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469화 (469/470)

제469화

469화

“확실히 연아가 린린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어. 린린도 연아를 좋아해 주는 것 같아서 신기하기도 했고.”

독고소영은 하연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하연이 독고소영에게 다가가 폭 안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린린의 얼굴을 주무르기도 하고 주위를 얼쩡거리면서 친한 척을 하더니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걸 깨닫고 나자 더 이상 아이인 것을 빙자해서 주군에게 함부로 굴면 안 된다겠다고 생각한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아진이 웃자 린린도 하연을 보고 웃었다.

“잠깐…… 그러면 연아는 이미 구결을 알고 있는 건가? 그동안 할 수 있었던 구결은 이미 알고 있는 상태로 자라게 되는 거야?”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독고소영의 놀라움이 더욱 커지는 듯했다.

“네. 저는 그랬어요. 맞지. 오라버니?”

린린이 말을 하고 조금 자신이 없어졌는지 아진에게 물었다.

“아닐걸? 한참 동안 안 그랬어. 네가 그걸 생각한 건 소청이를 만나고부터가 아니었나? 내가 소청이한테 무공을 가르쳐주는데 네가 떠올리고 가르쳤던 것 같아. 아닌가?”

“아…… 맞는 것 같아.”

소청의 아버지는 마공을 익히다가 무림공적으로 몰려서 집안이 멸문당했고 죽으면서 소청의 어머니에게 무공비급이 적힌 책을 남겼었다.

비밀리에 그걸 간직해왔던 소청의 어머니가 그 책을 아진에게 주었고 아진이 소청을 가르치려 하는 동안 린린이 마공의 기억을 떠올렸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게 린린의 금제를 깨뜨리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 후에는 린린은 한참 동안 자기가 누구인지 제대로 기억을 못 했었어요.”

아진이 말하자 린린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일부러 기억을 지우려고 해서 그런 거였지.”

“아. 그런 거면 연아는 기억을 하고 있겠는데? 루주는 기억을 잃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염마에게도 기억을 갖게 해 달라고 부탁했을 것 같은데.”

아진의 말에 독고소영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하연은 말간 눈으로 독고소영을 보았다.

그러고는 아진과 린린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린린을 볼 때의 표정은 다른 사람들을 볼 때와 달랐다.

환생을 하고 나서도 린린이 주군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눈빛이 달라. 확실히. 린린을 볼 때는 어려워하는 것 같아.”

독고소영이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얘기는 괜히 한 것 같아요. 아까까지만 해도 연아가 린린 앞에서 어리광을 부렸는데 이제는 못 할 것 같잖아요.”

아진의 말에 독고소영도 정말 그런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괜찮다. 하연. 본좌는 관대하다. 앞으로 일 년 동안은 어리광을 부리게 해 줄 테니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도록 해.”

그러자 하연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지고 환하게 웃었다.

그런다는 것만 봐도 지금 어른들이 말하는 것을 전부 다 알아듣고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인 듯했다.

독고소영은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좋은 어머니가 되도록 노력할게. 정말 좋은 것만 해 주고 좋은 일만 일어나게 해 줄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

하연은 독고소영이 마음에 드는 듯했고 린린도 그 모습을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의 감정을 웬만해서 잘 나타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그 정도만 해도 그녀가 얼마나 기쁜지 알 것 같았다.

“그러면 연아는 마공을 익히게 되려나?”

독고소영이 갸웃하며 묻자 아진과 린린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하연이 설인정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부터 두 사람이 고민한 부분이기도 했다.

“만약 제가 연아를 가르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저는 연아를 제자로 받아들여서 가르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린린이 말하자 독고소영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워낙 준비 없이 들은 말이라 뭐라고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진은 린린이 어느 정도나 강한 의지를 가지고 그 말을 한 걸까 하면서 린린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것은 독고소영도 마찬가지였는데 재미있는 일은 그때 일어났다.

하연이 앉아있는 독고소영을 폭 안고 발을 동동 굴렀던 것이다.

제발 그렇게 하게 해 달라는 것처럼.

독고소영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미 아진에게서 하연에 대한 얘기를 들었으니 그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그녀도 알 수 있었다.

“…….”

독고소영은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았지만 결정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래. 뭐……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면 고마워할 일이겠지. 그래…… 사소한 일이 좀 있기는 하겠지만. 그래. 의천이 정파의 어른인데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독고소영의 말을 들으면서 아진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해했다.

그건 아진 역시 생각한 거였고 확실히 독고소영과 북리의천이 아니라면 그런 일에서 확실한 방패가 되어주기 어렵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걸 알고 설인정이 두 분을 택한 걸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독고소영이 하연을 안은 채 말했다.

“이제 이 어미를 믿거라. 연아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갖게 해 줄 거다. 너는 이 어미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니 말이지.”

그러면서 그녀가 온화하게 웃었다.

독고소영을 오랫동안 봐 왔던 아진도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정인의 제자였던 아진을 유난히 예뻐하고 아꼈지만 아진에게도 그런 표정은 지은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독고소영도 자기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그런 표정이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 몰랐을 가능성이 높았다.

린린은 독고소영의 품에 안겨있는 하연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아진은 린린의 웃음이 퍽 마음에 들었다.

지금 독고소영이 하연에게 한 말을 듣고 가장 기뻐할 사람은 어쩌면 하연이 아닌 린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진은 독고소영에게 고마웠다.

