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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96화 (396/470)

제396화

396화

“도종아. 목 탈 텐데 너는 차나 마시렴.”

결국 가모가 역할 분담에 나섰고 도종은 자기도 재미있게 얘기할 수 있었는데 아깝다며 아쉬워했다.

“정말 엄청났어요. 그때 사용한 건 나무를 이용하는 자연지기 같았는데 나는 안전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소름 끼치게 무섭더라고요. 생각해 보세요. 허허벌판에 그냥 서 있는 메마른 나무는 그 자체만으로도 좀 무섭기는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갑자기 움직였다니까요?”

연월랑이 말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도종을 바라보았다.

다 믿어도 되는 거냐는 듯이.

그러면 도종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진짜 엄청났어요. 그런데 북혈마제 쪽 사람들은 정말 멍청하더라고요. 그 정도 봤으면 답이 나오는 것 아니냐고요. 거기에서 뭘 더 버티는 건지. 그렇게 해서 몇 사람이 더 죽었죠. 안 죽었어도 됐을 텐데.”

“어떻게 죽었는데요?”

사람들은 아진의 활약을 다시 듣고 싶어 했고 연월랑이 다시 그 일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었다.

“북혈마제가 도망치는데 저는 그때 공자님을 보면서 정말 놀랐어요. 만약에 그때 북혈마제를 공자님이 죽이셨으면 분위기가 나빠졌을 거거든요.”

“그래요?”

도종은 그 자리에 분명히 같이 있었고 같은 것을 봤지만 그런 것까지 깨닫지는 못한 듯했다.

“그 사람들이 워낙 그런 유대감이랑 결속력이 강하기는 해요. 성격 자체는 거친데 남다른 그런 끈적끈적한 그게 있어요.”

사람들은 신기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아. 정말 그걸 노리고 북혈마제를 놔준 거야?”

가주가 묻자 아진이 쑥스러운 듯이 웃었다.

“노림수가 있기는 했죠. 자기들의 주군이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도망치는 걸 직접 보면 그 사람들도 생각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고요. 북혈마제를 위해서 복수하자는 마음이 생기면 갑자기 결속되잖아요. 그러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숫자가 더 늘어날 거고요.”

그러자 린린이 신기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는 그런 것도 생각하면서 죽이는구나. 나였으면 ‘기회는 이때다!’ 하고 그냥 다 죽였을 텐데.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흑주한테 사랑을 못 받는 거야. 그렇지. 흑주야?”

그러자 흑주가 뭘 좀 안다는 듯이 린린의 주위를 맴돌았다.

연월랑은 다시 중계를 이어 나갔고 아진은 흑주를 주의 깊게 보다가 손을 뻗었다.

“흑주 너 이리 좀 와 봐. 이게 뭐냐? 뭐가 묻은 거야?”

사람들이 연월랑의 얘기를 열심히 듣고 있는 참이라 최대한 목소리를 줄여서 말했는데 아진의 말에 흑주가 둥둥 떠서 아진에게 다가갔다.

흑주도 그냥 제 몸에 뭔가 묻었다고 생각한 것 같았는데 아진은 그게 흑주의 안에서 비치는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그림자 용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형체는 훨씬 작아져서 커다란 지네 정도로 보였지만 동굴 벽에서 봤던 그림자 용을 기억하는 아진은 그게 뭔지 분명히 알아보았다.

“이거 그림자 용 맞지?”

아진이 린린에게 작은 소리로 묻자 린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 없어지더라고? 며칠 동안 속이 불편한 것 같더니 그게 둘이 싸우는 과정이었나 봐. 처음에는 막상막하였는데 결국에 흑주가 이기더라고.”

“그랬어? 장하네?”

아진이 흑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흑주가 자랑스러움을 뿜어댔다.

“만약에 그럴 필요가 있게 되면 그림자 용이 흑주한테서 나와서 우리를 위해서 싸울 수도 있을까?”

“그림자 용이?”

린린은 그림자 용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고 아진도 반신반의하기는 했지만 흑주의 안에 얌전히 갇혀 있는 모습을 보자 기대감이 생기기는 했다.

아진은 내친김에 흑주의 안에 마나를 밀어 넣어 보았다.

한동안 마나는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림자 용은 아진의 마나가 불편한 듯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것을 피하려 했다.

아진도 더는 그림자 용을 괴롭히지 않고 마나를 거두었다.

자기가 그림자 용을 확실히 통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흑주도 그런 듯했다.

아진은 흑주를 한 손으로 감싸고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듯이 만져 주었는데 생각할수록 기특했다.

다른 때도 물론 도움이 많이 됐지만 이제는 제 몸속에 그림자 용까지 품고 있어서 공격력도 엄청나게 높아질 것 같아 자꾸 웃음이 나왔다.

‘다음에 싸울 일이 생기면 흑주를 데리고 가 봐야겠네.’

연월랑의 이야기는 그 후로도 한동안 멈출 줄을 몰랐고 아진은 벅찬 감격과 자랑스러움을 눈에 담은 사람들을 보며 혼자 웃음을 지었다.

돌아왔다는 생각에 끝 모를 안도감이 그를 다독였다.

오늘은 뒤척이지도 않고 아주 오래 잘 잘 것 같았다.

* * *

‘여기가 전에도 이랬던가?’

태혈령은 몇 번이나 길을 잃고 헤맸다.

