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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69화 (269/470)

제269화

269화

어쩌다가.

어쩌다가 이리되었다는 말인가.

황상은 황후가 뇌물을 받고 청탁을 받은 것이며 명빈을 죽인 것과 항주의 관료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던 것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그것을 공론화하지 않았고 황후를 폐위시키지도 않았다.

그냥 그대로, 간당간당하게 목숨만 붙어 있게 해 두었다.

황후가 사라지면 황후의 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종양과 싸워야 하고 이부상서가 사라지면 새로운 적을 처음부터 다시 파악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 *

아진과 린린이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황제는 조금이라도 그들을 더 붙잡아 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이 뜻대로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놔 주고 싶지 않은 것이 황제의 마음이었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황제는 매 순간 결단을 내리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고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부부의 연을 맺어서 살던 사람을 잘라내는 것인데 그 일이 어떻게 편할 수가 있었을까.

아무리 정치적으로 숙적 관계였다고 하더라도 민낯을 확인하고 결단을 내리는 것은 슬픈 일이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황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태자였다.

적장자인 황자를 태자로 책봉했지만 황제는 태자에 대한 신뢰가 크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황후와 그 가문에 의해 떠받듦을 받으며 살아왔던 태자는 세상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곤 했다.

원하는 것은 전부 자신의 것으로 취하면 되었고 거기에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황궁을 떠나서 살았고 이야기로는 200칸이 넘는 장원에서 수많은 하인과 경비 무사들을 두고 산다고 했다.

나이가 아진보다 많았는데 황제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러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기는 했다.

태자비가 죽은 후 태자는 다시 태자비를 찾고 있었다.

황제는 태자와 여러 황자 중 적장자라고 해서 태자에게 황위를 넘기는 게 옳은가 하는 문제로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황후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그 태자가 황위에 오르게 된다면 사사로운 복수심에 사로잡혀서 황후와 그 가문 사람들의 복권을 꾀하며 황제가 기껏 바꿔놓은 것을 수포가 되게 만들 수가 있어서였다.

황제가 그런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진과 린린도 선뜻 황궁을 떠나 산본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월은 그때가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수시로 그들을 찾아와 못 다 익힌 무공을 지도받았다.

“하월 공자. 그런데 공자는 북궁세가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입니까? 여기에서 동창에 남을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아진이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묻자 하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초처럼 떠돌던 삶에서 이제야 제가 있을 곳을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할 수 있다면 황상의 곁에서 황상께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산본의가가 있어서 황상께서 이번 일을 추진하실 수 있었던 것처럼 언젠가는 저를 떠올리면서 황상이 또 다른 뜻을 추진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것은 아진으로서 생각도 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월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전혀 뜻밖이어서였다.

아진의 옆에 있던 린린도 신기하다는 듯이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놀라워했다.

하월은 그런 린린을 힐끔 보고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진은 하월이 처음부터 린린을 싫어했다는 것을 떠올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난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랬지요.”

도종의 혼례 때 처음 얼굴을 보았고 지금 랑랑의 나이가 세 살이 되었으니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때의 공자는 지금과 참 많이 달랐습니다.”

아진의 말에 하월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어떤 사람은 처음이 좋았다가 끝이 나빠지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와 반대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공자의 삶이 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믿어 주어서 그게 가장 고맙습니다.”

하월이 옆에 있어 준다면 황상에게는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월이 처해 있는 복합적인 상황 때문에 사람들은 하월이 황상에게 충성을 다 바칠 거라고 쉽게 믿지 않았다.

그 마음에는 황상을 향한 미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쉽게 판단하곤 했던 것이다.

“황상의 개혁은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거기에 저항할 것이고 힘을 가졌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서 그 힘이 사라지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보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힘을 다해서 황상을 보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힘이 닿는 대로 그리 할 것입니다.”

하월은 아직 자신의 진심을 증명할 기회가 없었다.

황후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려 준 적은 있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위험을 감수한 적은 없었다.

하월은 속으로 그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는 아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 못했다.

선이남이나 산본의가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내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았다.

그러면서 하월은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자기도 아진에게 그런 존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왕 동창이 되었으니 동창 제독이 되십시오. 공자.”

하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워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이 동창 제독이 되어 동창을 완전히 장악하고 그 상태로 황상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면 황궁의 특무기관 하나가 확실하게 황상의 앞에 복속되는 효과를 가져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길이 지난할 거라는 건 공자도 알 것입니다. 환관들이 어떻다는 것은 나보다 공자가 더 많이 들었을 테니 따로 말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진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직 북궁세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찾아와서 말씀하시더군요. 북궁세가를 이어나갈 사람은 이제 나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 통쾌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책임감이 느껴지는 것인지. 그냥 마냥 좋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정작 하월 자신에게 높은 파도가 몰려 왔을 때보다 주위의 사람들이 역경을 헤쳐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의 삶이 크게 변한 것 같았다.

