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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18화 (318/470)

제318화

318화

“태자라니! 건방진 놈이 태자 전하를 어찌 그리 부른다는 말이냐! 그리고 이제 그분은 엄연히 황상 폐하시다.”

“미친놈들. 황위가 그렇게 이어진다고 누가 그러더냐. 태자는 제 외조부를 시켜 동창 제독에게 황상의 시해를 사주했고 동창 제독이 황상을 시해했다. 그러자마자 태자가 황상이라니.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다, 다, 닥쳐라, 이놈……! 네가 무엇을 안다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그러는 동안에도 허공에 떠오른 돌조각들은 꿈쩍하지 않고 있었는데 괴성을 뱉은 이가 검을 들고 말 등에 서서 전각 지붕으로 향하려 하자 정확히 하나의 돌만이 움직여 그의 얼굴을 으깼다.

그리고 그때만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흑주가 날아가 그에게서 진기를 빨았다.

“네놈들은 안타까울 정도로 미련하구나. 네놈들 생각에 내가 어디에서 오는 길일 것 같으냐. 여기에 오기 전에 내가 누구와 함께 있었을 것 같냐고 묻는 것이다. 아. 내가 누군지 모르나? 나는 서도진이다. 그러면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겠나?”

아진이 웃으며 말했지만 모두가 그 뜻을 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가주만큼은 희망을 본 듯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들을 것도 없다! 저놈을 죽여라! 저놈을 죽이는 자에게는 황금 한 관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

누군가 외치자 그 말에 선동된 자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그러자 허공에 떠서 대기하고 있던 돌조각과 흑주가 거의 같이 움직였다.

그때까지 돌조각을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 가두고 있던 아진도 대단했지만 돌조각이 날아가 사람들의 머리를 터뜨려 죽일 때마다 놓치지 않고 가서 진기를 흡수하는 흑주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사람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

그것이 그들을 더욱 맹목적으로 만들었다.

자기들이 질 리는 없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그들을 계속 전진하게 하고 도전하게 했다.

처음에는 허공의 돌들이 시야를 지저분하게 가리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런 문제가 서서히 해결되었다.

허공에 수많은 먼지처럼 떠 있던 돌이 사라질 때마다 사람들이 쓰러졌고 그들은 흑주의 진기를 채워주었다.

“뭐, 뭣들 하느냐! 저놈은 고작 한 놈……!”

그러나 그자의 말은 끝이 나지 않았다.

커다란 돌조각이 날아가자 그의 얼굴이 깨지고 부서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 죽음을 일으키려고 그곳에 서 있던 사람이었지만 그 죽음을 자기가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텐데 순식간에 운명이 뒤바뀌었다.

“와아아아!!! 놈을 죽이자!!”

짙은 피비린내와 공포감은 사람들의 정신을 반쯤 나가게 만들어 버린 듯했고 그들은 광기에 휩싸인 채 아진을 향해 달려갔다.

아진은 딱히 안타까워하지도 않은 채 그들을 쓰러뜨렸다.

아진이 한 것은 그때마다 돌을 날린 것이 전부였다.

“북궁의 힘을 보여 주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가주였고 그는 서도진이 돕는다면 이제 자기들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짧은 순간 동안 아진과 가주의 눈이 마주쳤다.

가주는 짧게 고개를 숙였고 아진 역시 그에게 화답했다.

허공에 있던 돌조각들이 일제히 횡으로 날아가고 할 일을 마친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돌조각이 떨어진 숫자와 정확하게 일치한 사람들의 시신이 바닥을 채웠다.

“우리는 북궁세가다!!!”

북궁인들의 커다란 함성이 곳곳에 울려 퍼졌다.

아진은 그곳에 앉아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까지는 있자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바로 떠날 생각이었는데 흑주가 정신없이 진기를 빨아들이느라 아진에게 돌아오지 않고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도 정말 아진이 먼저 가 버리면 흑주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기는 하겠지만 이제는 머리가 좀 컸다고 그러는 건지 아진이 떠난 지 한참 후까지도 남아서 진기를 허겁지겁 흡수하고 나서 뒤늦게 따라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제 싸움의 양상이 확실히 달라지고 북궁세가에 승기가 돌아가서 아진이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는데도 흑주는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아진은 슬슬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후에 흑주를 불렀고 흑주가 모른 척하는 걸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먼저 신법을 펼쳤다.

흑주는 움찔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폭식을 할 수 있는 것은 워낙 오랜만의 일이라 그냥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흑주는 나름대로 자기에게 자격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폭천의가 벽력탄으로 박살을 내놓은 마을 사람들 때문에 아진이 내공을 거의 잃었을 때 자신이 아진을 살려 주지 않았던가.

비록 아진은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지라도 흑주는 그렇게 굳게 믿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흑주가 돌아올 때까지 속도를 늦춘 채 가려고 하던 아진은 아무래도 흑주의 고집을 한 번 꺾어 놓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쳐 버렸다.

흑주는 몇 사람에게서 더 진기를 흡수하고 아진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조금 오래 개겼다는 생각이 들어서 흑주도 불안했다.

결국 흑주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아진을 찾아 날았다.

그래도 아쉬움이 너무 많이 남아 모든 신경이 북궁세가에 팔려 있었고, 평소라면 내지 않을 사고를 냈다.

퍽-.

으득-.

두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새 한 마리와 흑주가 같이 떨어졌다.

흑주의 몸뚱이 한쪽에 금이 가고 초승달 같은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흑주와 부딪힌 쪽은 상태가 조금 더 심했다.

바닥에 떨어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딱 보니까 독수리 같은데 무슨 독수리가 그렇게 시원치 않다는 말인가.

흑주는 속이 상했다.

