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254화
두 사람이 먹기에는 말도 못 하게 많은 양이라 이제 제발 그만하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들도 지존을 위해서 그러는 거라 아진은 입을 다물었다.
사사건건 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임시로나마 그들을 모셔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굉장한 고충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단하네요. 스승님…….”
소청의 말에 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요.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는 있겠지요?”
소청이 하는 말을 듣고 아진이 웃었다.
“여기에 가둬둘 것 같아서 걱정되는 모양이구나.”
“걱정이 되는 건 아닌데……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해서요.”
“사람들이 사고를 놔 주지 않을 것 같아?”
“네. 누가 보더라도 사고님만한 교주는 찾기가 어려울 거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새로운 교주를 뽑으려고 하기보다 사고님을 설득하고 싶겠죠. 아!”
그러다가 소청이 놀랐다는 듯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사고님이 신교를 떠나려고 하시는 이유가 스승님과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를 죽이려는 사람들도 생기겠는데요?”
“오오. 머리가 제법 잘 돌아가는데? 계속 말해 봐라. 소청아. 그러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 같은지.”
무공을 수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는 눈을 가졌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것인데 이렇게 한가한 시간이 생겼을 때 소청에게 그 이야기나 들어 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일단 스승님에 대해서는 소문도 많이 났고 하니까 스승님을 직접 공격해서는 승산이 없겠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면…… 어! 저를 납치하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겠구나.”
“그것도 아니면 일단 멀리 있기는 해도 상대하기 더 쉬운 사람들을 공격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소청의 말에 그때까지 얼굴에 웃음을 짓고 있던 아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본가를 말이냐.”
“네. 스승님. 그래도 지금의 신교는 그런 일까지 꾸미기에는 전력이 많이 약하겠지요? 단리서언도 죽었고 원로회와 호법들까지 단리서언에게 당해서 사라진 것 같으니까요.”
그래도 지존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자들이 개별적으로 일을 꾸민다고 한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척도명과 같은…….
상급 무력부대의 무인들 몇이 의기투합해서 산본의가를 치거나 한다면…….
그러고 있을 때 드르륵 소리를 내고 문이 열리더니 린린이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에는 특유의,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이 지어져 있었다.
“와. 이 사람들. 밥도 안 먹이고 일을 시키려고 하잖아? 뭐야. 왜 먹다 말았어? 상 들어간 지 한참 됐다고 해서 나는 식사가 거의 끝나갈 줄 알았더니.”
그러면서 린린이 의자를 빼서 앉고 젓가락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아진의 것을 가져다가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야, 인마! 새것 갖다 달라고 해. 새것. 나도 다 안 먹었다고!”
“없으면 오라버니가 달라고 하면 되잖아.”
“와, 진짜. 소청아. 네 사고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거냐?”
“그런데 제 생각에도 스승님이 달라고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소청이 변했다.
이곳에 와서 사람들이 린린을 대하는 걸 보고 이제 린린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아진은 제자를 키워 봐야 다 소용없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푸욱 쉬었다.
“그렇지? 우리 소청이가 이렇게 똑똑해. 그런데 무슨 얘기를 그렇게 열심히 하느라고 음식이 식는데도 말만 하고 있었어? 다 맛있는데.”
그러자 소청이 그때까지 자기가 했던 말을 다시 읊어 주었다.
“아아. 소청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제법인데? 그런데 그런 건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알아서 했거든. 산본의가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자가 속한 단체와 가문 할 것 없이 씨를 말려 버릴 거라고 했어. 사전에 나한테 보고하지 않으면 신교도는 누구도 산본에 삼십 리 이상 가지 말라고 했지.”
“산본 주위에 집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 집을 옮겨야 하는 거지.”
그렇게 당연한 것도 자기가 일일이 대답을 해 줘야 하냐는 것 같아서 아진은 할 말을 잃었다.
“오라버니가 신교를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어. 이건 비밀인데.”
린린이 몸을 앞으로 바짝 당기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황상을 시해하는 일도 어렵지만은 않다고.”
“…….”
아진은 멍한 얼굴로 린린을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래도 지금 상태에서 아진의 가장 친한 벗이라고 할 수 있는 황상에 대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걸 들으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런 건 확실하게 해 놓는 게 좋아. 금지도 세게 해 놓는 게 좋고. 이래야 나중에 가서 다른 소리가 안 나오니까. 본가에는 랑랑이도 있잖아. 아주 약하면서 우리 의지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거지. 그렇다고 랑랑이를 온종일 감시할 수도 없는 거고.”
린린의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사고님. 아니. 스승님. 저 사고님의 수신호위를 안 하면 안 될까요?”
소청의 갑작스러운 말에 아진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소청과 린린을 보았다.
아진이 소청을 처음 만났을 때 소청에게 린린의 수신호위가 돼 달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한 말인 것 같았다.
그런 말이야 할 수는 있는데 왜 하필 그게 지금 이 자리에서 나오는 건가 해서 아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 당연히 그래도 되는데 왜?”
“제가 랑랑이를 지켜 줘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면 저는 종일 랑랑이를 지켜줄 수 있어요. 랑랑이가 지내는 곳 옆에서 수련하면서 제가 글도 가르치면서 지켜주면 되잖아요.”
“오오……?”
아진은 생각만 해도 귀여워서 고개를 끄덕였고 린린도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나섰다.
