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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77화 (377/470)

제377화

377화

어차피 남아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진은 그림자 용이 피를 전부 흡수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사람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깊은 탈력감이 느껴졌다.

“너는 저자들을 잘 감시해, 린린. 갑자기 공격을 하려고 하면 그때는 지체하지 말고 죽여.”

“응. 그런 건 정말 잘할 수 있어.”

갑자기 공격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죽이고 싶어 하는 린린을 보면서 아진이 피식 웃었다.

피를 흡수하고 난 그림자 용은 조금 더 활동적으로 움직였다.

아진은 벽을 한 번 바라보다가 제 검으로 벽을 찔러보았다.

내공을 밀어 넣지 않았을 때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은씨세가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내공의 수준이 대단치 않았기에 아진은 그들이 설마하니 검기를 씌워서 그림자 용에게 자신들의 피를 준 것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일단 검기를 씌워 다시 시도해 보았는데 이번에도 검은 가볍게 튕겨 나가고 말았다.

만약 그것이 곤오철로 만든 검이 아니었다면 끝이 부러져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내가 해 볼까?”

린린은 아진이 벽에 검을 박아 넣으려고 하다가 번번이 실패하는 것을 보고 신이 난 듯이 물었다.

아진이 못한 것을 자기가 성공해 냈을 때의 그 엄청난 희열을 느낄 기회가 온 것 같다며 좋아하는 린린을 보고 아진은 피식 웃었다.

강기를 덧입히면 간단하게 벽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귀여운 동생에게 그 정도 기쁨을 주는 게 대수겠냐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린린이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몸 주위에 거대한 마기가 일렁였다.

엄청난 기세였다.

린린은 잘 보라는 듯이 아진을 한 번 바라보고 피식 웃더니 그대로 벽에 검을 밀어 넣었다.

아니.

밀어 넣으려고 했다.

“……!”

린린의 입이 옆으로 길게 벌어졌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찌릿한 고통이 손목을 타고 어깨까지 번져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 죽일 놈의 그림자가!!”

린린은 열이 받은 듯 검에 공력을 한껏 불어넣었다.

그리고 동굴 따위야 날아가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이 검을 휘둘렀다.

‘이런 무식한……!’

아진이 린린을 말릴 틈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린린의 패배였다.

벽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림자 용은 우습지도 않다는 듯이 벽을 유영했다.

단순히 벽뿐만 아니라 천장까지도 오가는 용은 린린을 한껏 비웃는 것 같았다.

린린은 원래 몸으로 웃기는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이 순간만큼은 그런 역할로 굳어버린 듯했다.

“죽어. 죽어. 죽어버려!!”

강기가 몽글몽글 피어났지만 그때마다 벽과 부딪혀서 불꽃과 폭음이 터지기만 할 뿐 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각쯤 지나자 만신창이가 된 린린이 헉헉거리면서 제 검을 들고 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나 창피할까.’

아진은 린린을 위로해 주고 싶은 것과 동시에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웃지 마. 오라버니. 이 벽. 이상해. 정말 이상해. 내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사술인 것 같아.”

린린은 어쨌든 자기 잘못은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은씨세가 사람들도 멀쩡히 잘만 꽂아 넣는 검이 들어가지 않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림자 용은 유유히 떠돌아다녔고 이제는 슬슬 기회도 엿보는 것 같았다.

“그림자 용이 벽 밖으로 나오기도 합니까?”

아진이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진은 그들이 협조하지 않으려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그림자 용의 눈치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림자 용의 움직임은 처음에 비해 훨씬 더 빨라졌다.

그리고 가끔씩 위협적으로 굴기도 했다.

“우리가 직접 알아내면 되잖아.”

린린은 아직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듯이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는 벽에 검을 꽂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게 아니라 직접 그림자 용을 노리고 공격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벽이 그림자 용을 지키는 강력한 결계라도 되는 것처럼 검 끝은 그림자 용을 상하게 하지 못했다.

“흐우우우우우우!!”

린린은 드디어 폭발한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림자 용은 반드시 제 손으로 끝내고 말겠다는 듯이 그 앞에 서서 천마공의 초식을 펼쳐 일격을 가했다.

이제는 정말 앞뒤 안 따지는구나 하면서 아진이 기함하기도 전에 린린의 검에서 엄청난 강기가 날아가 벽을 때렸지만 그것이 한 일은 벽을 흔든 것이 전부였다.

“린린. 이제 진정 좀 해. 안 되잖아. 안 되는데도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거 엄청나게 추한 짓이다.”

아진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 그림자 용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벽 전체와 천장까지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그림자 용의 궤적에는 정해진 규칙이 있었다.

아진은 그것을 미리 봐두었다가 그림자 용이 없는 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공력을 팔 할까지 끌어 올렸다.

요 근래 그렇게까지 전력을 다해 본 적이 있었을까 할 정도였는데 거기에서 멈추지 않은 채 공력을 더욱 끌어 올렸다.

린린은 벽 앞에서 아진이 오래 시간을 끄는 것을 보고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아진의 팔 전체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력한 기운이 맺히는 바람에 그의 팔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아진은 그때부터 검에 순간적으로 공력을 밀어 넣었다.

기수식을 취하는 것도 없이 그의 검이 곧바로 벽으로 들어갔다.

은씨세가의 누구도. 심지어 그림자 용조차도 벽이 그렇게 간단히 부서질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누구의 충격도 린린이 받은 것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린린은 멍한 표정으로 벽을 보았다.

