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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30화 (430/470)

제430화

430화

“너는 짐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내가 실수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앞에서 나를 욕보였다. 나는 그 사람들이 짐에 대해 좋은 생각을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앞에서는 짐도 신중하게 굴었고 언행을 삼갔다. 그런데 네가 그곳에 가서 그리 했구나. 네가 이 애비의 앞에서 애비조차도 우습게 여기고 멋대로 말을 바꾸는데 그곳에서 사람들을 어찌 대했을지 생생하게 알 것 같구나.”

황제의 말에 황녀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폐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단코 그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오해하시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황제는 황녀를 돌려보냈다.

그 일에 대해 달리 책임을 묻지는 않았지만 황녀는 황제가 더 이상 자신을 총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황제가 황녀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벌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윤정효가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윤정효는 황제가 자신을 불렀다는 말을 듣고 과연 무슨 일인지 이리저리 고민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잘못한 것은 없었기에 마음을 단단히 하고 황제를 알현했을 때 황제가 자상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서이린을 마음에 두지 말라고.

윤정효는 황제의 어조와 다르게 그 말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린린에게서 들었던 협박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정혼을 했다고 하더구나.”

황제의 말에 윤정효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다.

“하나 두 사람은 동기간이 아닌지요. 폐하.”

“서 공자가 혈육이 아니라고 하더구나. 그러니 포기하여라.”

“……예. 폐하.”

아무리 윤정효의 마음이 절절하다고 해도 황제는 감히 그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윤정효를 돌려보내고 황제는 자기가 아진과 린린을 위해서 큰일을 해 주었다고 생각하며 흐뭇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겨우 정혼을 한 것뿐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해 놓았으니 앞으로 다른 사람들이 두 사람 주변에 얼쩡거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자기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았다.

* * *

산본의가에는 색다른 긴장감이 흘렀다.

가주와 도종, 아진이 함께 모였고 제선문주와 위도도 그 자리에 있었다.

산본무관의 섬풍대와 수련을 하느라고 의가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소청까지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일의 중심에 있는 연월랑도 있었고 조금 후에는 벽예월도 서둘러 들어왔다.

모두 벽예월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그녀를 맞이했다.

연월랑은 작게 한숨을 쉬고 벽예월을 보았다.

대법이 잘 될지 하늘을 보고 알아봐달라는 부탁에 벽예월은 연일 하늘을 보았다.

그러고도 며칠 동안 답을 주지 못하더니 연월랑이 신교로 떠나기로 되어 있던 날 급히 온 것이다.

벽예월의 표정이 어둡지 않은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일단 마음을 놓았다.

“잘 될 것 같습니까?”

연월랑이 묻자 벽예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월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입니다. 정말 마음이 놓입니다.”

그러자 위도가 이미 다 끝난 일인 것처럼 연월랑을 다독였다.

“그동안 정말 마음고생이 많았어. 이제 가서 잘 받고 와. 그때 오면 남자가 돼 있겠군. 이 모습에도 정이 들었는데.”

“저도요.”

소청까지 그렇게 말하자 연월랑이 웃었다.

“그렇기야 하겠지만 처음에 나를 봤을 때 이 모습이라 그랬을 거고 이제는 내 원래 모습을 만나야지. 하긴 그것도 원래 모습은 아닐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러면서 연월랑이 아진과 위도를 보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이런 비슷한 모습을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동안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연 군사. 연 군사의 모습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연 군사를 변함없이 존경할 겁니다. 마음을 굳게 먹고 다녀오십시오.”

가주의 말에 연월랑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직 끝난 것도 아니고 이제 신교로 가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대법을 받게 되는 건데 벌써부터 벅찼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그동안 연월랑과의 관계가 소중했던 듯 한 사람 한 사람 오래오래 인사를 나눴다.

“저 금방 다시 돌아옵니다. 이렇게 길게 인사를 하시니 영영 못 돌아올 곳에 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연월랑이 말하자 사람들도 정말 그렇겠다며 인사를 뚝 멈추었다.

아진은 길고 긴 인사가 끝나기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다가 연월랑을 보았다.

“준비되었으면 가시지요. 연 군사.”

“예. 잘 부탁드립니다.”

연월랑은 여전히 신법을 펼치지 못했고 이번에도 아진의 도움을 받아서 신교로 가야 했다.

린린이 같이 가 주려고 했지만 도종의 부탁으로 의가에 남기로 했다.

환자가 급격히 많아지며 도종이 의가 일에 집중을 해야 해서 산본의가의 안위를 위해 린린이 있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위도는 문까지 따라오며 반드시 잘될 거라면서 연월랑을 격려해 주었다.

아진이 연월랑을 등에 업은 채 신법을 펼치는 동안 연월랑의 긴장감이 등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연 군사. 벽 소저가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벽 소저가 말하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벽 소저는 안 좋은 것을 보면 그대로 말을 해 주니까요. 그래야 우리가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지요.”

