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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92화 (292/470)

제292화

292화

“혈교 놈들이 사특한 방법으로 일을 벌인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가주님. 모두 그 일로 난리인 듯합니다. 그래서 지금 채집행을 계속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급히 왔습니다.”

사장로가 흥분된 얼굴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우리 쪽의 전력도 무시 못 할 수준이라 마냥 걱정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이런 일이 있다는 걸 알고 간 것도 아니어서 말입니다. 더군다나 채집행을 한다고 산으로만 다녔을 거라 소식을 접하는 게 늦어질 것 같아 더 걱정됐습니다.”

“그렇지요. 저희도 마을에 내려와서야 알았습니다. 그 전에는 며칠 동안 산에서 내려오지도 않아서 하마터면 한참이 지나도록 그 일을 까맣게 모를 뻔했지요.”

사장로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현무단주 당채운도 사람들 틈에서 그들의 귀환을 축하했다.

신교에서 벌어진 일로 인해서 정의맹에서는 당분간 외부 활동을 멈추고 각자가 문파와 무가로 돌아가 그곳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래서 당채운 뿐만 아니라 정의맹의 무력대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모두 당문에 돌아와 있었다.

“오늘은 푹 쉬도록 하시지요. 술과 고기도 질리도록 드시고 말입니다. 무영루에서 무환주 여섯 동이를 가져왔는데 채집행에 나간 사람들이 돌아온 후에 풀려고 아껴 두었습니다.”

“잘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선은 좀 쉬어야겠습니다. 오랜 채집행에 모두 많이 지쳤습니다.”

웬일로 사장로 당무독이 술을 마다했다.

더군다나 무영루의 무환주라는데 그것을 두고 우선 쉬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채집행이 어지간히 힘들었나보다고 생각했다.

무영루에서는 주기적으로 무환주라는 술을 직접 담갔는데 당무독은 그 술을 좋아해서 무환주가 나오는 날짜까지 기억해 두곤 했는데 그런 반응이 나오자 희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일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라 사람들은 금방 잊었다.

“하수오가 없어서 제약이 미뤄진다는 게 조금 아쉽기는 하군요. 성공만 한다면 가문에 산적해 있던 여러 문제가 동시에 해결이 될 텐데 말입니다.”

약부를 담당하고 있는 당천악 장로의 말에 가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새로운 약에 기대하는 바가 컸기에 아쉬움이 더욱 컸다.

“하수오를 약방에서 구할 수는 없는지요. 장로님?”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이가 묻자 당천악이 고개를 저었다.

“잎이 마른 뒤에 캐서 써야 하는 것이라 지금이 채취하기에 적기이다. 그래서 미리 캐 놓은 것은 효과가 떨어진다.”

일이 잘되려는 듯하다가 아쉽게 벽에 부딪히자 모두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했다.

“제약은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때가 되면 그 일을 허락해 주실 테니 모두 마음을 모으고 기다리면 방법이 생길 것이다.”

행여 채집행에 실패한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을까 조심하며 당천악이 말했다.

* * *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던 당채운은 밖에서 들려온 이상한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채집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환영하는 행사가 조촐하게나마 마련되어 그 자리에서 무환주를 풀 예정이었으나 정작 돌아온 이들이 피곤해하는 바람에 흐지부지하게 넘어 가버렸다.

주인공이 빠졌는데 다른 사람들이 기분을 내는 것도 우스운 듯하나 둘 처소로 돌아갔는데 예민한 당채운의 감각에 기이한 소리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잘못 들은 걸까 했지만 설사 잘못 들은 거라고 하더라도 일단은 나가서 살펴보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 소리를 도대체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하는 걸까.

바가지로 물을 퍼서 조금씩 신중하게 흘리는 소리?

‘쪼르르’와 ‘콸콸’.

그 사이의 어디쯤.

그런 소리가 계속 그의 신경을 긁었다.

다른 무가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인 당문의 특성상 외부의 침입도 용이하지 않았다.

살벌한 암기와 독충으로 채워진 기관진식을 뚫고 이곳까지 들어온 사람이 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안전한 곳에 머물고 있다는 믿음이 그들을 안일하게 만든 것인지도 몰랐다.

당채운이 밖으로 나갔을 때 어스름 달빛이 경내를 비추고 있었다.

그곳에는 경비 무인들이 서 있어야 했는데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한 남자와 그에게 붙잡힌 인영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당채운은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며 검파에 손을 얹은 채 그들에게 다가갔다.

내공으로 안력을 돋우자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인영은 당철현, 그리고 그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파류영이었다.

‘파 단주님이 왜?’

당문에서 외인 출신으로는 최초로 단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람.

녹의단주 파류영.

지금의 무위가 절정이고 언젠가 외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장로에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 기대되는 사람.

그의 한 손은 당철현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당철현의 몸이 이상했다.

그의 허리 아래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부위가 파류영의 몸 뒤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건 줄 알았지만 그 아래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게 무슨…….’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당채운의 몸은 그대로 굳어 버린 것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가는 모습은 숱하게 봐온 그였다.

그런데도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손에 든 것이 바가지인지 수통인지, 거기에서 흘러나온 것에 당철현의 몸이 녹고 있었다.

