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9화
359화
비고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아진과 마선, 뇌혈검이었다.
마선이 들어간 것은 독각화망의 갑작스러운 공격에서 아진을 지켜 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뇌혈검은 비고를 지키는 자로서 들어가기는 했는데 독각화망 때문에 그 역시 긴장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독각화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영물들은 비고의 안쪽에 머뭅니다. 그곳에서 각자 자기들의 영역을 만들어서 살지요.”
아진이 묻자 뇌혈검이 조용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독각화망이 자신들의 기척을 알아차릴까 봐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독각화망은 다른 영물들을 잡아먹는다고 들었는데 영물들이 무사할지 모르겠습니다.”
“…….”
뇌혈검은 그래도 설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른 것들도 영물인데 잡아먹혔겠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진은 전에 왔을 때 느껴지던 기운이 큰 폭으로 변한 것을 깨달았고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아진이 서두르며 비고 안쪽으로 내달리는 것을 보며 마선과 뇌혈검도 뒤따랐다.
그 순간에도 우드득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고통에 찬 비명을 터뜨렸던 것이다.
마선은 바람으로 변해 아진의 뒤를 따랐다.
아무리 그래도 전력을 다한다면 자신이 아진에게 뒤처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어느덧 호승심을 불태운 그였지만 그는 결국 아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가 동굴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을 때 아진은 벌써 독각화망에게 이르렀던 것이다.
뇌혈검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력을 끌어올렸는데도 두 사람을 놓쳤다.
이러다가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뇌혈검이 동굴 끝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는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희한했다.
독각화망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것 같았고 몸을 휘휘 감았다.
무언가를 으스러뜨리려고 그런 것 같았는데 정작 그 안은 비어 있었다.
그것이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제 꼬리를 물려고 빙글빙글 도는 강아지 같았다.
아진을 노리고 몸을 날려 칭칭 감아 조이려고 하면 안에서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한 줄기의 바람으로 변해 버린 아진은 매번 사라졌다.
독각화망이 화가 나서 독을 분사해도 아진은 독이 닿지 않는 곳으로 훌쩍 사라졌다.
다른 영물들은 자기들이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압도적인 두 존재의 앞에서 숨소리마저 죽이고 있었다.
마선은 섣불리 나서지 못한 채 싸움을 관망하고 있었다.
아진은 독각화망의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을 깨닫고 놈의 뿔 위에 올라탔다.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그는 독각화망을 채운산으로 데려가야 했다.
그것도 무사하게.
랑랑에게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지 모르는데 독각화망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시간이 걸렸다.
“교룡의 힘줄입니다. 이걸로 놈의 주둥이를 묶으십시오!”
때마침 뇌혈검이 굵은 밧줄 같은 것을 던져 주며 외쳤고 아진은 한 손으로 그것을 받은 채 독각화망의 머리를 칭칭 감았다.
독각화망은 더 이상 독아를 드러내지 못하게 됐고 미친 듯 몸부림을 쳐 댔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커다란 몸을 부풀려 동굴 벽을 이리저리 때려 댔지만 아진에게는 어떤 충격도 전해지지 않았다.
아진은 독각화망이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 기다렸다.
놈은 끈질겼고 이제야말로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마다 다시 몸부림을 쳤다.
“나는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너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네가 얌전하게 함께 가 주면 좋겠어.”
그러나 독각화망은 아진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 않았고 아진을 노리며 독을 뿜어댔다.
그때마다 동굴 벽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다.
아진은 말로만 듣던 독각화망의 독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위력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이러다가 비고가 뚫려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마선이 그렇게 말을 할 정도였지만 그도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마선도 비고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었고 비고의 내부가 수시로 그 크기와 형태를 바꾼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슬슬 고집을 꺾는 게 좋을 거다. 독각화망.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너를 다치게 할 수밖에 없어.”
아진의 말에도 독각화망은 더욱 날뛰었다.
그러던 독각화망은 갑자기 몸 아래의 흙바닥이 푹 꺼져 버리자 그대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몸을 길게 뻗어 머리 부분에 힘을 주고 제 몸통을 끌어냈다.
독각화망이 그런 식으로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진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다른 놈들 같았다면 이미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도 남았을 텐데 이놈은 그럴 손과 발이 없어서 그런 건지 꽤나 집요하게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버티나 보자.”
아진이 허공에 손을 휘젓자 독각화망이 있던 곳이 다시 푹 꺼졌다.
독각화망은 지루한 공격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좀 전과 같은 방식으로 빠져나오려 했지만 독각화망이 머리를 댄 곳이 힘을 받쳐 주지 못하고 푹 꺼져 버리자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깜짝 놀란 독각화망이 다른 곳에 머리를 대고 거기에 지지한 채 몸통을 끌어내려 했지만 이번에도 그 아래의 흙더미가 힘없이 무너졌다.
결국 독각화망은 지지기반을 찾지 못한 채 계속 빨려들어 갔다.
그러나 동굴 천장에서 내려온 종유석을 발견하고 독각화망이 순식간에 솟구쳐 올라 그곳에 몸을 감았다.
그러다가 바닥이 단단하게 다져진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독각화망은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왔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다시 아진을 향해 공격을 쏟아냈다.
생각 같아서는 이빨을 박아 넣고 독아의 힘을 보여 주고 싶은 것 같았는데 아무리 해도 아진을 붙잡을 수가 없자 아진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독을 분사했다.
치이이익-.
치이이익-.
동굴 벽이 녹아내리고 거기에 휩쓸린 종유석이 바닥에 떨어져 박히며 곳곳을 파헤쳤다.
