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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23화 (223/470)

제223화

223화

“두 사람의 얼굴빛이 좋아서 다행이구나. 참. 새로 온 내의원 부정이 실력이 아주 좋다. 추나술도 잘하는데 두 사람에게 추나술을 해 주라 해야겠다. 불편한 곳은 없느냐.”

그들도 황제가 선이남 부정을 각별히 아낀다는 말을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를 보내 추나술을 받게 해 주겠다는 말에 크게 놀랐다.

“염려해 주시는 덕분에 아픈 곳 없이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폐하.”

“소첩 역시 그렇사옵니다.”

염빈과 정빈이 말하자 황제가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일찍부터 건강을 관리해야 그대들의 얼굴을 오래 볼 수 있지 않겠느냐. 짐도 부정에게 생각지도 못한 충고를 많이 받았다. 짐에게 잘못된 습관이 많더구나. 별 것 아닌 습관으로 건강을 망칠 수도 있다고 들어서 지금은 각별히 조심하고 있다. 그대들도 그리 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어.”

“폐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말들이, 이것이 정말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이 녀석들인가 보군. 길이 잘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아. 그대들의 기마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짐이 잊고 있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늘 기량을 마음껏 보여 주도록 하여라.”

염빈과 정빈은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 말을 타고 보낸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기마술로만 치자면 황제를 뛰어넘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말에 타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황제는 친히 그들이 말에 타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오늘 분의 놀랄 일은 전부 끝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궁인들은 다시 한번 기함했다.

염빈과 정빈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말에 탔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정말 기쁘고 즐거워서 짓는 웃음이라 꾸밈없이 밝고 화사했다.

황제는 그들이 참 고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 와서 새롭게 이성으로서의 호기심이 느껴진다는 것은 아니고 뒤늦게 예쁜 꽃을 발견해서 눈과 마음이 흐뭇하다는 정도이기는 했지만 그 시간이 진심으로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리 즐거워할 것을 알았으면 더 일찍 나오자고 할 것을 그랬구나.”

그것이 시작이었다.

황제는 두 사람과 함께 식사하기도 하고 두 사람만을 대동하고 외출을 하기도 했다.

염빈의 궁에 정빈과 함께 가서 다과를 즐기는가 하면 두 사람에게 선물을 하기도 했다.

황제가 저렇게 말을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었던가 할 정도로 이야기를 잘해서 웃게 만드는 일도 많았다.

황제는 선이남을 그들의 궁에 데려가서 두 사람이 추나술을 받는 것을 보기도 했다.

“폐하. 정말 시원합니다. 오랜만에 말을 타서 그랬는지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는데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염빈이 놀라며 말하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그렇더구나. 그래서 선 부정을 이리로 데리고 왔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런 것까지 살펴 주시다니요.”

“이제는 우리도 건강을 챙겨야 하네.”

그러면서 황제는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우리가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동안 염빈과 정빈의 부모는 얼마나 더 늙었겠냐는 말이었다.

그는 두 사람이 걱정에 빠져들게 하는 대신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산본의가의 의학당에서 배출한 의원들은 추나술에 능통한데 그들을 토번과 토욕혼에 보내면 어떻겠는가.”

“예?”

염빈과 정빈은 늘 고향 생각과 부모 생각을 잊지 못하고 있었기에 황제가 해 주는 말에 감격했다.

“말이 나온 김에 미루지 말도록 하지. 그대들도 고향에 가지 못한 지 오래되지 않았는가.”

“폐하…….”

결국 그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제 밑밥은 다 깔아 놨다고 생각하며 황제는 그날 만찬에 두 사람을 초대했다.

그리고 풍성한 식사를 함께한 후에 차를 마시며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했다.

“그대들도 내가 탈 마차가 기습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네. 그곳에 있었다면 꼼짝없이 죽었겠지.”

황제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염빈과 정빈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소첩들도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폐하.”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많이 놀랐지만 그 시간이 의미가 없기만 한 것은 아니었어.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 말이야.”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폐하?”

염빈이 묻자 그가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

“죽음은 항상 가까이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많아지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도 들더군.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도 들고. 어떤 사람들은 내가 죽기만 바라고 있겠지만 그대들처럼 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어찌 될지 걱정이 돼.”

“폐하.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두 사람은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해야 할 말이라서 읊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소리라는 것을 황제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야. 그리고 그대들이 내 후궁인 한 내가 죽은 후에 그대들에 대한 처우는 냉혹해질 것이다.”

“…….”

그들이라고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모국과의 관계가 좋은 것도 아니고 언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데 황제라는 방패까지 사라진다면 그들이 자객에 의해 갑자기 죽는다고 해도 전혀 놀라울 게 없었다.

“그래서 짐이 생각한 것이니 조금의 오해도 없이 듣도록 하라. 짐은 그대들을 각자 ‘황제의 누이’에 봉하려 한다.”

“폐하……!”

두 사람의 눈에 고인 눈물은 쉴 틈도 없이 떨어졌다.

