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드레스 벗기기2021.09.05.
소나기니 기다리면 지나가겠지만 기다리는 동안 추운 것이 문제다. 건물은 정원 관리용인 듯했다. 온갖 원예도구와 씨앗 보관함 등이 온 사방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난로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봄이지만 아직 겨울의 기운이 가시지 않아 공기가 찼다. 거기에 젖기까지 하니 체온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젖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리시스의 이가 딱딱 부딪치기 시작했다. 리시스의 이 부딪치는 소리가 옆에 있는 키에르트에게까지 선명히 들렸다.
“괜찮나.”
“괘핸차하나아아요.”
전혀 괜찮지 않은 떨림이었다. 키에르트는 혀를 차며 덮을 것을 찾았다. 작은 무릎담요가 있기는 했지만 이미 젖은 몸 위에 덮어봤자 의미가 없을 터였다. 추위에 강할 수는 있지만 젖은 드레스를 겹겹이 입고서도 괜찮을 사람은 없다. 창밖엔 여전히 화살비 같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소나기가 언제 지나갈지 모른다.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오게 시킬 사람도 없다.
“차라리 벗지.”
“여, 여여, 여기서요?”
리시스도 이성적으로는 젖은 옷을 벗는 게 맞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키에르트와 단둘이 있는 으슥한 건물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이 감정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기가 몸을 파고들어 떨림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다.
“이러다 에드린의 공주가 폐렴으로 죽기라도 하면 진짜 큰일이 될 수도 있어.”
“에, 에드린의 공주였지만 이젠 쉬란의 황후라면서요…… 잇치!”
“쉬란의 황후가 즉위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죽는 것도 큰일이야. 그러니 빨리 재채기하지 말고 벗어.”
키에르트 앞에서, 그리고 방도 아닌 곳에서 옷을 벗어야 한다니. 이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상상의 동물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짜 이러다 죽게 생겼다. 리시스는 어쩔 수 없이 벌벌 떨며 드레스의 리본을 풀기 시작했다. 키에르트는 점잖게 몸을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고 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리시스는 다시 그를 돌려세워야 했다.
“……폐폐, 폐하.”
“왜.”
“좀 도와주셔야겠는데요.”
오늘 드레스는 앨린이 입혀 주었다. 전쟁터에서 혼자 입던 옷과 달리 남의 손이 입혀 준 드레스는 입는 것만큼 벗기도 힘들었다. 특히 매듭이 다 등에 붙어 있어 리시스가 아무리 용을 써도 손이 닿지 않았다. 더구나 물에 젖은 리본들은 저들끼리 칭칭 감기기까지 했다. 혼자 끙끙대던 리시스는 결국 키에르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뒤에 리본들 좀 풀어주세요. 도저히 저 혼자선 못 하겠어요.”
“……내가?”
벗으라 한 건 자신이지만 벗겨달라는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키에르트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물론 아무도 없었다. 키에르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리시스의 등으로 다가갔다. 생전 여자 옷의 매듭을 풀어주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리시스와 있으면 생전 처음 있는 일이 연달아 생긴다. 생전 첫 패배, 생전 첫 죽을 위기, 생전 첫 설득 구걸. 그나마 여자 옷 매듭 풀기가 가장 온건하고 생활에서 있을 법한 일이었다. 뒤통수로 날아오는 화살 쳐내기보다는 백배 천배 나았다. 암.
“해 보지.”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풀기 편하게 등을 돌려 보였다. 여자 옷을 입어 본 적도, 입혀 본 적도 없는 키에르트는 유심히 구조를 살펴야 했다. 그래도 리본 끝을 찾아내 풀기 시작하니 생각보다는 쉽게 풀렸다. 리본이 풀어지며 옷자락 사이로 얇은 속 드레스 한 겹뿐인 리시스의 등이 보였다. 키에르트가 손바닥을 쫙 펼치면 안에 다 들어올 것 같아 보일 정도로 작았다.
“작군.”
“……키 갖고 놀리시는 거예요?”
