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6화
236화
평생, 다른 이를 함정에 빠뜨리고 그들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려 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은 적도, 주목과 경탄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대로 승승장구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다 이룬 것 같기도 했었다.
그러나 늘 끝이 이상했다.
잘못될 수 없는데도 거기에서 실패와 좌절을 맛보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러다가 재기에 성공하는가 했는데.
마지막에 자신에게 내민 손을 절대 잡으면 안 되었다는 것을 그가 알 방법은 전혀 없었다.
“대체 왜…… 대체 그자가 나한테 왜…… 나한테는…… 나한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단 말이다…….”
흐느끼는 하월을 보며 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러나 아진이 그곳을 나서려 했을 때 하월이 아진을 붙잡았다.
“내가…… 내가 단 한 번만 복수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나?”
“누구한테?”
아진은 설마 단리서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물었다.
북궁세가에서 돈을 빌리고 갚지 않은 사람들.
고작 그 정도의 사람들만 떠올랐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월은 교주라고 말했다.
“이제는 인정하겠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너를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한 번도 내 수에 넘어가지 않았지.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다. 시키는 건 뭐든 할 테니 한 번이라도 그놈을 때릴 수 있게 해 줘. 작은 타격이라도 줄 수 있게. 그 후에는 죽겠다. 그 후에는 죽음을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그 전에는…… 이대로 죽는 건 억울해. 너무 억울해!”
그러는 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억울하다는 말.
그러면서 흘리는 눈물
그것만큼은 그의 진심인 듯 보였다.
한 번도 그렇게 솔직한 감정을 하월의 얼굴에서 본 적이 없었는데 그 순간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믿을 수가 있었다.
“내가 시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일 텐데.”
“뭐든 상관없다.”
“황후의 태감이 되라고 해도?”
아진은 곧바로 말했다.
자신의 결심과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본인도 때때로 잘 모르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는 정확하게 예시를 들어 주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하월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는 건가 하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조금 전까지의 하월과 같은 사람이 맞나 할 정도로 표정이 변해 있었다.
모든 희망과 탐욕이 사라져 버린, 일렁이던 빛이 푹 꺼진 눈에서 이제는 다른 것이 타오르고 있었다.
집념.
철저하게 무시당한 삶에서 한 번은 저항해 보고 싶은 것 같은 그런 의지가 엿보였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방식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억울해할 것도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그런 것은 모두 상대적인 감정인 것이라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의 태감이 되는 것도 거절하지 않겠다는 하월을 보며 아진은 그가 마음을 굳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진에게는 손해가 될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적과 적이 싸우느라 지치고 전력이 약해진다면 아진으로서는 격하게 환영할 일이었다.
하월이 교주의 상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가 북궁세가와 구문제독부의 힘을 잘 이용만 할 수 있다면 어찌어찌 시간을 끌어줄 수는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이미 신뢰에 너무 깊은 금이 가 있어서 그게 가능할까 하는 것은 미지수였지만 그래도 하월이라는 패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아진이 생각하는 동안 하월 역시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아진이 방향을 제시해 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그래도. 일단 달고 태어났는데 그걸 떼버리는 건 못 할 짓이고. 방법을 찾으면 아주 없지는 않겠지.”
하월은 아진이 저를 조롱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진을 향해서 화조차 나지 않았다.
얼마나 바보 같았을까.
얼마나 등신 같아 보였을까.
단리서언은 도대체 왜 자신을 목표로 삼았을까.
그의 앞에서 지은 표정이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라 버리는 바람에 더 고통스러웠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 생생히 떠오른 탓이었다.
“동창에 들어가서 간자가 되라면. 그것도 하겠는가?”
아진이 툭 던진 말에 하월의 눈에 파란이 일었다.
황후의 태감을 말하더니 동창의 간자는 또 뭐라는 말인가.
위조된 황금은 어떻게 하고.
교주는 어떻게 하고 여기에서 왜 동창이 나온다는 말인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하월의 얼굴을 보면서 아진이 무심하게 답을 기다렸다.
“그게 이 일과 관련이 있나? 교주를 쓰러뜨리는데 그 일이 필요하냐고 묻는 것이다. 나는 교주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너와 손을 잡겠다고 한 것이다.”
“나는 다른 놈들이 깔아 놓은 판에서 싸우는 것에 관심이 없다. 나는 싸우는 곳을 내가 정하는 걸 좋아하지. 싸우는 때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날아오는 공격을 전부 다 막을 필요는 없는 거야. 어떤 건 그냥 맞아줄 줄도 알아야지. 그러면서 힘을 비축하고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는 거다. 힘이 충분히 비축될 때까지 그냥 맞고 있으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나?”
하월은 아진이 한 말을 생각했다.
그냥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도 될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 말의 무게를 결정하는 것은 저 자신이라는 것을 하월은 그제야 깨닫고 있었다.
“실패해도 몇 번은 다시 기회를 줄 수 있나? 일부러 실패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런데 나에게 시키는 일을 처음부터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그러는 거니까.”