흑주는 몸을 굴려 제 몸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을 잘 끼운 후에 기운을 흘려 엉성하게라도 이어붙였다.

잘 붙을지 걱정이 됐지만 일단은 이렇게 해서 아진에게 가면 아진이 붙여 줄 것 같았다.

그래놓고 아진을 다시 쫓아가려던 흑주는 그동안 별로 느껴 본 적 없던 양심 때문에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왜 그러는 건지 몰랐다.

원래 있었던 양심이라면 그것 때문인가 보다 하겠지만 흑주가 어디 양심 따위를 가진 존재던가.

구슬에 그런 걸 바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데도 결국 흑주는 혼자 떠나지 못한 채 툴툴거리며 새에게 다가갔다.

흑주가 새의 밑으로 파고들어 가 그대로 몸을 떠올리자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던 초승달 조각이 톡 떨어졌다.

‘…….’

흑주는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그놈의 진기.

꼭 흡수해야 하는 건 아니었는데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일이 이렇게 돼 버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거기에 정신만 팔리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새를 떠받치는 데 성공하면 조각이 떨어졌고 조각을 끼우고 다시 조심스럽게 새를 떠받치면…….

또 조각이 빠졌다.

흑주의 몸에 맺힌 습기가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이 사나워서 그런 건지 안쓰러워서 그런 건지 결국 새가 부리로 초승달 조각을 집었다.

흑주는 제 조각을 먹는 건가 해서 새의 얼굴 앞으로 확 날아가 조각을 내놓으라고 버텼고 새는 조각을 그냥 물기만 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조각은 자기가 가지고 있을 테니까 어서 가자는 건가 해서 흑주는 일단 새를 다시 둘러업고 아진을 쫓아갔다.

아진은 지금쯤 흑주가 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면서 흑주를 기다렸다.

흑주의 고집을 꺾어 놓으려고 시작한 일이라 이렇게 쉽게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아진이 기다리고 있을 때 별 희한한 광경이 그의 눈앞에 들어왔다.

새가 날아오는데 날갯짓을 하지도 않고 정말 편안하게 오고 있었던 것이다.

‘……? 뭐냐, 저건? 신법을 펼치고 있는 건가?’

아진은 멍하니 있다가 그 새의 머리에 있는 황금 관 무늬를 보았다.

‘저거. 전설의 영물이라는 전서응(傳書鷹)이랑 닮은 것 같은데? 그게 머리에 저런 무늬가 있다고 한 것 같았는데. 혹시 새끼인가?’

삼백여 년 전 강호에 한 획을 그었던 영웅이 전서응 한 마리를 길들였고 그 전서응은 마치 주인과 영혼의 교류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사라져도 반드시 찾아냈다고 했다.

사람보다 더 영민해서 주인의 심부름도 잘했고 전투에서 도움을 준 일도 많았다고 했는데 가장 큰 특징이 머리에 황금관 모양의 무늬가 있다는 거였다.

그러다가 그것이 가까워졌을 때, 아진은 마침내 그 기묘한 움직임의 이유를 파악했다.

새가 조금 더 위로 떠오르더니 그 아래에 있던 흑주가 나타났다.

“뭐야. 흑주야? 네가 주워 왔어?”

아진이 새를 안자 흑주가 할 말이 있는 듯 아진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면서 자기 좀 보라는 것처럼 자꾸 얼쩡거려서 봤더니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아진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흑주는 이제 새의 옆으로 날아갔다.

얘가 가지고 있는 게 내거니까 붙여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게 진작 말 좀 듣지. 너 때문에 기다리다 이게 뭐야. 폐하께서 걱정하면서 기다리실 텐데.”

아진은 그러면서 흑주의 조각을 채우고 마나를 불어넣어 원래의 모습대로 돌려주었다.

흑주는 이제 떨어지지 않는지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그제야 비로소 안심하는 것 같았다.

아진은 그 새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망설였다.

자기가 아는 그 전설적인 영물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새라면 분명히 주인이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얘는 왜 이렇게 맹해 보여. 흑주야?”

아진이 물었지만 흑주는 아는 바 없다는 듯이 딴청을 피웠다.

웬만했으면 주인이 찾도록 놔두고 갔을 텐데 가만 보니 혼자 날갯짓을 하지도 못하는 것 같고 정신이 멍하니 눈에 초점이 없는 게 근래 험한 일을 당한 듯했다.

가령, 자기는 잘 날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구슬과 부딪힌 것 같은 일?

그래도 일단은 황상에게 돌아가는 게 급하다는 생각으로 아진은 갈 길을 서둘렀고 그렇게 그는 생각지도 못한 영물 하나를 주웠다.

* * *

황제는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들의 욕심 때문에 죽어야 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지만 어쩌면 이것이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빨리 알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혼란 속에서 사람들이 각자 어떻게 처신을 하는지 보고 충신과 간신을 가려내겠다고 했다.

아진이 북궁세가에 찾아가 그곳에 있던 이들에게 황상이 살아났다는 사실을 말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태자와 황후라면 그런 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찾아 엄벌에 처하며 자신들의 체제를 공고히 하려 할 수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해를 입게 될 것에 대비해 곳곳에 사람들을 배치해 두었는데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흑암단이라 불리며 조용한 지지를 받았다.

“아진아. 너는 이 일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느냐.”

황제는 초조한 기색을 애써 감추면서 말했다.

아진은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그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황제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지금, 사람들의 솔직한 마음이 드러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제까지 살아 왔던 삶에 평가를 받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지 않은지요. 그래도 너무 오래 이 상태를 방치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황후 마마는 황자 전하들을 먼저 핍박할 것입니다. 말이 핍박이지.”

“죽이려 하겠지.”

아진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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