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0화
280화
“큰 부상은 아니라서 약이 잘 듣기는 할 겁니다만 그래도 이틀 정도는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과격한 움직임은 하지 말도록 하고 동창 제독이 새로운 임무를 내려도 못 하겠다고 말을 해 보십시오.”
매듭을 지으며 선이남이 말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맡길 텐데 그렇게 되면 죽음을 막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가야 귀식대법도 가르칠 수 있고 말입니다.”
하월은 작은 한숨과 함께 제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다쳐서 돌아오질 마십시오. 그냥 검을 휘둘러서 막으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그 사람들은 며칠 쉬면 금방 나을 텐데.”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월은 그곳에서 물러나려 하다가 잊고 있었다는 듯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태자 전하의 부름이 있었습니다.”
“태자가 말이냐. 태자가 무슨 일로 너를 불렀다는 것이냐.”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고 내일 일과가 끝난 후에 은밀하게 찾아오라고 하였습니다.”
“흠…… 무슨 일인 것 같으냐.”
황제가 물었지만 하월도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이럴 때는 린린이나 아진이 옆에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죽은 사람이 옆에서 알려 주는 것처럼 그런 일들을 전부 알아내지 않느냐.”
황제가 말하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으면서 허공섭물로 화병을 살짝 들어 올렸다.
선이남은 아무래도 그게 떨어져서 깨질 것 같다는 생각에 영 불안했고 결국 두 손으로 화병을 먼저 잡았다.
“뭣 하는 짓이냐. 선 부정.”
“폐하는 이걸 안전하게 내려놓지 못하실 것이고 그러면 좋은 화병이 깨지고 물이 쏟아지지 않겠는지요.”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는 했지만 고집을 부리지는 않고 그 옆에 있던 안 깨지는 자잘한 것들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일단 태자가 뭐라고 말하는지 듣고 오너라. 태자를 만나고 난 후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짐을 찾아와 고하도록 하고.”
“예. 폐하.”
“혼자 가도 되겠느냐. 아니면 선 부정과 함께 가거라. 잘 지내는지 살펴보라고 짐이 보냈다고 하면 태자도 감동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하월과 선이남은 동시에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고 황제는 자기가 생각해도 그건 좀 이상했다는 듯이 수긍했다.
* * *
태자의 거처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모아놓은 것처럼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수십 채의 전각은 하나하나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고 과연 소황제라 불리는 이의 거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월이 그곳을 찾았을 때 문을 지키던 이가 태자를 찾아가 소식을 고했고 하월은 별로 오래 기다리지 않은 채 태자에게 안내되었다.
태자는 연못 옆에 지어진 정자에 앉아 있었다.
옷차림을 봐서는 말을 타고 온 듯했다.
“북궁 태감. 어서 오라.”
태자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하월을 맞이했다.
“태자 전하를 뵙사옵니다.”
“그래. 요즘 여기저기서 북궁 태감의 소식이 자주 들려오고 있더군. 북궁 태감이 수고가 아주 많아. 이리 올라와서 내가 따라 주는 술을 한 잔 받게.”
“예. 전하.”
태자가 무슨 일로 부른 것인지 알지 못하는 만큼 하월은 그의 말을 웬만하면 전부 들어 줄 생각이었다.
만독불침의 몸은 아니어도 몸에 어느 정도의 독이 들어오면 내공을 사용해서 해독하는 것도 가능해져 태자가 꿍꿍이를 갖고 일을 벌인다고 해도 순순히 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자기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황상과 선이남이 알고 있으니 지금쯤 어디선가 선이남이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북궁 태감을 뭐라고 부르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헷갈리기는 하군. 새어머니는 아니고…… 새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
태자가 말을 하고 클클거리며 웃어댔다.
그것은 하월을 비웃는 말일 뿐 아니라 동시에 부황을 조롱하는 말이기도 했는데 하월은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뿐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고 이렇다 저렇다 대꾸를 하지도 않았다.
자기가 그렇다는데 어쩔 것인가.
거참 괴로우시겠습니다, 하고 위로를 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청하기 어려운 사람을 청했으니 일찌감치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지. 나는 요즘 태자비를 찾고 있네.”
“그러십니까.”
“그런데 성에 차는 인물이 없더군.”
“그러신지요.”
“해서 말인데.”
지루한 이야기가 몇 차례 오가는 동안 하월은 고작 이런 얘기를 하자고 자기를 부른 건가 해서 기가 찼다.
“이런 이야기를 환관인 북궁 태감에게 하는 것도 우습기는 하겠군. 북궁 태감이 이런 쪽으로 뭘 알겠는가.”
막간을 이용해 하월을 비웃는 것도 잊지 않던 태자가 본격적으로 말을 꺼냈다.
“나는 사실 마음에 두고 있는 처자가 있다네.”
“그러십니까.”
그러면 가서 청혼하든가 혼담을 넣든가 부황의 허락을 받으면 될 일이지 왜 자기에게 이러는 건가 하면서 하월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워낙 유명한 소저라서 북궁 태감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어찌나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지 아주 잘 아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야.”
사람마다 이야기하는 재주는 다르다.
별로 재미없는 얘기를 극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미있는 얘기도 지루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태자는 확실히 후자에 해당했다.
