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6화
406화
그의 앞으로 서도진이 천천히 다가와 표월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안 돼. 뭘 하려는 거냐, 이노오오옴!!!”
표월이 부르짖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도진이 그의 생각을 훑었다.
서도진의 머릿속으로 표월의 기억이 전해졌다.
백산선문을 세운 세 사람에 대한 것도.
그의 스승과 태혈령의 스승에 대한 것도.
태혈령의 능력 때문에 태혈령을 좋아했다는 것도 알았고 자연지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을 표월이 알아볼 수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표월은 그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보면 주저하지 않고 백산선문으로 데려왔고 그렇게 문도의 수를 늘려갔다.
사도련에서 아이들에게 했던 것과 다를 것도 없는 일이었다.
표월의 몸뚱어리를 결박하고 있던 빙결은 점차 위로 올라왔고 표월은 살려달라고 외쳐댔다.
그러나 결국은 입까지도 얼어붙었고 표월이 눈만 움직이며 애절하게 서도진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고 그 눈물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직 입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잘못했다고 말하며 용서해달라고 할 것 같았지만 서도진은 더 이상 그를 지켜볼 생각도 없었다.
서도진의 주먹이 가슴팍에 내리꽂히자 굳게 얼었던 몸통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대로 서도진이 몸을 날려 백산선문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을 때 그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서도진은 기척을 갈무리하지 못한 사람들 덕분에 백산선문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제자들은 태혈령과 함께 있었고 몇몇은 결의 어린 표정을 했다.
태혈령의 제자와 표월의 제자들이 확실하게 나뉜 듯했다.
“저자를 죽여라! 죽음으로 사문을 지켜라!!”
태혈령이 카랑카랑하게 외쳤고 몇몇의 제자들이 몸을 날렸다.
서도진은 백련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오히려 그때까지 계속 소극적이었던 헌정이 그때는 목숨을 아끼지 않으려는 듯 몸을 던졌다.
“당신들은 표월과 태혈령에 의해 이곳에 납치되었다. 백산선문은 자연지기를 다룰 줄 아는 자들을 납치해 이곳에서 수련을 하게 하고 그렇게 사문의 힘을 키우려 했다. 지금까지는 당신들을 피해자라고 하겠지만 아둔한 짓을 계속한다면 그때는 나도 당신들을 더 이상 용서할 수 없게 된다.”
서도진의 말에 몇몇은 주춤거렸지만 몇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고도 서도진은 그들을 죽이는 것이 꺼려져서 태혈령을 먼저 노렸다.
태혈령은 산본에서 봤을 때에 비해 훨씬 기세가 약해졌는데 서도진은 표월을 통해 그사이에 태혈령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다.
서도진이 태혈령을 노린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목숨을 내걸고 서도진에게 달려들었다.
“더 이상은 나도 당신들을 봐주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 서도진의 손에서 무언가가 날아가 제자들의 요혈을 점했다.
그것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침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그 순간 아무도 없었다.
제자들은 서도진에 의해 움직임을 봉쇄당하고 억울하고 참담한 표정으로 태혈령을 바라보았다.
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비명을 지르거나 우는 사람도 없었다.
태혈령은 그때야말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도…… 도지, 도진아……. 도진아……. 어미에게 이러면 안 된다. 나는 네 어미다. 너도 알지 않느냐. 도진아. 내가 너를 낳았다. 너를 낳은 어미에게 네가 어찌 이리 한단 말이냐. 도진아…….”
그녀는 서도진을 바라보며 어설프게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영 살길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는데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데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몰랐다.
차라리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어디선가 희한한 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고 싶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런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어서 꼼짝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진아. 아가야……. 이 어미가 잘못했다. 너를 버리는 게 아니었어. 아니. 그것은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나는 너를 버리려고 한 게 아니야.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네가 강한 아이가 될 거라는 걸 알았어. 내가 너에게 옥함신공을 펼쳤지. 이 어미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것을 할 수 있겠느냐.”
아가라고 했다.
추악하게도.
도진은 당장 그녀의 목을 분질러버리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서도진이 죽은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그 대신 서도진이, 실제로 태혈령이 낳은 그 서도진이 서 있어야 했을 테니까.
그리고 저를 낳은 어미가 지껄이는 소리를 들어야 했을 테니까.
그가 태혈령을 바라보았다.
“아이를 걱정했다면 절대로 옥함신공을 하지는 못했겠지. 성공 가능성이 그렇게 희박한 술법을 절대로 자기가 사랑하는 아이의 몸에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아니, 아니야. 도진아. 아진아……. 나는 자신 있었어. 성공할 자신이 있었어. 그랬으니까 한 거야. 잘못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면 내가 그걸 했을 리가 없지. 너는 잘 모르지만 나는 강해. 아진아. 나는 정말 강해. 나를 살려줘. 이 어미를 용서해 다오. 그러면 내가 아는 걸 모두 너에게 가르쳐줄 테니까. 그리고 백산선문을 너에게 줄 수도 있어. 신선이 되는 거야. 네가 신선이 되게 해 줄게.”
