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8화
298화
“그러면 저는…… 제가 하던 말을 마쳐도 될까요?”
역천마의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하라고 손짓을 하자 역천마의가 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폭천의는 자기에게 한계가 있다는 걸 일찍부터 알았을 거예요. 그러다가 제가 단전을 만들어 주는 걸 보고 자기도 대법을 성공시켜서 그런 문제점들을 극복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폭천의가 시도했던 대법들은 전부 그런 것들이었거든요.”
혈도를 기형적으로 변화시키고 자기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만드는 것.
몇 사람은 대법을 견디고 얼마간 살아남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 달포를 넘기지 못했고 그렇게 대법에 실패할 때마다 폭천의는 어린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광포해지곤 했다는 것이 역천마의의 이야기였다.
“할 수만 있었으면 그 아이는 대법으로 자신의 체질을 개선했을 거예요. 사람들을 납치하고 그 사람들의 가죽을 벗겨 다른 사람에게 입히고 그 사람의 흉내를 내게 해서 작은 조직을 괴멸시킨 건 폭천의가 궁극적으로 노린 건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그게 일으킨 파장이 충분히 커서 그게 궁극적인 목표처럼 보인 것뿐이죠.”
“폭천의는 제 몸에 대법을 시행하고 싶어 했지. 성공할 거라는 확신만 있다면.”
린린도 기억을 더듬으며 역천마의의 생각을 지지했다.
“맞습니다. 주군. 폭천의가 원했던 건 단리서언이 성공한 영체이혼대법과 비슷했을 거예요. 제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서 자기 몸에 대법을 시행하고 그 몸으로 돌아가겠다는 게 폭천의의 목표였을 거예요. 아주 복잡하지만 선택의 가능성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전 때문이군. 그 단전에 맞는 심법에 익숙해져 있어서 다른 사람의 몸에서 새 심법을 익히고 시작하는 게 부담이 된 걸 거야.”
“저도 그게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체이혼대법은 끝내 성공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 단전을 가지고 그만한 내공을 모으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니까.”
“예. 주군. 그래도 그동안 해 왔던 연구와 실험으로, 다른 사람의 가죽을 벗겨 인피면구를 씌우고 그 사람의 행세를 하게 만들 수는 있었던 것 같아요.”
돈 때문이었을 것이다.
원하는 실험을 계속하기 위해 돈이 필요해서 누군가의 청탁을 받고, 자기에게는 필요 없는 살인을 도와 왔던 것이다.
아진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불쾌함을 느꼈다.
이해되지 않는 기이한 욕망을 가진 이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마도 평생을 따라다녔을 패배감과 질투, 열등감.
차라리 그는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것으로 인해 실패를 경험할 때마다 다시 일어서서 또 다른 악행을 시도해나갔던 것을 보자면.
“그 끝이 벽력탄이군요.”
아진이 말하자 역천마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 폭천의가 벽력탄에 대한 걸 자주 물었죠. 그건 정사마 모두 사용을 금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궁금해할 수는 있잖아요?”
어쩌면 이 일의 원흉은 역천마의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린린도 그 생각을 했는지 역천마의를 빤히 바라보았다.
“역천마의. 자책감은 안 느껴?”
“그럼요. 저는 제가 아는 것만 알려 줬어요. 저도 그걸 만드는 법을 몰라요.”
“크으으.”
역천마의가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린린이 그 몰염치는 인정해 줘야 한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론은 그자가 벽력탄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거고 벽력탄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어디까지나 추측이에요. 그런 게 아닐까 하는…… 그런데 왠지 그럴 것 같기는 해요.”
아진은 그 말이 이해가 됐다.
자기도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 * *
처음에 알려진 사건.
즉, 천마신교의 혈마 수라대를 괴멸시킨 사건은 서서히 잠잠해졌다.
납치 시도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렸지만 이제 그것마저도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게 되면서 혈교에서는 그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 듯했다.
범죄도 어떤 면에서는 사업과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더 이상 투자에 대비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폭천의가 패배를 알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패배를 알지 못하는 인간은 폭천의가 유일한 게 아니었고 그보다 정도가 더 심한 인간이 있었다.
아진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리세가를 시작으로 곳곳을 누비고 돌아다녔다.
벽력탄이라는 말은 그동안의 불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낳았다.
그런 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아진은 한동안 산본의가의 모든 인물이 총출동하면 이제 그들이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을 거라고 믿어 왔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부 봉쇄할 수는 없겠지만 한 지역에서 일어나면 그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승인 북리의천과 린린, 제자인 소청과 위도.
거기에 흑주까지.
우선은 그 세 사람만 함께 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거기에 마두들의 도움을 받고 정의맹의 고수들을 차출하면 좀 더 넓은 범위까지 방어가 가능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로도 부족할 수가 있었다.
벽력탄이 가지는 위력 때문이었다.
폭천의가 가진 벽력탄 하나로 각각의 절대 고수들을 해치워 버릴 수 있다면 그들이 부딪혔을 때 어떻게 될지는 상상을 하기가 어려웠다.
린린 역시 그 부분에서 동의했고 두 사람은 황궁을 찾아갔다.
