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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65화 (365/470)

제365화

365화

“반갑긴 한데 너무 과격하다. 그런데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여기에도 던전이 생긴 거야? 던전도 없이 여기에 나타난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에게 돌진한 괴수는 온몸이 불타는 것 같은 들소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진은 딱 한 번 그런 괴수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당연히 던전에서 나왔고 던전 곳곳에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아진은 지금 이곳이 던전이 아니라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할지 불리할지 생각했는데 그 답은 곧 나왔다.

이곳에서는 던전이라는 한계 없이 모든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던 것이다.

그 불은 나무를 태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공할 열기로 거기에 닿는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녹여 버렸다.

아진도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몇 번이나 뒤로 물러나야 했는데 괴수는 그때마다 아진을 쫓아왔다.

갑자기 아진이 서 있던 곳 아래에서 불길이 치솟았을 때 아진은 자연지기를 사용해 바람으로 변하여 하늘로 높이 솟구쳤다.

‘그때 이놈을 어떻게 죽였더라?’

아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때 그의 옆에서 같이 싸우던 동료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누군가 괴수를 향해 화살을 날렸었고 괴수가 잠시 멈칫하는 순간을 노려 아진이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불길이 커지면서 괴수의 몸도 같이 커졌는데 서로들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달아 공격을 퍼부었었다.

‘그렇게 싸우다 끝났던 것 같은데.’

유효한 공격이 들어가고 괴수에게 피해를 주면 그것이 쌓여서 괴수가 쓰러졌다.

그것은 약속이나 규칙 같았다.

그 규칙이 이번에도 동일하게 적용될지 아진은 알지 못했다.

‘일단 여기에는 같이 싸울 동료가 없고.’

생각을 마친 아진은 자연지기를 움직였다.

바람과 흙으로 변하는 것은 쉬웠지만 물이나 얼음으로 변하는 것은 영 어설펐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저절로 자신에게 편한 대로 몸이 움직여서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가끔은 불편해도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었다.

‘지금처럼.’

그는 마선이 가르쳐 주었던 구결을 떠올렸다.

얼음이 되기 위한 구결이었다.

마선이 아진에게 그것을 가르쳐줄 때 린린이 곁에서 마선에게 물었었다.

“선배님도 얼음으로 변할 수 있으세요?”

“하지 못한다.”

“왜요?”

“잘 안 되어서 그런다.”

“오라버니는 할 수 있을까요?”

“그거야 봐야 알겠지.”

퉁명스럽게 말하던 마선은 아진이 얼음으로 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자 조금 다행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었다.

그 생각을 하던 아진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이렇게 하는 거였네.’

구결을 외우고 아진이 괴수를 향해 빠르게 몸을 던졌다.

불과 얼음의 싸움.

어떤 것이 사라질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진은 이 자리에서 질 생각이 없다는 거였다.

아진은 자신이 가진 공력을 자연지기로 전환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선은 대기 중의 자연지기를 그대로 이용해 사용하는 것이 더 정순하고 위력이 강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아진은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위력을 강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예상치 못했던 깨달음이 얻어지기도 하는 법이었다.

그때의 아진이 그랬다.

그는 공력을 끌어서 전환하는 대신 그곳에 있는 자연지기를 끌어 사용했다.

그동안 대성한 심법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진의 몸이 물이 되었고 그가 멈추지 않은 채 괴수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단단한 얼음으로 변했다.

얼음이 녹건, 불이 꺼지건 둘 중 하나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할 판국에 아진은 거침없이 괴수의 몸 위로 제 몸을 덮었다.

지지지지직-.

물이 고였다.

얼음이 녹는 것 같았지만 상황은 빠르게 변했다.

잿빛 연기가 주위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지지직-.

소리는 갈수록 더 요란해졌다.

괴수는 자신이 위험해졌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주위에 치솟아 타오르던 불기둥이 사라지고 그 열기가 괴수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열기가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상황을 바꾸지는 못했고 다시 불꽃이 피어나려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라졌다.

마침내 열기는 완전히 사라졌고 괴수의 형체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괴수를 없앤 것은 처음이었다.

아진은 기감을 펼쳐서 주위에 다른 것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아진은 그대로 바람이 되어 주위를 맴돌았다.

그렇게 한참을 날며 샅샅이 수색을 했지만 괴수가 기척을 완전히 감추기라도 한 것인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황제는 아침 일찍 나타난 아진을 보고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대로 불안하지만 자주 보이면 자주 보이는 대로 불안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찍 웬일이냐. 아진아. 설마 벌써 토벌에 성공하고 왔다는 것은 아니고.”

“급히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

황제는 아진의 진지한 표정을 보면서 마음의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좋지 않은 소식이냐.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더냐. 네 힘으로도 할 수 없을 것 같더냐.”

“그것은 아닙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마냥 낙관적으로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폐하께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말해 보아라.”

