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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05화 (405/470)

제405화

405화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틀어진 것일까 하면서 그는 한숨을 쉬었다.

표월이 도착했을 때 그곳은 잠잠했다.

기껏 태혈령을 풀어주고 가서 싸우라고 했더니 뭘 한 것인가 했지만 표월은 이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깨달았다.

싸우지 않은 게 아니라, 싸움에서 패한 것이다.

태혈령의 주위가 온통 초토화되고 지형이 바뀌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면 이렇게 될 수 있는 건지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계곡이 생겨 있었다.

그 자리에서 모든 일을 지켜본 사람들도 그 일을 믿을 수가 없었으니 표월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헌정이 멍한 표정을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불을 사용하는 제자들이 날린 염화장이 나무에 옮겨붙고 다른 제자들이 일으킨 바람이 휘몰아치며 일대가 불타올랐다.

삽시간에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위태로워졌을 때 서도진이 구름을 불러 폭우를 쏟았다.

언젠가 린린이 알려준 천마신공으로, 황제를 처음 봤을 때 그의 앞에서 펼쳤던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서도진이 그것을 사용한 것은 백산선문의 제자들이 천마신공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그들보다 더 잘할 수 있고 그들이 흉내도 내지 못하는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압도하려고 한 것인데 제대로 먹힌 듯했다.

태혈령의 옆에는 태혈령이 키운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

표정은 모두 비슷했지만 그래도 태혈령의 제자들은 드디어 스승과 다시 만났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는 조금 밝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뭣들 하고 있는 거냐! 당장 서도진을 죽여라!!”

표월이 나타나 크게 소리치자 그곳에 있던 제자들이 우물쭈물하며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의 명을 거역하는 게 아니라 이미 시도를 했는데 자기들이 죽일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당장 죽이라고 말을 한다고 해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표월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하고 서도진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서도진은 그런 표월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과 원한이 없는데 당신은 왜 나를 죽이려고 합니까.”

서도진이 표정의 변화도 없이 말을 하자 표월은 기가 막혔다.

“네놈이 이곳에 왔다는 것이 이미 죽을 이유다.”

“그러면 애초에 나를 미행하라고 사람을 보내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나를 죽이겠다고 쫓아오게 하지 말았어야 하고 말입니다. 당신이 백산선문의 문주입니까?”

그 건방진 말에 표월은 뒤로 넘어갈 뻔했지만 정신을 차렸다.

“나는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이고 사문의 안전을 기할 것이다!”

“혼자서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해 보십시오. 괜한 제자들을 희생시키지 말고 말입니다.”

“내 제자들은 사문을 위해 아끼지 않고 목숨을 바칠 것이다. 네놈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겁니까. 이렇게 폐쇄적인 사문을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도 궁금하군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내가 황상으로부터 받은 권한이 있다는 것도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도진의 말에 표월이 움찔했다.

그는 사도련이 아이들을 납치했다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연지기를 다룰 줄 아는 아이들을 알아볼 수 있었고 그 아이들을 데려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데려왔다고 아무리 완곡하게 표현을 하려고 해도 그것은 명백한 납치였다.

그는 서도진이 뭘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순순히 인정을 할 수는 없었다.

“뭣들 하는 거냐! 너희의 목숨을 아낄 때가 아니다. 저놈을 놓치면 사문이 멸문할 거라는 것을 너희가 모르는 것이냐! 아니면 사문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표월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동안 제자들은 겁에 질린 채 움직였다.

그동안 표월의 말을 어기는 것을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이들이었기에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서도진은 그런 그들을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황상의 패를 가지고 있습니다. 황상께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면 황상을 대신해 일을 바로잡으라고 하셨소. 여러분은 황상의 백성이며 황상의 명령을 가장 우선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황상의 명을 거스르는 것은 반역이고 그런 자들은 거기에 맞는 벌을 받게 될 것이오!”

그들이 아무리 어렸을 때 붙잡혀 온 거라고 하더라도 황상의 명이 얼마나 지엄한지는 알고 있었다.

그동안 백산선문에서 살면서 표월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입받았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갈등하고 있었다.

그럴 때 태혈령이 나서주어야 했지만 태혈령도 납치에 일조를 했으면 했지 그걸 몰랐다고 주장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제자들은 서서히 둘로 갈렸다.

백련을 중심으로 해서 백산선문의 유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서도진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저자가 하는 말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저자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백련 자신은 서도진이 황제를 알현하는 것을 직접 봤기에 그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훗날 백산선문의 문주 자리가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표월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제 와서 백산선문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문주님을 도와서 백산선문을 지키지 않으면 여러분은 모두 저자에게 죽임을 당할 겁니다. 사문을 무너뜨린 후에 저자가 뭘 두려워하겠어요? 스승님이 계실 때 다 같이 스승님을 돕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는 동안 태혈령의 움직임이 희한했다.

조금씩 그곳에서 물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태혈령! 이것이 나만의 일이 아니거늘 네가 지금 도망칠 기회를 보는 것이냐!!”

표월이 소리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태혈령에게 향했다.

