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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38화 (438/470)

제438화

438화

잠시 후에 위도와 린린이 왔다.

“소청아. 어른들에게는 네가 말씀을 드려라. 이걸 가주님에게 가져다드려.”

“네. 스승님. 부디 조심하시고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소청은 그 일이 급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사를 하고 나서 그대로 사라졌다.

“가자.”

아진도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몸을 날렸다.

흑사문이 아직 무사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 * *

제일조가 돌아왔을 때 팽수혁은 길에 쓰러져 있었다.

관도에서 한참 벗어난 외진 길이었다.

가장 빠른 길로 가려고 했지만 결국 기력이 다해버렸다.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던 팽수혁은 뾰족한 것으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느낌에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 독수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너…… 너!”

팽수혁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가 곧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실패한 거구나.

말을 못 알아들은 거구나.

내가 흑사문으로 갔어야 하는 거였다…….

곽설.

너는 죽었겠구나. 내가 멍청했다. 내가 어리석었어. 사련으로 가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서 그리 다 말을 해 버리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아둔했다……!!!

끝없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믿었던 아버지가 그런 결정을 내릴 거라는 걸 몰라서 그런 것이기는 했지만 그는 자기가 자기 손으로 흑사문의 사람들을 전부 다 죽인 것 같았다.

그러면 이제는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산본의가. 그래. 산본의가로 가자. 이제는 흑사문으로 가는 것도 소용이 없게 됐으니 산본의가로 가자……!’

그러면서 벌떡 일어나자 단전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독수리를 바라보았다.

“너도 고생했다.”

사련에도 전서구와 전서응이 있었다.

그것들은 정해진 장소를 오가며 소식을 전했다.

가본 적도 없는 곳에 가라고 보낸다고,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새는 없다.

팽수혁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 자기가 뭘 바랐던 건가 하며 힘없이 웃었다.

그러다가 독수리가 기묘하게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한 발을 든 채 다른 한 발로만 서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러지?’

그 발에는 전서통이 있었다.

전달하지도 못한 전서를 빼달라고 하는 건가 하면서 팽수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독수리는 빨리 빼라는 듯이 발을 탈탈 털었다.

팽수혁은 독수리랑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독수리의 성질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 듯해서 전서통을 뺐다.

“……비어 있어?”

전서통이 비어 있다는 건 전서를 전달했다는 건가?

깜짝 놀라며 팽수혁이 다른 전서통도 확인했다.

두 개가 다 비어 있었다.

“너…… 정말 이걸 다 전달한 거냐?”

독수리는 이제야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는지 날아오르더니 무섭게 어딘가로 떨어져 내렸다.

뭘 하는 건가 하다가 토끼를 잡아서 돌아오는 걸 보고 팽수혁이 독수리를 바라보았다.

제일조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고깃점을 나눠서 팽수혁에게 주었다.

그걸 보자 갑자기 배가 꼬르륵거렸다.

추살 3조의 시신을 찾으러 가면서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계속 말을 타거나 신법을 펼쳤으니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산본의가에 빨리 가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 어차피 제일조가 거기에 다녀온 것 같으니 이제는 기력을 먼저 회복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고맙다. 독수리야. 너 정말 대단하구나. 너 서 공자님의 독수리 맞지? 엄청나다. 너 정도가 되니까 서 공자님이 곁에 두신 거겠지?”

그러면서 팽수혁은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다.

독수리는 불까지 거창하게 피우는 걸 보고 자기가 먹던 것도 팽수혁에게 주었다.

먹던 걸 받는 게 꽤 유쾌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팽수혁은 마냥 고마워했다.

“기회가 있을 때 많이 먹어둬야 할 것 같아. 다음에 먹어야지 하다가 그다음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거고.”

짧은 시간 동안 깨달은 게 많았던 듯 팽수혁이 말하며 고기를 구웠다.

그러면서 독수리가 새로 사냥해온 토끼까지 불에 구웠다.

그건 자기가 먹으려고 옆에 놔뒀던 건데 그것까지 굽는 걸 보고 독수리가 이번에는 멀찌감치 토끼를 내려놓고 먹기 시작했다.

“흑사문은 도망쳤을까? 문주님에게 전달했어? 아니면 다른 사람? 그 사람이 문주님에게 전했을까? 너 흑사문주님은 모르지? 아니야. 그래도 잘했어. 수고했어.”

전서를 가지고 가다 다른 사람에게 뺏겼을 거라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자기를 다시 찾아온 독수리였다.

이 녀석은 영물이 틀림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확신은 더해갔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지?’

산본의가에 소식이 전해졌다면 거기로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봐야 어긋나기만 할 것 같고 서도진을 만나지 못할 듯했다.

“공자님은 어디로 가실까? 설마 사련을 치시지는 않겠지?”

독수리에게 말을 하던 팽수혁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전서를 적을 때만 해도 흑사문이 혈겁을 당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련이 걱정되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걱정할 대상이 달라졌던 것이다.

서도진이 없었을 때는 사련이 가장 큰 세력으로 느껴졌는데 그림 안에 서도진이 들어오는 순간 얘기가 달라졌다.

‘사련으로 돌아가야 하나?’

팽수혁은 다시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다가 마음을 내려놓았다.

사련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사파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눈을 가리는 순간 그것이 욕심이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련의 사람들은 흑사문을 멸하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사파를 구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버리지 못하는 욕심이 생기면 판단이 흐려진다는 것을 팽수혁은 알 것 같았다.

그는 무림맹을 탈퇴하던 북리의천과 서도진의 행보를 생각했다.