황제는 심호흡을 하고 아진을 바라보았다

“폐하. 소신이 말씀드렸던 것. 그 괴수가 나타났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황제는 뭔가 떠오르고 이해가 될 것도 같았지만 그것을 억지로 부정하고 싶어 하며 말했다.

설마하니 아진이 살던 곳에서 나타났다던 그것들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아진에게서 종종 그곳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때마다 상상되던 것은 늘 멸망해 가는 최후의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여기에 나타난다는 말인가.

“그것을…… 만났느냐. 혹시 사람들이 요괴라고 했던 것이 그것인 것 같더냐.”

“그게 사람들이 요괴라고 말하던 그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소신이 보았던 괴수들인 것은 확실합니다.”

“네가 싸웠던 것들이 나타난 것이냐.”

“그렇습니다. 폐하.”

황제에게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게……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 같으냐. 네가 살던 곳에서는 어땠느냐. 아진아.”

황제는 어떻게든 침착하려고 애쓰며 말했고 아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답을 해 주었다.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는 일단 그것이 한 번 나타난 이후에 계속해서 나타났고, 그곳에서 나타난 괴수들은 점점 더 공략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하자 황제의 얼굴에 침통한 빛이 흘렀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초기에 나타난 괴수가 이렇게 강할 수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신의 세계에서는 괴수가 나타난 것과 거의 동시에 그 괴수를 사냥하는 자들도 나타났습니다.”

“그래. 그렇다고 했지. 그리고 그들 중 네가 가장 강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 아진이 너는 여기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사람들은 이미 차고도 넘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폐하.”

“무인들이 괴수들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소신의 생각에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괴수라는 것들이 다음에 어디에서 나타나는지는 어떻게 알아내야 하느냐.”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소신이 있던 곳에서 그것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만 여기에서도 그런 식으로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황제는 왜냐고 물었고 아진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 규칙이 이곳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거라고 확신할 수 없어서라고.

“아진아. 너는 그 일이 여기에서도 벌어질 것 같으냐. 아니면 일시적으로 일어난 일일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진은 황제가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면서 그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많은 무인들이 괴수들과 싸울 능력을 개발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하던 아진은 관군들이 전멸당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자기가 만난 그 괴수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무인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은 그 어떤 때보다 더 큰 위기에 처한 것 같구나.”

아진은 황제의 말이야말로 맞는 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 * *

그 후로 한동안, 요괴가 나타난다는 소문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을 놓지 않았고 요괴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던 곳으로는 지나가지도 않았다.

향화문에서도 요괴에 대한 소문이 나면 다른 것보다 우선해서 그 진위 여부를 파악했지만 요괴에 대한 소문은 거의 없었다.

간혹 헛소문이 퍼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황제가 명을 내려 괴소문을 단속했다.

실제로 요괴가 나타나는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한데 영수가 나타난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서 요괴가 나타난다는 헛소문을 내는 일이 종종 생겨서였다.

황제가 나름의 방법을 강구하는 동안 아진은 그 문제에 대해 위도와 얘기를 나누기 위해 우선 산본으로 돌아갔다.

산본에도 그가 요괴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진은 위도가 그 소식을 듣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몇몇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린린과 위도였다.

아진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린린이 먼저 그에게 다가왔다.

“오라버니. 큰일 났어.”

그리고 린린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그간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한동안 하늘을 보지 않던 벽예월이 천기를 읽었고 위도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냈다는 말에 아진은 놀란 얼굴로 린린을 보았다.

“위도 형님에게도 그 얘기를 했어?”

“응. 위도 오라버니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 아버지랑 큰오라버니에게도 말을 했고 소청이랑 다른 사람들도 알아. 위도 오라버니가 공격을 당한다고 할 때 직접 나서야 할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

“왜 나한테는 진작 말을 안 했어?”

“오라버니도 중요한 일을 하고 있고 이곳의 일은 우리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아진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린린의 얼굴을 보자, 정말 아진을 걱정해서 말하지 않은 게 확실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서남에 괴수가 나타난 사건은 어쩌다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을 이곳에 보낸 존재가 무언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일을 꾸미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예월 언니가 그러는데 그자들이 매 순간 강해지고 있대. 그자들은 이미 이곳에 넘어와 있는데 그자들을 보낸 존재가 그들을 강하게 만들고 있대. 오라버니보다도 강해졌대. 그건 말도 안 되는데.”

린린은 억울한 것 같았다.

아진은 벽예월이 하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믿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가서 직접 얘기를 들어 봐야겠어.”

린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가 위도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했다.

아진이 벽예월을 찾았을 때 그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언덕에 서 있었다.

산본의가의 총관으로 모든 사업을 총괄하고 있던 벽예월이 그렇게 한가하게 있는 모습을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오고 그렇게 쉴 수 있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을까 할 정도였다.

“벽 소저.”

아진이 다가가자 벽예월이 그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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