“정말 좋은 생각이다. 소청아. 그러면 되겠구나. 그러자.”
지금도 스승인 북리의천이 산본의가에 머물고 있으니 신교의 무인들이 아무리 그곳을 노린다고 해도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전투가 벌어지면 부수적인 피해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걱정했던 일이 오히려 쉽게 해결된 것 같아 마음을 놓으며 아진은 린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젓가락 내놔.”
“와, 진짜! 소청이 걸로 먹어.”
그러자 소청이 재미있다는 듯이 두 사람을 보았다.
아진은 너 같으면 소청이 걸로 먹겠냐는 듯 린린을 노려보았다.
어른 젓가락의 반 토막보다 조금 길 뿐인 짧은 젓가락을 보면서.
“아. 몰라. 배고프다고.”
그러자 소청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우렁찬 소리로 말했다.
“저희 젓가락 좀 주세요.”
왠지 아주 자랑스러운 목소리였는데 아진과 린린은 창피해서 고개를 숙였다.
* * *
며칠 만에 수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생각지 못한 일이랄 것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 린린이 예상했던 것들이었고 거기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해 두고 있었기에 신교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 갔다.
단리서언이 죽었지만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런 이들은 신교를 떠났다.
추살조가 급히 붙었지만 일부는 추살조를 따돌리고 사라졌다.
그곳에서 한 일 중에 린린에게 가장 후회가 남는 부분이 그거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자기가 직접 그들 모두를 쫓아다닐 수도 없고 어떤 일들은 결과가 좋지 않을 거라는 것을 예상하면서도 손에서 놔야 할 수밖에 없었다.
교주로 추대된 사람은 여럿이었지만 산본의가에서 함께 지냈던 이들 중에는 역천마의를 제외하고 모두 빠졌고 그들이 역천마의를 추대하자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모였다.
역천마의는 린린이 그곳에 좀 더 남아 있어 주기를 바랐지만 린린은 조금이라도 빨리 자신의 그림자를 지워 주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며 신교를 떠났다.
“린린. 기분이 어때?”
아진은 린린이 몇 번, 슬쩍 신교를 돌아보는 것을 알고 물었다.
린린은 몰래 보려고 했다가 들킨 것 같아서 어색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네가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잖아. 그러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마.”
“알아. 그런데 내가 올 일이 뭐가 있겠어. 이제는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 해결해 나가야지.”
“그래. 이제 신교 일도 마무리됐으니까 너도 본가 일에 신경 좀 써. 어머니가 또 일을 크게 만드시려고 하는 것 같으면 말리고.”
“어머니는 아무도 못 말리지. 그런데 안 될 것 같지도 않아. 우리라면 어머니가 꿈꾸시는 산본의가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그건 그렇다.”
황실도, 정파 무림도, 천마신교도 모두가 산본의가에 우호적인데 그 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듯했다.
돌아갈 때는 구경도 하면서 느긋하게 가자고 말을 했었지만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느새 경공을 펼치고 없었다.
누가 말리겠냐고 생각을 하며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어 버렸다.
석양이 저녁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발밑으로 수십 장씩 밀려가는 동안 그들 모두는 산본의가의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렸다.
린린은 습관처럼 다시 뒤를 돌아보다가 아진과 눈이 마주쳤다.
신교에 미련이 남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생각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가고 싶어서 보는 거 아니야.”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진짜야.”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까?”
세상을 고르게 비추던 석양은 린린의 얼굴도 부드럽게 어루만졌고 혼자 씩씩거리던 린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러니까 진짜 김치 만두 같네.’
아진은 흐뭇하게 웃으며 경공에 더욱 속도를 높였다.
자고로 자라나는 새싹에게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 줘야 더 정진하고 싶은 의지가 생겨나지 않겠는가.
아진의 신형이 사라져 버린 곳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두 사람도 모습을 감추었다.
놀란 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고 그들이 짓던 미소의 흔적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 이른 가을의 일이었다.
* * *
“북궁 태감에 대해 사람들이 말이 많아. 소감이 아니라 처음부터 태감의 품계를 내린 것에 대해서도 그렇고 북궁이라는 성씨를 계속 쓰는 것에 대해서도 그래.”
“예. 폐하.”
하월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일 뿐이었다.
“하긴. 황후가 그냥 놔두지도 않았겠군.”
그러나 하월은 황제가 하는 말은 잘 듣고 있지도 않았다.
“선 대인. 제가 아는 초식은 다른데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요?”
“아아. 아진이한테 배우면 이렇게 됩니다. 아진이는 초식을 그 사람에게 맞도록 변형을 시켜서 알려 주거든요. 초식이 다른 것은 상관하지 말고 그냥 하면 됩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이것이 원래 남궁세가에서 전해지던 것과는 다르겠습니다.”
“그럴 겁니다. 그리고 남궁세가가 멸문한 지 시간이 지나서 이걸 알아보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 정도의 절초를 펼칠 일은 세가가 멸문하기 전에도 거의 없었고 말이지요.”
하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목검을 들었다.
“그런데 선 부정. 하월은 짐보다도 훨씬 늦게 시작했는데 벌써 이런 것을 가르쳐 주어도 되는 것이냐. 하월에게 가르쳐 줄 것이면 짐에게도 가르쳐 줘야 하는 게 아니냐.”
황제의 말에 선이남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