“그건 내 전문이다. 걱정할 필요 없어.”
“……고맙다.”
하월은 완전히 낙심한 것 같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이 보이기도 했다.
하월은 자기가 지금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를 향해 달려드는 맹수는 절대로 피할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는 강한 놈들이었다.
관과 천마신교.
그 둘 사이에 끼게 된 것도 참 기구한 운명이었다.
“너는 죽은 게 될 거다. 그래야 살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좋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살지도 않았겠지.”
하월은 자조적으로 말하다 탁자 위에 어지럽게 쌓여 있는 문서들을 보았다.
아진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기뻤던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 같은 자를 본 적이 있나? 진짜 우습겠지.”
하월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하자 아진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같은 놈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하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금고로 향했다.
아진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금고 안에 있는 황금을 바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아진이 하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금고를 열어 보기만 하면 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은 것은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아진은 자기가 서 있던 자리에서 고개만 들었다.
금고가 열리고 변색한 황금이 빼곡하게 차 있는 것이 보였다.
“…….”
하월이 피식 웃었다.
“이건 어떻게 하는 게 낫겠는가.”
“놔둬. 어차피 너는 경공도 못하고 내가 업고 가야 할 텐데 저 쓰레기까지 가지고 가는 건 귀찮아.”
하월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어디론가 데려가겠다는 것 같은데 그러면 이제부터 바로 태감으로서의 삶이 시작된다는 건가 해서 긴장이 됐다.
“저게 있어야 증명이 될 거다.”
“어떤 사람은 삶 자체가 증명이 된다.”
아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자신이 그 말을 의심 없이 믿고 있어서였다.
“네가 말하면 그냥 다들 믿을 거라는 뜻인가 보군.”
하월은 한숨을 쉬고 옷을 갈아입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길게 내쉬는 한숨 속에 북궁세가에서 인정받고 싶어 아등바등하던 과거의 시간이 함께 흘러가는 것 같았다.
“기회를 줘서 고맙다. 서도진. 실망하게 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나도 내 삶으로 증명해 보이겠다. 몇 번은. 그보다 좀 더 많이.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핑계를 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믿고 몇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좋겠다.”
“내가 말 안 했나? 그건 내 전문이라고. 산본의가에서 내가 가장 믿는 분들이 처음에는 삼류도 안 되는 왈패에, 산적들이었지. 야비한 걸로 하면 나 역시 만만치 않았고. 그래도 변할 수 있더군.”
“큭.”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 하월은 멍하니 아진을 보았다.
아진은 누군가에게서 갑자기 힘이 빠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는데 하월에게서 그 순간 그 모습이 보였다.
일단 힘이 빠져야 자기가 생각하는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서 기다리던 참이었는데 하월이 그 순간 그랬다.
‘이자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거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하긴. 폐하를 가르친 것처럼 가르치면 되려나? 쓰다가 죽어도 별로 안타깝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 단리서언을 쓰러뜨릴 무기로 만들면 재미있기는 하겠네.’
아진은 아주 비도덕적인 생각을 하면서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월은 그 자리에서 챙길 것을 찾으려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가지.”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아진은 하월을 업고 그곳을 나섰다.
그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그의 계획은 완전히 다른 거였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 *
“재미있는 것을 가지고 왔구나.”
아진은 황제가 황궁으로 돌아갔을까 어쨌을까 하면서 우선은 홍성루로 향했다.
황제는 아직 그곳에 있었고 아진이 하월을 업고 나타난 것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웃지도 않고 하는 황제의 말에 긴장이 되기도 했겠지만 하월은 그의 앞에서 엎드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것은 알고 있다. 네놈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네놈이 아진을 무슨 말로 설득했는지는 나도 궁금하구나. 아진이 아무거나 주워서 다니는 녀석은 아닌데 말이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습니다. 단리서언이 저를 이용하려고 한 일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들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저도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월은 제 입맛에 맞는 대로만 얘기해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듯했다.
그런 것을 빨리 깨달을수록 하월에게도 유익할 터였다.
“다른 것은 궁금하지 않다. 아진이 뭐라고 하더냐.”
“황후 폐하의 태감이 되어…… 동창의 간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황제는 멍하니 하월과 아진을 차례로 보더니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짐은 아진의 머릿속을 이해하는 것을 이번 생의 목표로 할 것이다. 아니. 지금 황금이 위조돼서 돌아다니고 있는 판국에, 게다가 여기저기서 짐을 흔들어 대려는 음모가 자행되고 있는 시점에 동창에 들어가서 간자가 되라니.”
“그리고 몇 대는 맞아 주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맞아야 하는 때인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황제는 아진이 무슨 생각으로 한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은 원래 그렇습니다. 폐하.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가서 싸움을 합니다. 자기가 원할 때 싸우려고 그 전에는 제대로 반격을 하지도 않지요. 아진의 꿍꿍이를 모르는 자들은 아진이 겁을 먹어서 그러는 줄 압니다만 나중에 호되게 당하고 나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뒤늦게 깨닫지요.”
선이남이 흥미롭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