‘계산하면 안 돼. 해야 할 일을 하고 사람들이 나를 주목할 때 내가 사련의 사람이라는 걸 알리면 돼. 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사련을 증명하면 돼.’

엄청나게 어려운 일일 것 같았지만 이미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을 흉내 내면서 자기도 해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네 것도 구워줄까, 독수리야?”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아까워서 말하자 독수리가 자기 몫의 토끼를 들고 저만치 날아갔다.

“그럼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 나는 흑사문에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너도 같이 갈래?”

그러면서 불을 끄자 독수리도 서둘러 고기를 다 먹더니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사라지는 독수리를 보며 같이 가지는 않을 건가 보다고 생각하면서 팽수혁은 걸음을 옮겼다.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어서 옷도 그대로였고 말을 구할 수도 없었다.

바로 신법을 펼치기는 어려울 듯하고 우선은 안전한 장소에 가서 운기조식을 먼저 해야 할 듯했다.

‘흑사문이 무사하길.’

그의 생각은 다시 그리로 향했다.

* * *

“공자님. 제일조인데요?”

신법을 펼치던 무린의 말에 아진도 멈췄다.

그러자 제일조가 날아오더니 부리로 아진의 허리춤을 쪼았다.

안 하던 짓을 하는 게 희한해서 왜 그러는 건가 하고 봤더니 계속해서 허리춤을 쪼아댔다.

“왜 그러는데?”

아진이 물으며 혹시 돈주머니 때문인가 하면서 그걸 보이자 제일조가 그때부터 그걸 쪼아댔다.

“뭐야? 왜 그러는데? 돈 필요해? 돈 줘?”

그러자 제일조가 아진의 주위를 맴돌았다.

“왜 이러지? 객잔에서 돈 없이 과파육 먹었나?”

린린이 희한하다는 듯 보다가 자기 돈주머니를 꺼내서 제일조에게 보여 주자 제일조가 그것을 잽싸게 부리로 낚아채더니 그대로 날아 올라가 사라져버렸다.

“뭐야…… 나 지금 새한테 소매치기 당한 거야?”

“엄청나다. 린린. 별짓을 다 당하네. 그런데 왜 네 걸 가져간 거지?”

“그러게. 오라버니가 돈은 더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 건가 보다. 돈이 많이 있을 필요는 없었나 봐. 일단 어느 정도 내놔보라는 거였나 봐. 그래도 양심은 있네. 제일조가.”

“그런데 새한테 돈이 왜 필요해?”

갑자기 나타난 제일조에게 돈을 뜯기고 그들은 한동안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일조는 그 돈을 가지고 알뜰하게 움직였다.

제일조가 그동안 활약할 일이 많지 않아서 그렇지 일단 한 번 마음이 동해서 움직이면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게 많았다.

어느 날 날아가다 흑주와 부딪쳐 떨어지고 기억을 잃은 후 아진을 주인으로 여기고 다니면서 주인이 워낙 뛰어나 자기 능력을 발휘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우연히 팽수혁을 만나고 할 일이 많아졌다.

제일조는 시장에 있는 포목상으로 가 철전 몇 개를 돈주머니에서 꺼내놓고 거기에 걸려있는 옷을 챙겼다.

갑자기 커다란 새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놀라서 쫓으려고 하던 주인은 새가 부리로 돈주머니를 풀러 돈을 꺼내는 걸 보고 기함하다가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공돈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돈주머니를 통째로 다 뺏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림도 없다는 듯이 돈주머니를 들고 옷을 가지고 유유히 날아가는데 사람이 값을 치르고 옷을 사는 것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그다음에는 마방에 가서 그런 식으로 말 한 필을 사서 말을 뒤에서 몰아가며 팽수혁을 찾아갔다.

팽수혁은 흑사문을 향해 가다가 갑자기 말 한 마리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말이 달리는 소리를 듣고 누가 그렇게 말을 함부로 모나 했다가 말에 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무슨 일인가 하고 이상하게 여길 틈도 없이 독수리가 내려앉았다.

독수리는 새 옷 한 벌을 꼭 움켜쥐고 왔다가 그걸 내려놓았다.

“……뭐야. 독수리야?”

설마.

지금 이걸 나에게 주려고 가져왔다는 말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일단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렇지 않아도 피가 묻은 옷을 계속 입고 다니는 것이 찝찝하기도 했고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관에 신고를 할까 봐 겁이 나기도 해서 큰길로는 나가지도 못하고 있던 차에 잘되었다 했다.

옷을 갈아입자 독수리가 이번에는 돈주머니까지 주었다.

“힉……!!”

주머니에 산본의가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을 보고 팽수혁의 눈이 커졌다.

확실히 산본의가에 다녀온 것은 맞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는 한편 독수리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말에 올라타고 돈주머니도 잘 챙긴 후에 흑사문으로 향했다.

그사이에 조금이라도 운기조식을 하고 휴식도 취해서 몸 상태는 훨씬 나아져 있었다.

그러다가 팽수혁은 돈주머니를 다시 꺼내서 구경했다.

안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도대체 누가 글씨를 이렇게 수놓은 걸까 해서였다.

살다 살다 이렇게 수를 못 놓는 사람은 처음 본 것 같았다.

그래도 글자를 알아볼 수 있게는 해 놓았으니 잘한 것인가 하며 팽수혁이 피식 웃었다.

흑사문과 사련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불편했던 팽수혁은 독수리 때문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고맙다. 독수리야.”

그런데 이 독수리는 뭐가 그리 바쁜지 또 사라져버렸다.

그러다가 독수리가 다시 나타났을 때 팽수혁은 독수리가 가져온 선물을 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다.

독수리와 함께 서도진이 자신의 무리를 데리고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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