“아버지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은 부족한 모습일지 모르지만 그 자리에 반드시 자격을 갖추고 돌아가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북궁세가를 말할 때 존경심과 경이로움을 담아 말하게 되도록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안 믿으셨겠습니다.”

훈훈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린린이 끼어들었고 하월은 한숨을 깊이 쉬었다.

“소저. 나는 소저와 참 안 맞습니다.”

“아이고. 서운합니다. 나는 공자와 잘 지내고 싶은데요.”

얼굴을 보면 전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 것 같은데 태연하게 하는 말을 들으며 하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자주 겪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아진의 말에 하월은 자기도 그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황궁 무고에 여러 무공 비급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욕심이 생길 거라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나는 공자가 창궁무애검법을 대성하기를 바랍니다. 그걸 기반으로 해서 공자만의 새로운 검법을 창안하는 것도 좋겠지만 다른 것을 새로 익히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하월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근골이 이미 거기에 맞게 맞춰졌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검법이 딱 맞는 옷처럼 잘 어울린다는 것도 알았다.

“반드시 대성하겠습니다. 그것으로 검의 끝을 보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얘기는 다 끝난 것 같은데 그가 쉽게 떠나질 않는 것을 보며 이상하게 여기고 아진이 바라보자 하월이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독고세가의 이야기 말입니다. 독고세가에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공자와 산본의가를 위해 전력을 빌려주겠다고 했었다지요.”

“예. 가주님께서 분명히 그리 말씀을 해 주셨었습니다. 공자가 그 이야기를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신기하군요.”

“공자와 산본의가에 대한 소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강호의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검신 대협과 공자의 일은 알 거고 말입니다. 어쨌든 그 이야기를 한 이유는…… 나도 그러고 싶다고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예?”

“나도 언젠가는 공자와 산본의가에 그런 힘이 되겠습니다. 힘이 다 자라지 못한다고 해도 공자가 내 힘을 필요로 할 때가 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진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친해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 있어서였다.

“고맙습니다. 공자. 정말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나도요?”

린린이 또 툭 튀어나왔고 하월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공자와 산본의가에만 해당하는 일입니다.”

“산본의가에 해당하는 일이니까 나도 해당하는 거 아닌가요?”

“소저는 빼고입니다.”

유치한 건 알았지만 왠지 린린에게는 순순히 말을 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하월이었다.

린린은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거렸고 아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종종 이남 형님과 대련을 해 보십시오. 이남 형님에게도, 공자에게도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그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하월은 이제 아진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들과 헤어지는 것이 그렇게 아쉬울 거라고는 상상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때는 실제로 그랬다.

하월은 제 마음을 추스르고 그들의 앞에서 사라졌다.

“사람 일은 몰라. 정말. 그렇지. 오라버니?”

“그러게 말이야.”

아진은 황궁을 둘러보며 이제 그곳을 떠날 때가 왔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던 아진의 앞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염빈과 정빈을 본 적이 있었기에 그 차림을 보면서,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궁주일 거라는 추측이 들었다.

황후의 위치가 희미해진 때를 노려 황상이 총애하는 아진에게 접근해 황상과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송구합니다만…….”

“그게 너의 잘못이겠느냐.”

그러면서 궁주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다.

그녀의 소개를 받으면서 아진은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황궁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놔두지 않는다는 것처럼, 이곳에 있다가는 수많은 사람이 아진을 찾아와 청탁할 것 같았다.

린린도 아진의 뜻을 알아차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언제든 돌아갈 준비가 다 됐어. 구결도 다 적어 드렸고.”

“아. 구결. 정말 허공섭물 구결을 적어 드렸어?”

“응. 섭혼술 구결도 알려 주면 안 되냐고 하셔서 안 된다고 설득하느라고 혼났어. 허공섭물은 구결을 적어 드리고 무공도 전수해 드렸어. 그건 이제 어느 정도 하셔. 이남 오라버니가 아무 때나 날아다니는 붓을 피하느라고 고생이 많아.”

두 사람은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수많은 음모와 비밀을 품고 있을 황궁이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나른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랑랑 보고 싶다.”

린린의 말에 아진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청이도.”

“어머니랑 아버지도.”

“스승님도.”

“흑주도 보고 싶고.”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산본에 다다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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