‘태혈령?’

서도진은 실소를 흘리면서 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었다.

헌터였던 서도진이 차지하게 된 몸을 낳고 버렸을 뿐 아니라 죽이려고까지 한 사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태혈령만큼은 죽이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강해졌다.

“모두 저놈을 죽여라! 이 자리에서 도망치는 것들은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평소 표월의 인자한 모습을 보아왔던 제자들은 표월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이 아는 스승님이 맞는 건가 하며 겁을 먹었다.

서도진은 더 이상 표월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스승님!”

백련이 소리쳤고 표월도 서도진이 자신을 향해 몸을 던진 것을 보았지만 그것은 눈으로 본다고 막을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서도진은 독수리가 사냥감을 낚아채는 것처럼 표월을 잡아채 몸을 날렸다.

“이 건방진 놈! 놔라, 네 이놈!”

표월은 자기가 서도진에게 붙잡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스승님!!”

백련과 몇몇 제자들이 놀라며 표월을 따라오려 했지만 서도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서도진은 표월을 데리고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려고 했지만 도중에 놓쳤다.

표월이 바람이 되어 사라지자 서도진은 나무 위에 올라섰다.

표월이 도망치기는 했지만 서도진은 그가 곧 나타날 거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근거리에 백산선문이 있는데 표월이 사문을 버리고 도망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표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혈령에게 원한이 있는 거라면 태혈령을 내주겠다. 죽이고 시신을 내줄 수도 있다.”

“그건 내가 해도 된다. 각자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을 지면 되는 거지. 너는 네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건방진 놈. 네놈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

“어. 안 그래도 되는데. 부담스럽게.”

서도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표월의 손에서 염화장이 날아갔다.

그의 손에서 날아간 불길은 그동안 그의 제자들이 일으켰던 불길과는 차원이 달랐다.

서도진은 표월의 몸에서 무언가 달라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동안 조금씩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비단 겉모습의 차이에서 그치지 않았고 화력까지도 점점 더 강해졌다.

‘자연스럽지 않은데?’

염화장이 날아들 때마다 나무에 불이 붙어 그대로 재가 되어버렸다.

불길이 옮겨붙어 활활 타오르는 것도 아니고 그대로 재로 변해버리는 모습을 보며 서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겁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염화장이 극에 이르면 이렇게까지 되는 거구나 하는 정도의 소회였다.

서도진이 서 있던 나무에도 염화장이 날아왔고 삽시간에 재로 변했지만 이미 그곳에 서도진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표월은 다른 곳에서 서도진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짐승 같은 비명을 질렀다.

“이노오옴!!”

표월의 염화장이 갑자기 다른 곳으로 날아가서 서도진이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거기에 직격으로 맞아 뼈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태혈령이 보낸 제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기가 찼다.

애꿎은 사람까지 싸움에 휘말려 죽게 될까 봐 기껏 장소를 옮긴 거였는데 기어이 그 싸움을 보러 왔다가 목숨을 잃다니.

표월은 자기의 염화장이 일으킨 일을 보고 자신감이 생기는 듯했다.

그 모습만 봐도 지금의 힘이 본래의 크기를 훨씬 뛰어넘은 거라는 추측이 맞는 듯했다.

“죽어라, 이노오오옴!!”

표월이 다시 노호성을 발하고 염화장을 날렸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나? 안 되는 것 같으면 다른 걸 해 봐야 할 텐데. 다른 건 할 줄 모르는 거야? 힘이 다 빠질 때까지 그것만 날릴 건가? 이러다가 멀리 있는 관군들이 산불이 크게 난 줄 알고 찾아오면 어쩌려고 그러지?”

표월은 서도진이 하는 말에 화가 났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바람으로 변할 수 있고 다른 힘을 어느 정도 다룰 수는 있지만 가장 강력하고 수월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불이었다.

힘을 공격으로 치환하는 것은 불이 가장 자신 있었는데 그게 통하지 않는다고 선뜻 다른 공격을 하기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저자들을 모두 납치한 것이냐, 문주.”

서도진이 물었지만 표월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자기가 대답할 리가 없지 않냐는 얼굴이었다.

표월은 자기가 말을 하지 않으면 서도진이 영영 그 일을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래전의 서도진이라면 그랬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가 알 방법은 없었다.

표월의 눈앞에서 갑자기 서도진이 사라지자 그가 놀라며 함께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그의 몸이 채 바람이 되기도 전에 서도진이 표월을 압박했다.

표월은 서도진이 무엇을 한 건지 한동안 깨닫지 못했다.

‘바람이 되어야 한다. 이 자리를 피해야 해……!’

오직 그 생각을 본능적으로 했을 뿐.

그러나 몸을 바꾸려고 해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벌써 몸이 떠올랐어야 하는데도 마찬가지였다.

표월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맹추위에 폭포가 얼어붙은 것처럼 자신의 몸이 꽁꽁 얼어붙어 땅에 달라붙은 것을 발견했다.

‘이게, 어떻게……!’

그러나 그것은 전조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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