그러면 자기는 뭐가 되냐고 생각하며 망연자실한 것 같았다.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너랑 이 오라버니는 존재 자체가 다를 뿐이야. 그래도 너는 범인 중에서는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잖아. 거기에 만족할 줄도 알아야지.”

아직 벽에서 검을 빼지도 않은 채 아진이 그렇게 말했을 때 린린은 기가 차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아진이 성공한 것이 기쁘기는 했다.

그림자 용이 사람을 차별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많이 나쁘기는 하지만 나중에 아진에게 물어봐서 어떻게 하는 건지 배우면 도움이 될 터였다.

아진은 검을 빼지 않은 채 강기를 밀어 넣었다.

벽을 타고 강기가 들어가며 터졌지만 도중에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자 용은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놀라며 제가 가진 힘을 사용해 강력한 결계를 만들어 내는 듯했다.

강한 반발력이 전해지는 바람에 아진은 검을 서둘러 빼내야 했다.

검을 뺐을 때 아진은 내기가 진탕될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미있네.’

아진은 그림자 용을 바라보았다.

놈도 더 이상 전처럼 느긋하게 움직이지는 못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이제는 그림자 용도 아진을 경계했다.

“기분 나빠. 확실히.”

아진은 그림자 용을 보면서 뭔가를 떠올리려고 애쓰다가 그것이 천마신교에서 봤던 비고의 사념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강한 집념.

사라진 몸.

자신에게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 그림자 용이 어떤 짓을 할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죽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죽인다.’

아진의 의지가 읽혔는지 그림자 용이 조금씩 급하게 굴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벽 안쪽에서 굉음이 일었다.

내내 벽과 천장을 유영하듯이 움직이던 그림자 용이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식.’

아진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거였다.

은씨세가 사람들은 이지를 거의 잃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동굴에 와서 그들을 봤을 때만 해도 그런 모습은 아니었는데 그림자 용에게 피를 주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저자들의 몸을 통해서만 밖으로 나올 수가 있는 거겠지.’

사념은 몸을 필요로 하고 그림자 용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며 아진이 린린을 바라보았다.

“린린. 저자들을 동굴 밖으로 데려가고 동굴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

“응.”

린린은 아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들은 듯했다.

사도련주가 만들었던 충독이 숙주를 찾아 제힘을 키우고 괴력을 행사했던 것처럼 그림자 용에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숙주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가라. 여기에 있으면 죽이겠다.”

린린이 곧장 은씨세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지만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림자 용과 어떤 식으로 연결이 돼 있는지는 모르지만 놈의 조종을 받고 있는 듯했다.

린린은 그림자 용에게 받은 상처를 그들에게 풀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검기를 날렸고 그 때문에 은씨세가 사람들의 몸에 순식간에 수많은 검상이 생겨났다.

알싸한 통증이 그들의 정신을 조금은 돌아오게 한 것 같았는데 린린은 그 후로도 멈추지 않았다.

그냥 단순히 겁만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작정을 하고 죽이려 하는 것 같은 린린을 보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속도는 아니었는지 린린은 한 번 더 강한 검격을 날렸고 그들은 비명까지 지르면서 동굴 입구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림자 용은 상황이 저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듯 한쪽 벽을 향해 급하게 치달았다.

그림자 용의 머리 부분이 그곳에 부딪칠 때 아진은 잔뜩 집중하고 그림자 용을 주시했다.

잘못하다가는 그림자 용을 돕기만 하는 꼴이 되겠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신중하게 기다렸다.

그림자 용은 몇 번이나 거듭해서 같은 곳에 머리를 부딪쳤고 그때마다 맹렬한 폭음이 일었다.

“린린. 이제부터는 아이들 곁을 떠나지 마.”

“……응.”

린린은 아진을 돕고 싶었겠지만 아이들을 지키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듯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내 모습을 드러낸 소청과 랑랑은 자기들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청아. 랑랑을 데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라. 여기는 위험해질 수도 있다. 동굴이 무너질 수도 있어.”

“무너지는 동굴에서 탈출하는 건 어렵지도 않아요. 천장을 뚫고 위로 솟구치면 되잖아요. 랑랑은 제가 책임지고 지킬게요. 스승님. 동굴 입구 쪽에 저희 친척들이 있어서 오히려 그곳이 더 위험할 거예요.”

지금은 소청과 그 문제를 두고 길게 얘기를 할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소청이 한 말 중에 반박할 부분이 많지도 않았다.

흑주가 계속 소청을 막았다면 모르겠지만 이제는 흑주도 포기한 것 같았다.

겁이 나면 너는 여기에 있으라고 소청이 흑주를 꺼내 놓고 오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독각화망도 비슷한 협박을 받고 이곳에 다시 들어온 것 같았는데 흑주와 독각화망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나가자고 고집을 부리지는 못했다.

그림자 용이 쿵쿵 머리를 박으며 벽에서 빠져나오려고 할 때 흑주와 독각화망의 공포는 극에 달하는 것 같았지만 이제는 거기에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이 없었다.

“스승님. 그림자 용이 나오기 전에 제가 공격을 해 봐도 돼요? 지금은 벽에 갇혀 있어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잖아요.”

소청의 말에 린린이 움찔하는 것 같았다.

자기는 벽에 검을 박아 넣지 못했는데 소청이 성공하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긴장하는 것 같았다.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아진이 말하자 소청이 순식간에 검을 빼 들었다.

언제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출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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