“저도 도울 것입니다. 사고님. 저도 연아가 평온하게 자랄 수 있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할 것입니다.”

“아진이가 그렇게 해 준다면 바랄 게 없지.”

나이가 들고도 아진의 주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아명으로 부르고 있었는데 그게 조금 민망하면서도 좋았다.

린린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언젠가 누군가 이제 이린이라고 불러야겠다고 하자 그냥 린린이라고 불러달라고 하기도 했었다.

하연도 그렇게 오래오래 연아라고 부르게 될 거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 * *

북리의천은 정신이 없었다.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거의 쉬지도 않고 신법을 펼쳐왔는데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독고소영에게 연달아 엄청난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녀의 선언을 들었다.

하연을 린린의 제자로 보내기로 했다는…….

독고소영 자신도 정파의 명문무가인 독고세가의 사람이었으니 천마의 제자로 보내기로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그 후폭풍은 누구보다 잘 알 거라고 생각했다.

“의천. 나는 그렇게 결정했어. 의천도 따라주면 좋겠어.”

“소영…….”

“다른 말은 안 들을 거야. 만약 의천이 내 말을 듣지 않겠다면 나는 연아를 데리고 본가로 돌아갈 거야.”

그러자 하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독고소영의 손을 꼭 잡았다.

자기는 어머니와 뜻을 함께하겠다는 듯이.

아직도 하연이 설인정의 환생이라는 것이 잘 믿기지 않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행동만 봐도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을 듯했다.

“의천. 우리 연아는 역사상 가장 강한 아이가 될 거야. 어쩌면 천마가 될지도 몰라.”

독고소영이 말을 하다가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이 린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될 겁니다. 저에게 제자가 있는데 제 제자를 두고 다른 이에게 자리를 줄 이유는 없지요. 그리고 연아가 제 제자가 된다면 그때부터는 수많은 사람들이 연아의 목숨을 노릴 것입니다. 제 제자니까요.”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린린을 보면서 독고소영도 그때는 놀라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데 하연이 좋아하니 그렇게 되도록 해줘야겠다는 생각만 하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북리의천이 물었다.

“그런데 린린. 네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천마신교의 소지존이 되는 게 아니냐.”

그의 말에 린린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은 당황하면서 린린을 보며 물었다.

“왜…… 나를 보냐?”

“그건 오라버니가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어찌나 당황했는지 아진이 요란하게 기침을 해댔다.

“뭘…… 대답해?”

“물으시잖아. 소지존에 대해서.”

“아니.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그럼 내 아이를 누구랑 낳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진의 얼굴은 감당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붉어졌다.

그 모습을 북리의천이 흥미진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진아. 마냥 그렇게 미루기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 스승을 보아라. 소영이와 혼인을 하고 이제는 하연이까지 생겨서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거니는 것 같단다. 이 스승은 아진이 너도 빨리 이런 행복을 알았으면 하는구나. 짝을 새로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린린과 정혼까지 한 사이가 아니냐. 이제는 너도 린린을 계속 기다리게만 하면 안 되지.”

“아…… 저…….”

아진은 어쩌다가 갑자기 훅 그 얘기가 시작된 건가 하면서 진땀을 뺐다.

그러자 독고소영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아진이 네가 워낙 모든 일들을 현명하게 잘 처리하니까 이 일도 어련히 잘 알아서 할까 했는데 그동안 지켜보니 이건 아무래도 못 하는 것 같다. 린린도 너만큼이나 이런 일에 무심하고 태평하니 그렇지 만약 다른 여자 같았으면 너는 진작.”

독고소영은 차마 아진에게 심한 말은 할 수가 없어서 그 정도로 하고 생략했다.

아진은 독고소영이 정말 고마웠다.

“그것은…… 저희가 잘 알아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진은 더 이상 스승과 사고 앞에서 그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생각에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고 린린은 마치 남의 일을 구경하는 것처럼 흥미진진해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린린 역시 이 일의 당사자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오라버니를 너무 다그치지 마세요. 저도 지금이 좋아요. 남들이 다 혼인을 한다고 저희도 혼인을 해야 한다는 건 아니잖아요. 지금은 제가 오라버니의 동생이라서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기면 오라버니가 지는데 만약에 혼인을 하면 반 정도는 저도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그건 별로인 것 같아요.”

린린의 이유가 그런 것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이 독고소영과 북리의천이 경악하며 린린을 보았다.

혹시 눈치 없는 아진 때문에 린린이 혼자 마음고생을 하고 아진이 욕먹는 게 불쌍해서 그러는 거라면 억지로라도 추진을 해 볼까 했는데 이건 마음에서 우러나는 얘기인 것 같았다.

혼인을 하고 나면 귀찮은 일이 떠안겨질까 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오래 아진의 동생으로 있겠다는 뜻이 얼굴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가 정혼자라는 것도 알고 귀찮게 구는 사람도 없어서 딱 좋아요.”

린린은 다시 한번 그 말을 분명히 했다.

“게다가 제자까지 생겨서 소지존이 누가 될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요. 만약에 제가 아이를 낳으면 소지존은 연아를 시키고 우리 아이는 산본의가 소가주를. 아…… 랑랑이 있지? 뭐. 뭐든 하나 정도는 할 수 있겠죠.”

린린은 굳이 그걸 미리 생각하면서 골치 아파해야 할 이유가 있냐는 듯이 귀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