뇌혈검과 마선은 완전히 물러서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기만 했다.
순간마다 싸움의 양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어 버려서 합격은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부지불식간에 독각화망의 독에 녹아 버리겠다고 생각하며 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화가 나면 독이 더 강해지는 것인지 쉭쉭 소리를 내면서 독각화망이 전보다 독성이 훨씬 강해진 독을 사방에 뿌렸다.
아진은 한동안 독각화망에게 밀리는 것 같더니 종유석 뒤쪽에서 독각화망을 기다렸다.
독각화망은 아진이 슬슬 지쳐 간다고 생각했는지 그 자리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독을 분사했다.
놈의 독이 종유석에 닿자 종유석이 창처럼 바닥으로 쏟아졌다.
아진이 죽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던 독각화망은 갑자기 불어온 엄청난 바람에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동굴 안에서 웬 바람인가 하고 이상해할 틈도 없이 독각화망은 동굴의 한가운데로 밀려 나갔고 제 몸을 향해 떨어지는 종유석을 보았다.
피하려고 했지만 몸통이 아진에게 꽉 눌려버리는 바람에 꼼짝없이 종유석의 날카로운 첨단에 찔려 버렸다.
웬만한 검으로는 뚫을 수도 없다는 몸이었지만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비고의 독기를 머금은 종유석의 첨단에는 독각화망도 버틸 재간이 없었던 듯했고 제 몸이 꿰뚫린 것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 이제 너도 뭘 좀 깨달은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진이 그렇게 말하면서 종유석을 빼내자 독각화망은 몸부림치는 것도 잊은 채 제 상처를 바라보았다.
고통을 기꺼워하는 존재가 얼마나 있을까.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독각화망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뱀이라서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그저 서럽기만 했다.
더군다나 독각화망은 지금까지 다쳐 본 적도 없었다.
누가 저에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었을까.
독각화망이 풀 죽은 눈으로 제 상처를 바라보고 있을 때 아진이 독각화망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독각화망의 상처에 손을 댔다.
독각화망은 자신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줄지 겁을 냈지만 희한하게도 시원한 기운이 상처를 통해 몸속으로 전해졌다.
……??
상처가 아무는 것이 독각화망의 눈에도 확연하게 보였다.
“이렇게 만든 건 미안하다.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어. 알았지?”
독각화망은 그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승부는 나온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처가 완전히 사라졌다.
독각화망은 조금씩 몸을 움직여 보았다.
이리저리 뒤틀어 보고 과격하게 움직여 봐도 아프지 않았다.
“독각화망이 이제야말로 임자를 만난 것 같군.”
그때까지 조용히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마선이 호쾌하게 웃으며 말하자 아진도 따라 웃었다.
“가자. 너를 기다리는 아이가 있어. 너도 좋아하게 될 거야.”
그 말이 별로 믿기지는 않았지만 독각화망은 아진을 따라나섰다.
이런 비고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다.
독각화망과 함께 나서면서 아진은 랑랑이 독각화망의 진짜 주인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비고에 있던 독물들이 모두 죽었겠습니다.”
뇌혈검의 말에 마선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독각화망을 데려가는데 우리가 고맙다고 말해야 할 판이군.”
아진도 그 말을 듣게 돼서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아서였다.
* * *
독각화망은 어렵지 않게 하늘을 날았다.
원래는 그러지 못했지만 쓸 만한 인간의 도움을 받으니 하늘을 나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다.
그때 누군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면 고운 비단이 바람에 날려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때마침 하늘을 올려다본 역천마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하며 린린을 불렀다.
“주군. 저게 뭘까요?”
고개를 든 린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여간 평범하게는 올 수가 없는 모양이야.”
그렇게 말한 린린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표정이 지어졌다.
“설마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건 아니겠지요. 주군?”
“독각화망이 맞는 것 같은데? 역천마의. 그럼 이제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은 거의 다 끝이 난 거지? 역천마의도 신교를 너무 오래 비워 두면 안 되니까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해.”
“너무 하세요. 주군. 저는 주군을 오랜만에 뵈어서 너무 감격스러운데.”
“역천마의. 내가 역천마의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지? 나는 역천마의가 신교에 없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신교를 비우고도 이렇게 안심할 수 있는 건 다 역천마의 때문이잖아. 마선님께만 신교를 맡기면 힘들다고 도망가실지도 몰라.”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그런 말을 잘도 하는 린린을 보면서 역천마의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을까 했다.
그래도 역천마의는 지금의 주군이 좋았다.
늘 물 위에 떠 있는 부초처럼 아무 열정도 느껴지지 않던 주군이었는데 이제는 달랐다.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정확히 아는 것 같았고 정확하게 중심을 잡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 것 같아서 역천마의는 그것이 가장 좋았다.
“다른 건 더 필요한 것 없으세요?”
“필요한 게 생각나면 제일조를 보낼게.”
“네. 주군.”
역천마의는 랑랑에게 다가갔다.
“랑랑. 무섭지는 않지?”
랑랑은 귀여운 얼굴을 끄덕였다.
“네. 숙부님도 계시고 고모님도 계시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두 분이 옆에 계시니까 안 무서워요.”
“그래. 너는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아이 중에 하나일 거야. 그러니까 지금 당장 힘든 일이 있다고 해도 참아 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누구보다 강해져서 주군을 잘 보살펴 드려.”
“네.”
랑랑이 또랑또랑하게 말하자 역천마의가 흐뭇해하며 랑랑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은 자기가 랑랑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지만 나중에는 감히 얼굴을 마주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웅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여간 산본의가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훗날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