그들은 그것이 아진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고 변고를 당할뻔한 황제가 놀란 가슴에 자기들을 걱정하고 밤잠을 설쳐가며 계책으로 생각해낸 거라고 여겼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내 뒤를 이을 자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면 그대들의 안전은 담보할 수가 없겠지. 그래서 그대들을 그대들의 나라로 돌려보내려고 한다.”

염빈과 정빈은 그동안 황제가 자기들을 살뜰히 아낀 이유가 뭔지 그제야 비로소 깨닫고 통곡을 했다.

“짐은 그대들이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조롱이나 무시를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대들이 돌아가는 길에 짐이 함께하려고 해.”

“폐하. 그렇게까지…….”

너무 늦게 황제의 진심을 알게 됐다고 생각하며 그들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고 황제도 이제는 어느 정도 진심이 되었다.

“짐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짐은 이 일을 서두르려고 한다. 그대들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궁에서 가깝게 지내던 이들이 있으면 그들에게 선물을 하도록 해라.”

그러면서 황제는 염빈과 정빈에게 각각 황금 오백 관씩이 든 궤를 주었다.

“가깝게 지낸 이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주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폐하.”

그들은 황제의 총애를 빌미로 하나라도 더 얻어 가려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듯했다.

“가기 전에 황성을 한 번 더 구경하겠느냐.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이 될 테니 말이다.”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곳은 통곡의 도가니가 되어 버렸다.

* * *

황제가 혼신의 열연을 펼치는 동안 아진이라고 그 시간을 한가하게 보내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북궁세가 주변에서 단리서언의 기척을 느낄 수 있을까 했지만 단리서언은 그날 이후 북궁세가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진은 하월이 북궁세가에서 다시 지위를 되찾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저 위인도 참 신기하단 말이지. 그냥 꺼지는 게 당연한 촛불인데 꺼질 듯 꺼질 듯하면서도 꺼지질 않는다는 말이야.’

아진은 기척을 완전히 감춘 채 은잠술을 펼쳐 하월의 처소로 갔다.

혼자 있을 때는 혼잣말을 하지 않는 한 얻을 게 없어서 아쉬운데 기회가 좋았다.

북궁천영이 그곳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 건지 아버님과 나에게는 말을 하는 것이 좋다. 너는 너무 환상 속에 빠져서 일을 망치는 경향이 있어.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북궁천영이 말했지만 하월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건 운이 나빠서 그런 겁니다. 황상이 그럴 거라는 걸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 말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만 그런 일을 당했으면 이제 너도 더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황상이 그랬던 것처럼 너를 찾아왔던 그자 역시 그럴 수 있다. 왜 우리를 도와줬는지 모르지만 거기에도 간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형님은 제가 성공하는 것이 싫으시겠지요. 저로 인해서 세가가 다시 잘되는 것이 싫을 거라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어찌 본가의 부흥을 싫어하고 그것을 가로막겠느냐. 단지 나는 좀 더 신중하게 구는 게 좋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처럼 독단적으로 굴다가 일을 망치지 말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하게 말을 하도록 해라.”

북궁천영은 하월 따위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해야 하는 제 처지가 너무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성질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북궁천영은 하월이 반감만 가져서는 일이 제대로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네가 본가를 위해 애써 온 것은 아버님도 아시고 나도 안다. 본가를 위해 잘하려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실패도 하지 않았겠지. 그게 어찌 네 잘못이겠느냐. 본가를 더욱 크게 일으키려는 너의 선의를 이용한 놈들의 잘못이지.”

“…….”

하월은 조금 마음이 누그러졌다.

누군가 자기 마음을 조금 알아준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다.

웃기는 것은, 실상 하월은 북궁세가의 부흥 따위를 위해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런 말을 들으니 감격스러웠다는 거였다.

하월이 원한 것은 한 가지였다.

세상이 자신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것.

그러면서 전능감을 느끼고 싶었다.

“전쟁이 날 겁니다.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곳에서 동시에요. 황실이 무너질 때까지요. 그때 우리는 한몫 단단히 챙기게 되는 겁니다.”

“…….”

북궁천영은 멍한 얼굴로 하월을 바라보았다.

너무 충격적인 말을 들어서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반면에 아진은 역시 그런 거였다고 생각했다.

하월에게 접근한 사람이 단리서언이라는 것도 좀 더 확실해졌다.

‘홍성루라고 했던가? 거기에 가서 루주를 만나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군. 황도에서 크게 기루를 차리고 운영할 정도면 그 여자도 신교 내에서 지위가 낮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처음에는 린린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패월악이라는 이름을 린린이 워낙 잘 관리해 온 덕에 린린이 패월악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만 하면 신교의 사람들은 저절로 린린에게 굴복했고 아진도 그 모습을 보면서 점점 자신감이 생겼다.

린린이 없는 곳에서도 그 방법이 통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신교 내에 내분을 일으키는 효과는 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더 얘기를 들어볼까 했지만 그곳에서는 더 이상 대단한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북궁천영이 하월을 도와 단리서언을 도울 거라는 것 정도가 그곳에서 아진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의 전부였다.

‘홍성루. 홍성루라.’

아진은 자기가 은잠술에도 엄청난 재능을 보이는 것 같다고 흐뭇해하며 홍성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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