당채운을 더욱 경악하게 한 것은 아직 당철현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점혈을 당한 듯 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도 그가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며 몸부림치는 모습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

움직여야 했다.

그를 막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당채운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그대로 도망치고만 싶었다.

뒷걸음질을 치다가 파류영에게 들키게 될까 봐 소름이 끼치게 무서워서 그는 자신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라져 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러나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파류영이 천천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어쩌면 처음부터 당채운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웃음이 번뜩였다.

당채운의 이와 무릎이 딱딱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단…… 주님. 이게…….”

그의 몸도, 말도 어느 것 하나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당채운은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당채운. 당문의 자랑.”

파류영이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들어도 그냥 듣지 못한 척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나.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다른 자들은 모르는 척 귀를 닫고 잘만 웅크리고 있는데 뭐가 잘났다고 뛰쳐나온 거지? 그래놓고 하는 일이라고는 그렇게 벌벌 떠는 게 다인가?”

그는 당철현의 머리를 어느 정도 남겨놓고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당철현은 마침내 죽음에 이른 듯 눈을 감고 있었고 더 이상 고통에 떨지 않았다.

“화골산이다. 이걸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재미있는 게 잔뜩 있군.”

“그게 무슨…….”

당채운은 한참 전에 생각했어야 할 것을 그때에야 떠올리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그가 왜 당철현을 죽인 것인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게 무슨 이유인지도 알 것 같았다.

“외당 무사 한놈은 제법 용감하더군. 그놈이 나를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알아? 화골산이 들어 있는 통에 밀어 넣으려고 하더군. 그때는 정말 깜짝 놀랐어. 잘못했으면 내가 거기에 빠져서 죽을 뻔했다고.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아. 그래서 여기서는 일이 어려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반항다운 반항을 한 건 그 외당 무사가 끝이었어.”

“파 단주님은 어떻게 되었느냐! 파 단주님을 어떻게 한 거냔 말이다!!”

눈앞의 그가 파 단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당채운이 크게 소리쳤다.

계속 그의 조롱이나 받으면서 그렇게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정해진 결과는 하나였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라면 당문을 위해 싸우다 죽어야 했다.

몇 번 심호흡을 하는 동안 다행히 숨이 가라앉기는 했다.

심법으로 겨우 안정을 되찾고 파류영을 노려보며 당채운이 검을 뽑아 들었다.

“알려줄까? 화골산에 녹아서 죽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자보다 편안하게 죽은 거지. 이만하면 위로가 되나? 아니면 부러워지려나?”

음산한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커졌다.

당채운은 더 이상 멍청히 서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이 가죽 말이야. 그럴싸하지? 익숙하지 않나? 네가 아는 그자의 것인데 말이야. 이 가죽은 전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죽은 자의 가죽으로 몸에 보이는 부분은 전부 감싸지. 사실 손까지 이렇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너도 파류영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지 않나?”

“닥쳐라. 이 미친놈!”

“내 고민이 뭔지 아나? 당문에 있는 독이야. 이 독을 없애자니 아깝고 놔두자니 불안하고. 우리가 가질 수만 있으면 놔두는 건데 말이야.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그래. 그 독으로 너희를 죽이는 게 낫겠지?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고 그 위험한 독들을 음흉하게 보관해 놓고 있었던 게 아니냔 말이다. 그러니 억울해할 건 없을 거야. 그렇지?”

당채운은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간단하게 당채운의 몸을 피한 후 검면으로 당채운의 몸을 때리고 발로 그의 등허리를 찼다.

당채운은 상상하지 못한 속도에 당황하면서 앞으로 몇 발자국을 떠밀렸다.

“멋대로 상상하지 마. 네가 바보라고 해서 나도 바보일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지. 그게 네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속도라고 해서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그리고 자신의 속도를 알려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쾌검을 펼쳤다.

그러나 당채운은 이내 바닥을 박차고 떠올라 그 공격을 피해 냈다.

몸이 얼어붙었던 시간은 지났다.

지나야만 했고 그렇게 되었다.

죽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지만 손도 쓰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바람은 부드럽고 달빛은 따뜻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밤에 벌어질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신형이 허공에서 갈렸고 거의 동시에 바닥에 착지했다.

당채운은 제 허리에서 불컥 불컥 치솟은 핏줄기를 보았다.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검은 막았지만 설마하니 그자가 허리에 차고 있던 도끼를 빼 들 줄은 알지 못했다.

파류영은 사용하지 않던 무기였다.

평생 도끼를 무기로 쓴 적은 없었을 것이다.

돌아보자 파류영의 몸을 뒤집어쓴 흉수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당채운을 노려보더니 서서히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가슴팍에 긴 검상이 나 있고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럴 수는 없다는 듯이 그가 검미를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그 감상에 오래 빠져 있는 대신 손으로 제 가슴을 훑었다.

솟구치던 피가 잦아들었다.

갈라진 옷이 다시 붙지는 않았지만 상처가 아문 것이 아닌가 했다.

‘저자들은 얼마나 괴물이라는 말인가.’

당채운은 다시 그를 향해 마주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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