하월은 태자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기가 지루해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점점 심각하게 들었다.
‘지루하게 만들어서 사람을 죽이는 무공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수많은 기인이 있었으니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내가 처음은 아닐 것 같은데.’
하월이 점점 집중력을 잃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이름이 태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북궁 태감도 그 소저를 알 거라고 생각하네만. 서이린 소저 말이네. 서도진의 동생 말이지.”
“……서 소저를 말씀하십니까.”
“그래. 산본의가라면 가문이 조금 처지기는 하지. 신분도 낮고. 사람들이 떠받들고는 있지만 그래 봐야 의가의 사람이 아닌가. 태자비로는 많이 부족하지. 지금까지 물망에 오른 사람들은 전부 권문세가의 여식들인데 말이네.”
“그렇습니다. 전하.”
하월은 태자의 말에 대꾸해 주면서 린린에 대해 생각했다.
“해서 간택을 하려고 하는데 북궁 태감은 어찌 생각하느냐.”
“……!”
그렇게 갑자기 단호한 말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하월은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그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열심히 입을 놀렸다.
“전하. 서 소저가 천마신교의 교주인 패월악의 환생이라는 사실은 알고 계신지요.”
“그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그건 어리석은 백성들을 선동하려고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전하. 그게 사실일 수도 있지 않은지요. 서 소저는 실제로 무공이 아주 뛰어납니다. 직접 본 일이 있어서 그것은 제가 확언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말이냐. 나는 개의치 않는다.”
“서 소저는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문이 좋지 않습니다. 산본의가는 의가에서 시작했지만 의술을 베푸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수많은 사업을 벌였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탐욕스럽다는 말이 있지 않은지요.”
하월은 한 번씩 황궁에서 보았던 린린을 떠올렸다.
그러나 심드렁하고 세상만사를 귀찮아하는 것 같은 그 소저의 얼굴에 온기가 번지는 때가 있었다.
서도진이 옆에 있으면 서이린은 든든한 바람막이 곁에 있는 것처럼 지극히 평화로워 보였다.
그 사실을 더 확실히 알려면 서도진이 없을 때 서이린이 어쩌고 있는지를 보면 되었다.
‘서 공자가 가주와 가모의 아들도 아니라고 했고 서 공자의 친모가 어느 날 산본의가 문을 두들기고 찾아와서 그 집에서 아이를 낳고 사라졌다고 했지. 그러니 두 사람이 맺어지는데 거치적거리는 문제도 없고.’
하월의 생각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이린은 태자비로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태자비가 되면 성질도 죽이면서 살아야 할 텐데 아무래도 서이린은 그러고는 못 살 것 같았던 것이다.
한평생을 천마로 살면서 신교도 위에 군림해 오던 사람이, 게다가 성격도 그렇게 안 좋은 사람이 태자비라니.
이런 태자의 비로 산다고?
하월은 태자비를 보면서 속으로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태자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그도 알 것 같았다.
산본의가에 대해서 태자가 아무리 폄하를 한다고 하더라도 요즘 대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산본의가였다.
소가주인 도종은 이미 혼인을 해 버린 몸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산본의가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두고 혼인을 통해 인연을 맺고 싶어 하는 가문이 수두룩했다.
하물며 서도진과 서이린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산본의가의 현판도 그런 현상에 한몫했는데 황제가 그 가문의 관련 사업체 현판을 전부 써 주었다는 소문이 각지에 퍼져나가면서 황상의 총애를 확실히 받는 가문이라는 인식이 강해졌던 것이다.
태자도 자신을 향한 황상의 마음이 어쩐지 불안한 상황에서 서이린을 비로 맞이하게 된다면 황상의 마음을 얻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듯했다.
‘발상은 좋았는데…….’
하월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만약 태자가 그 일을 감행한다면 황제도 어깃장을 놓기가 힘들 수도 있었다.
하월도 태자를 향한 황상의 마음이 어떤지 확실히는 알지 못하는 판국이었다.
‘이건 내가 막아야 한다.’
하월은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그때부터 서이린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그 소저를 처음 본 것은 산본의가의 소가주인 대공자의 혼례 때였는데 그때부터 이미 서 소저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객들이 있는 곳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서 뻗어 버린 게 소문이 안 난 것은 가주와 가모가 사람들에게 답례품을 가장해 돈을 뿌려서 입막음을 해서 그런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직접 봤으니 그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태자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서이린에 대해 들리는 소문을 들어 보면 성격이 제멋대로라는 건 어느 정도 가늠을 할 수가 있었다.
‘그래도 설마 자기 오라비의 혼례식에서 그런 짓까지?’
하월은 신이 나서 그때부터 서이린에 대한 온갖 해괴한 이야기를 다 지어냈다.
사명감으로 하는 일이기는 했지만 서이린을 깎아내리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나 하월이 얘기를 하는 동안 표정이 조금 변하던 태자는 어느 순간부터 하월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태자니라. 태자의 혼인이 어찌 평범한 사람들과 같이 정해지겠는가.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황실의 안녕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하. 서 소저는 재앙과도 같습니다. 그런 희생은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왜 태자 전하께서 그런 고난을 감수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서 소저를 몰랐다면 모르지만 서 소저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사람인지 아는데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으면 두고두고 전하께 죄송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태자는 난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