모가 어떤지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고 고독과 추살접에 대한 것들을 물었다.
“참. 소청이는 이제 아주 건강합니다. 폐하. 모든 게 폐하의 은혜입니다.”
황제의 궁금증을 다 해소해 준 후에 아진이 말했다.
“다행이구나. 짐은 네가 돌아간 후에 많은 생각을 했다. 네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었지. 한 사람의 주위에 인재가 많은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네 주위로 인재가 모인 게 아니라 너로 인해 그들이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더구나.”
“…….”
아진은 쑥스러워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원래 이런 사이가 아니지 않았냐는 얼굴이었다.
서로에게 타박을 주며 툭탁거리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느끼고 뿌듯해하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황제가 안 하던 소리를 하자 이상했던 것이다.
“폐하. 요즘 혹시 기력이 갑자기 쇠하였다거나…….”
“죽을 때가 된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
황제가 쏘아붙이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감히 누가 짐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짐은 정말 신기하다. 아진아. 네놈은 짐이 조금도 무섭지 않은 것이냐.”
“제가 폐하께 약속해 드리지 않았는지요. 폐하의 벗이 되어 드리겠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지. 그때는 믿지 않았는데 정말 그렇게 했구나. 너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병력을 이동시켜 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폐하. 그런 일까지 있었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저와의 약속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너를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황제가 돼서 부탁을 받았는데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얼마나 꼴이 우습겠느냐.”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되었다.”
“예?”
“되었다. 쓸데없이 솔직해지지 말아라. 짐은 네 솔직한 말을 감당할 만큼 마음이 굳세지 못하다. 또 무슨 험한 말을 하려고.”
아진은 언제 황제와의 사이가 이렇게 허물없게 된 건지 신기했다.
처음에는 기대한 것도 없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발목이나 잡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황제가 도움을 주어서 해결한 일이 제법 되었던 것이다.
다른 것도 다른 것이지만 황제가 소청을 격려하기 위해 자기가 어렸을 때 쓰던 건을 준 것은 아진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만들어 주었었다.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폐하. 좋은 부모를 갖고 좋은 스승을 갖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겠지만 주군까지 좋은 주군을 두었으니 말입니다.”
“이제 철이 드는 모양이구나.”
황제는 아진이 그러는 게 어색했는지 민망해하면서 말했다.
“그래.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이냐.”
“폐하께서 교주에게 말씀을 해 주셔서 교주가 정마대전을 쉽게 일으키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역천마의와 천마신교의 대마두들이 산본의가에 머물고 있으니 조만간 그 사실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람을 보내겠지요.”
“네 주위에는 일이 끊이질 않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 그래도 그런 일이 생길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라 영약을 구하러 다닐까 합니다. 무령독화를 구할 때 처음에 생각해 두었던 것이 따로 있었는데 이번에 거기에 가 볼까 해서요.”
“영약?”
황제의 눈이 빛났다.
그렇지 않아도 내공을 얻고 선이남과 가까이 지내면서 무공에 부쩍 관심이 커진 황제였다.
선이남에 의하면 황제는 무공서도 여전히 열심히 읽는다고 했다.
형이 책을 읽는 게 멋있어 보여서 자기도 책을 읽겠다고 책을 뒤집어서 읽는 동생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아진은 그동안 황제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 것을 떠올리며 그를 보았다.
“혹시 거기에 같이 가 보고 싶으신지요. 폐하?”
“……정말. 그래도 된다는 말이냐?”
황제는 깜짝 놀라며 눈을 빛냈다.
아진은 영약이 파처럼 난다는 섬을 떠올렸다.
육지에서 백 리 떨어진 섬에서 배도 없이 왔다는 사람이 한 말이라는 것은 잊고 있었지만 그곳에 가면 황제도 오랜만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푹 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도 다니지 않는다는 곳이랍니다. 폐하.”
“그러면 어찌 가느냐?”
“제가 경공으로 모시겠습니다.”
“정말 좋을 것 같구나.”
황제는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서둘렀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 일이 가득하였는데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좋을 것 같다.”
“또 무슨 일이 있는지요. 폐하?”
“천마신교의 교주 놈의 발목을 묶어 둔다고 황금을 이천 관이나 써서 변방과 화친을 맺었는데 그곳에서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말이다. 병력을 급히 이동시키기는 했는데 괘씸하지 않냐는 말이다.”
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라고 마냥 편하기만 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