산본의가를 자주 찾아온 사람들은 야산을 개간한 것 때문에 길이 헷갈려 그 뒤로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고 대개는 그렇게 한 번 돌아갔다 오면 바로 길을 찾았다.

그러나 태혈령은 사정이 달랐다.

산본의가에 온 것은 이십여 년 전 오래된 기억 속에서 단 한 번이었다.

특별히 산본의가를 염두에 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때까지 그곳을 알지도 못했다.

서종욱의 명성에 기대서 그곳을 찾은 것도 아니었다.

“말 좀 묻겠어요.”

태혈령은 결국 스스로 찾는 것을 포기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은 화폭에서 나온 것 같은 여인을 보고 자기들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예. 얼마든지요.”

아무리 잘 쳐줘도 이십 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였는데 함부로 볼 수가 없는 권위가 물씬 풍겼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부리는 일을 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위압감이 대단했다.

그래서 그녀의 미색을 보면서 감탄하던 마음은 순식간에 달아났다.

딱 한 번 얼굴을 보고 그들은 저절로 고개를 떨구었다.

이런 사람과 잘못 엮이면 아주 골치 아파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산본의가라는 곳이 어디에 있는지 아나요? 오래전에 지나가다 본 거라서 지금은 없어졌을 것 같기도 한데.”

그러자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산본의가가 없어져요? 도대체 어디에서 살다가 오신 거요? 이 나라 사람이 맞기는 한 겁니까? 산본의가를 모르다니 기가 막히네.”

그들은 희한하게 산본의가에 몰입했고 태혈령의 말을 들으며 자기들이 무시당한 것처럼 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산본의가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났던 것이다.

“왜 그러는 거죠? 그런 의가는 모를 수도 있는 거지.”

태혈령은 자기가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바로 기분이 나빠져서 말했고 사람들은 태혈령과 다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듯이 산본의가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이야기가 그대로 끝나려고 하자 이번에는 태혈령이 아쉬워했다.

“그런데 산본의가가 대단한가요?”

“당연하지요. 아니, 정말 산본의가를 모르는 겁니까? 아니면 산본의가를 시기해서 일부러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겁니까?”

결국 그들의 본심이 튀어나왔다.

“산본의가를 시기해요? 그건 또 무슨 말인데요?”

태혈령은 그들에게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기에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복이라도 하나 데려올 걸 그랬나 하면서 그녀는 혼자 나선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혼자 나서는 바람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내야 했던 것이다.

“산본의가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산본의가 현판을 황상 폐하께서 써 주신 것도 모릅니까?”

사람들은 이제 태혈령에게 호기심을 가지면서 물었다.

“황상 폐하가 왜요?”

“…….”

그때부터 그들은 이럴 게 아니라고 생각한 듯 산본의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해 주었다.

가주와 대공자의 뛰어난 의술에 대해서도 얘기가 나왔지만 사람들이 하는 얘기의 중심에는 이공자가 있었다.

이공자가 대단한 무공으로 사도련을 토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일 이후에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아서 황궁에도 자주 드나들고 산본의가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 황궁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태혈령은 멍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이공자가 설마 자기가 생각하는 그 아이가 맞는 건가 해서 그녀는 급하게 그들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 아이가…… 이공자의 나이가 몇 살이죠?”

“정확한 나이야 모르지만…….”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들 중 누군가가 이제 스물다섯 정도 되지 않았냐고 했고 누구는 스물일곱이 넘었을 거라고 했다.

“함께 수련을 하고 돌아오셨을 때 린린 아가씨가 스무 살이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아이가…… 그 아이가 무공을 잘한다고요?”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흐를라치면 그녀는 서둘러 질문을 하고 사람들이 이공자에 대해서만 말을 하도록 했다.

“어려서부터 정말 대단하셨죠. 이공자님이 검신 대협의 제자인 건 알고 계시지요?”

사람들은 혹시나 하면서 물었고 태혈령은 고개를 저었다.

“검신 대협이 누구인가요?”

“북리세가의 북리의천 대협 말입니다.”

“그자가 검신이라고 불린다고요?”

태혈령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지었다.

검신이라니.

고작 북리의천 따위가.

백산선문이 선계만을 바라보고 수련에 몰두하는 동안 별것도 아닌 것들이 스스로를 검신이라고 자청했나 보구나 해서 그런 표정이 나온 거였는데, 한눈에 봐도 젊은 여자가 검신 대협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그런 표정을 짓고 ‘그자’라고 하자 사람들은 상당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면서 더 이상은 대거리를 해 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처럼 하나둘 갈 길을 가려 했다.

태혈령은 난감해져서 그들을 붙잡았다.

“그 이야기를 마저 해 주세요. 돈을 주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기분이 상해서 고개를 젓고 가던 길을 가 버렸다.

태혈령은 그런 대우를 받아 본 기억이 거의 없어서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은 산본의가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야 했고 산본의가의 이공자가 자기가 낳은 아들이 맞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번화해 보이는 객잔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길 안내를 맡길 사람을 찾을 요량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태혈령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거리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미모가 아닌 만큼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태혈령은 그곳에서 일을 시킬 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등장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이 입고 있는 암자색의 무복에는 섬(閃)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십 대 중후반 정도나 되어 보이는 이들이 무슨 이야기에 그렇게 열중한 것인지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무가의 무력대인가 했는데 너무 앳된 모습인 것이 이상했고 그 아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내공이 모두 일 갑자를 상회하는 것은 더 희한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허리에 찬 검이 곤오철로 만들어진 것을 알아봤을 때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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