“예.”

말을 길게 시키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연월랑은 입을 다물었다.

신교에 도착했을 때, 역천마의는 미리 준비를 거의 끝마쳐두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역천마의의 주변에는 아진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같이 있었다.

그들은 대법에 필요가 없을 텐데 왜 같이 있는 건가 했더니 내공이 부족해지면 그들이 있다가 역천마의에게 내공을 주입해줄 거라고 했다.

“공자님은 연 군사가 지치지 않도록 그때마다 필요한 내공을 주입해 주시기 바랍니다.”

역천마의의 말에 아진은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

역천마의는 일단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니만큼 주저하지 않았다.

아진은 자기가 그 자리에 같이 있게 될 거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다가 대법을 함께 했다.

* * *

연월랑이 눈을 떴을 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자기가 얼마 만에 눈을 뜬 건지 알지 못했다.

‘……끝난 거구나……!’

연월랑은 의식을 잃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고 생각했다.

잘된 건지 알 수가 없었고 그것을 확인하는 게 겁이 났다.

옆에 사람이 있다가 말을 해 줬다면 좋았을 것 같았지만 만약 잘못됐다면 그 말을 듣는 것도 무서울 듯했다.

한참 동안 그는 확인을 하지 못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일단 살아나기는 했잖아. 목숨은 건진 거고 최악의 경우라고 해봐야 대법에 실패한 걸 텐데 그래봤자 뭐. 지금까지도 그랬으니까 크게 나빠지는 것도 없고. 겁낼 것 없다. 연월랑. 이제 확인해 봐.’

연월랑은 자신을 다독이고 가만히 목소리를 내 봤다.

그렇게만 해도 대법이 성공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아…… 아.”

한번 소리를 내 본 연월랑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그리고 다시 소리를 냈다.

“아! 아! 연월랑. 연월랑!!”

연월랑의 눈에서 어느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대법은 성공이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거울을 찾았다.

그가 눈을 뜨면 그것을 가장 먼저 찾을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했는지 커다란 거울이 놓여 있었다.

연월랑은 당장 그 앞으로 가서 제 얼굴을 비춰보았다.

“……!!”

연월랑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좋은 얼굴이었다.

진심으로 보기 좋은 얼굴이었고 그의 마음에 들었다.

예쁘던 연월랑이 아니라 이제는 남자답게 헌앙한 모습이었다.

그는 만족했다.

그냥 남자이기만 하면 됐는데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누가 갈아입혀 준 것인지 좋은 옷도 입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남자 옷이었다.

“연월랑.”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연월랑? 이건 여자 이름이니까 이제 이름도 바꿔야 하나?”

원래의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어떻게 보면 남자 이름 같기도 해서 이름은 그냥 놔두자고 생각했다.

“연월랑. 반갑다. 연월랑.”

그는 자신의 목에서 나오는 굵직한 소리가 너무 좋아서 계속 이름을 불렀다.

다른 말을 해 보고 싶었는데 할 말이 바로바로 생각이 나지 않아서 이름만 불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연월랑. 연월랑. 연월랑.”

각각 목소리를 낮추기도 하고 굵게 하기도 하면서 부르다가 나중에는 역천마의의 이름도 실컷 부르고 서도진과 위도의 이름도, 그리고 서악이도 불러보았다.

“서악아. 숙부라고 해 봐. 숙부님이다. 이제야말로 정말 숙부님이다. 으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더니 정말 호방한 웃음소리가 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연월랑은 다시 한번 찔끔 눈물을 쏟았다.

너무 감격스러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역천마의 님께 가서 깨어났다고 말해야지. 이걸 어떻게 다 갚지?’

그가 밖으로 나가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혹시…….”

“연월랑입니다. 연월랑입니다.”

연월랑이 말을 하며 흐느끼자 그들이 놀란 얼굴로 더욱 빨리 뛰었다.

빨리 역천마의에게 가서 그 소식을 알려주려고 서둘렀다.

마침내 역천마의가 그곳에 나타났을 때 그 옆에는 아진이 함께 있었다.

함께 걸으며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연월랑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곧바로 연월랑이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

역천마의는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하고 연월랑을 바라보았다.

“역천마의 님, 역천마의 님!!”

연월랑은 무릎까지 꿇고 역천마의에게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잘되어서 다행입니다. 참으로 헌앙하십니다.”

역천마의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렇게까지 잘될 거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다가 너무 흐뭇해서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연월랑이 얼마나 수많은 좌절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축하를 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연 군사님.”

“공자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때부터 멈추지도 않고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만약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먼저 포기를 해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잘되었습니다. 정말 잘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이러지 마시고 어서 돌아가시지요. 연 군사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셔야지요. 얼마나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걱정이 돼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역천마의의 말에 연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생겼다는 생각.

자신을 걱정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기다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정말 많이 생겼다는 생각.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기대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북천에서 칠 년을 사는 동안 그런 사람은 그의 주변에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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