“당신도 못 하지 않았나?”
태혈령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계속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나에 대해서 못 들은 건가? 나는 당신이 낳은 아이가 아니야. 애초에 이곳 사람도 아니고. 이미 중원에는 널리 퍼진 얘기인데 이런 곳에 처박혀 있지만 말고 가끔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얘기도 듣고 그러는 게 좋지 않았겠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태혈령은 서도진이 하는 말을 들으랴, 그 소리를 들으랴, 그리고 서도진을 설득할 말까지 생각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조르르 흐르는 것 같던 소리가 어느새 콸콸거리는 것처럼 커졌다.
어디에서 이런 소리가 난다는 말인가.
이 근처에는 우물도, 내도 없는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우물도 4리는 떨어져 있는데.
설마하니 서도진이 바닥 깊은 곳에 있는 물을 끌어 올린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태혈령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태혈령. 제 자식을 죽이려 하는 자를 살려둔다면 앞으로 네 손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게 될까. 너를 죽이는 것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길이 되겠지.”
“아, 안 돼……. 안 돼. 아진아. 이 어미를 용서해라.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다시는 너에게 못되게 굴지도 않을 거고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도 않을 거야. 정말이야. 어미를 믿어라. 한 번만. 한 번만 기회를 줘. 너는 나를 모르잖아. 한 번만 기회를 준다면……!”
물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리고 이제는 그 소리만 들리는 게 아니었다.
몸에 물의 기운이 느껴졌다.
태혈령이 입고 있던 옷이 흠뻑 젖어 축축 늘어지며 몸을 잡아 끌어내리는 듯했다.
그녀는 눈만 굴려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중력을 거스른 물이 태혈령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태혈령은 그것을 털어내려는 듯 몸부림을 쳤지만 물은 계속 흐르며 올라갔다.
마치 누워 있는 사람의 몸 위로 파도가 덮치는 것처럼, 살아 있는 태혈령의 몸 위로 물이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는 제자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읍, 흐으읍! 아지, 아진…… 아하아압!!!”
벌어진 입으로 물이 들어갔다.
제자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에 기함했다.
물이 계속해서 차올랐고 태혈령은 서서히 질식했다.
숨을 쉬지 못한 채, 똑바로 선 자세 그대로 물에 빠진 듯 질식해 결국 태혈령은 숨을 거두었다.
서도진은 태혈령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목숨을 잃은 태혈령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고 서도진은 제자들의 요혈을 점한 얼음 침을 녹였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그들은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 압도적인 죽음을 봐서 그런 건지 감히 서도진을 향해 덤비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헌정마저도 그랬다.
“헌정. 당신 역시 이곳에 납치되어 왔다. 태혈령과 표월에게 속은 것이지만 앞으로 당신들의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당신들은 괴물이 될 수도 있다. 당신들은 앞으로 특별히 주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이 잘못된 결정을 하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용서와 기회는 이 자리에서 충분히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태혈령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그들은 더 이상 서도진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태혈령을 죽인 자라면 자기들을 죽이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러면 저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렇게 물은 사람은 청효였다.
“저희가 살던 곳은 모르시는지요.”
서도진은 고개를 저었다.
도와줄 수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너무 오래되어 표월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 버린 탓이었다.
청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듯했다.
“혹시 저희가 반드시 사문을 떠나야 하는 것인지요. 이곳에 남아 있으면서 수련을 하며 살면 안 됩니까, 공자님.”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새롭게 뭉치는 것은 상관이 없을 듯하나 여기에는 많은 비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선이 되었다며 사라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서 그들이 다시 나타나서 여러분을 조종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사문 어른에 대한 이야기라 듣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었겠지만 거기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 * *
백산선문의 제자들은 모두 그곳을 떠났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오랫동안 그곳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 모든 제자들이 산을 내려갔다.
그래도 동문이 함께 움직일 듯했고 거기에 위안을 삼는 듯했다.
서도진은 텅 빈 백산선문에 혼자 남았다.
그가 그곳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표월을 통해 알게 된 사실 때문이었다.
백산선문을 만든 자선과 주악, 그리고 현천.
표월은 현천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고 서도진은 이제 그것을 스스로 알아보기로 했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난 후 서도진은 기감을 펼쳤다.
조금씩 더 감각을 높이자 작은 곤충들의 움직임까지 느껴졌다.
그러고도 한동안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서도진의 감각이 예민해지면서 결국 그것이 걸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서도진은 몸을 날렸고 기암절벽의 너머에 작은 초암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백발성성한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칠, 팔십은 되어 보이는 외모였지만 이곳에서는 겉모습만으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을 서도진은 알고 있었다.
“선대 문주님입니까.”
“누구인가.”
“문주의 스승입니까.”
“무례하다!”
그가 현천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서도진은 그것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사문에 일이 있느냐.”
그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