황제는 그렇지 않아도 일이 진행되어 가는 것에 대해서 아진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참이었기에 두 사람이 스스로 찾아와 준 것을 기뻐했다.
태자 문제 이후 두 사람을 보는 것이 조금 어색하기는 했는데 이야기를 하던 도중 황제는 그들이 그 일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된 이상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고 괜히 그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 이유는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황제는 분위기를 좋게 만들었다.
“이번 일도 무사히 해결했더구나. 장하다. 산본의가와 천마신교의 활약이 컸다고 들었다. 린린은 이번 일로 천마신교에 돌아갔다지. 교주의 자리는 다시 차지하고, 머물기는 계속 산본의가에 머물기로 했다니. 그 말을 듣고 짐도 그렇게 해 보면 어떨까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아진과 린린은 형식적으로 웃어 주었다.
설마하니 정말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을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은밀하게 보내오는 선이남의 시선을 보고 진지한 얘기인가 보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부터는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가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은 말을 조심했다.
“긴장할 것 없다. 그렇게 방어적으로 나온다고 해도 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리 할 것이니 말이다. 산본에 궁을 하나 더 짓는 것이 뭐가 대수겠느냐.”
황제에게는 여러 개의 궁이 있었고 황제가 하는 말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크고 화려하게 짓겠다는 것도 아니고 실용적으로 짓는다면 황제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 충분히 할만한 일이기도 했다.
황제는 그간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도록 했고 아진이 설명을 하는 동안 하월이 황급히 들어왔다.
“공자님.”
하월은 반가운 마음에 아진을 불렀다.
그들이 왔는데 자기를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서운하기도 해서 하월은 그 기색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황제는 하월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임무 수행 중이 아니었느냐. 궁에 있으면 불러오라고 일러두었었다. 그런데 없어서 그런 것이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아진은 하월을 대하는 황제를 보면서 그동안 그 태도가 많이 바뀐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하월이 그 표정을 알아차린 것처럼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요즘 폐하께서 새롭게 아시게 된 동창의 치부가 많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그러시는 것일 겁니다.”
“그러시는 것이 무엇이냐.”
황제가 면전에서 묻자 하월이 그런 말을 어떻게 자기 입으로 하냐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황제도 하월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월의 말이 맞다. 하월이 어려운 임무를 줄줄이 완수하고 동창 제독의 신뢰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자기가 죽이라고 말한 사람들이 살아서 모처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 그곳에 숨어서 동창 제독의 목에 박을 단창을 벼르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황제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고 아진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동창 제독은 이제 비밀 장부를 두는 곳도 하월에게 알려 주고 있고 동창 내에서 하월을 가장 신임한다. 그러니 하월이 저렇게 목에 힘을 줄만도 하다.”
“그러면 하월 공자는 이제 무서울 게 없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총애에 동창 제독의 신임까지 받고 있었으니 하월 공자에게 선을 대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겠습니다.”
아진의 말에 선이남이 먼저 말을 해 주었다.
“정말 그렇다. 어느 정도인지 아진이 너는 상상도 못 할 거다. 북궁세가가 가장 강성했을 때에 비해서도 지금 하월 공자의 힘이 약하지 않다. 하월 공자 때문에 북궁세가가 조금씩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말도 들릴 정도지.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말이다.”
하월은 그 말도 부정하지 않았다.
“만전도 이제는 영업을 정상화했다. 우리에게 그런 전장이 필요한데 만전을 놔두고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시켜줄 필요가 없겠더구나.”
황제의 개인 금고.
거기에서 움직이는 돈만 해도 상당했는데 황제가 말을 하는 분위기로 봐서는 그의 사재를 만전에 맡기고 있는 듯했다.
혹시나 하면서 아진이 묻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대단합니다. 하월 공자.”
그러자 하월의 입가에 슬쩍 웃음이 지나갔다.
“저건 하월이 아주 기분이 좋아서 죽을 것 같다는 뜻이다.”
황제가 하월을 빤히 보면서 말했다.
“이제 폐하는 하월 공자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마치셨다.”
선이남은 두 사람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듯이 웃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만 폐하께 먼저 말씀드려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오간 후에 아진이 말하자 황제가 이해한다는 듯이 손짓을 하며 재촉했다.
아진과 린린은 번갈아 가며 폭천의와 벽력탄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다.
사안의 긴급성으로는 미리 소식을 전달하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아직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 일이고 실제로 폭천의가 벽력탄을 만드는 기술을 확보했거나 벽력탄을 만들어 냈을 때의 파급효가 커서 직접 얘기를 하려고 미루어 두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이야기가 나오는 동안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황제는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질문을 몇 번이나 했다.
하월과 선이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벽력탄은…… 벽력탄은 무림에서도 사용이 금지된 무기이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발견되면 멸문을 당하지 않았느냐. 벽력탄을 처음에 개발한 사람만 해도 온 가족이 다 함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들었다. 벽력탄의 연구 자료까지 전부 다 불태워 버렸고 말이다.”
선이남은 벽력탄이 가진 위력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그런 만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