솔직한 감상에 리시스가 발끈했다. 작고 귀여운 몸인 탓에 어디서든 고생을 겪었다. 전쟁터에서도 무시받기 십상, 왕실에서도 애 취급받기 십상. 이제 황후가 됐는데도 황제에게 놀림을 받다니.
“아니, 그저 놀라워서. 이렇게 작은 몸에 어떻게 그런 힘이 숨어 있는지. 그대 덕분에 내가 몇 번을 죽을 뻔했잖아.”
“……저도 폐하 손에 몇 번 죽을 뻔했거든요.”
서로 주고받은 것은 똑같은데 왜 새삼 그런 얘기를 꺼내나 모르겠다. 리시스는 꿍얼꿍얼 불만을 토했다.
“제 키가 십 센티만 더 컸어도 폐하는 이미 묫자리에 누워 계실 텐데…….”
“그러게, 왜 못 커서 이리됐나?”
“못 먹고 자라서 그런가.”
“에드린은 공주를 굶겨?”
키에르트는 다시 한번 의문을 가졌다. 공주지만 공주답지 않은 부분이 또 추가가 되었다.
“세상 모든 부모가 다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건 아니에요.”
리시스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키에르트는 낮게 신음했다. 에드린 왕이 공주에게 애정이 없다는 것은 결혼 준비 과정에서 이미 눈치챘다. 하나뿐인 공주라서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았는데, 협약 사항을 조율하는 도중 에드린 왕은 유일한 물건을 가장 비싸게 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드레스도 화려하지 않았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리시스의 초라한 행색도 이해가 갔다. 어제의 만찬도 그랬지만 오늘 입은 드레스도 거의 궁에서 일하는 하녀가 입을 법한 수준이었다.
“드레스 정도는 황후궁의 예산으로 처리해. 모자라면 추가 예산을 내어 줄 테니 한도는 신경 쓰지 말고.”
“……정말요?”
“황후의 품위유지는 황실의 자존심이기도 하니까.”
원래대로면 리시스가 사적으로 사용하는 비용은 에드린에 청구를 하는 것이 협약 조건이었다. 하지만 리시스는 이제 쉬란의 황후이기도 했다. 쉬란의 황후가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황실의 자존심 챙기다 괜히 파산하실 수도 있어요?”
“해 봐.”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협박을 귀엽다는 듯 웃어 넘겼다. 리시스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돈을 써도 앉은 자리에서 불어나는 돈이 더 많을 것이다. 더구나 국가 예산 단위가 아니라 개인의 드레스 비용 정도는 작고 귀여운 돈이다.
“나중에 후회하면서 무르시기 없기예요?”
“얼마나 쓰려고.”
“진짜 제대로 돈이라는 걸 한 번 써 볼 수도 있죠?”
“황후가 호탕하게 돈 쓰고 다니는 것도 쉬란의 국력을 자랑하는 방편이지.”
뭘 하든 쉬란을 위한 이익으로 연결이 되어버린다. 리시스는 김이 새 버렸다. 키에르트가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게 영 쉽지 않다. 그래도 고민거리 하나는 엉겁결에 해결하게 되었다. 사실 티파티에 들어가는 비용 외에 드레스나 개인이 꾸미는 비용까지 대 달라 말을 꺼내기는 어려웠다. 에드린의 왕비는 왕에게 빌붙어 사는 입장이라 늘 지출로 눈치를 보았다. 쉬란은 황후궁이 독립적인 기관에 가까워서 황제가 관여하는 일이 없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사이에 낀 입장이 된 리시스의 자금줄은 그렇게 곤란한 상태였다. 그런데 키에르트가 먼저 나서서 말을 해 주다니. 그저 감사했다. 심지어 맘껏 쓰라며 관대하고 호탕하기까지 했다. 전선에서 쓰는 검 한 자루에도 종이 한가득 빽빽한 사유서를 제출해야 내키지 않는 듯 겨우 내주던 에드린 왕과는 천지 차이였다.
“황제가 황후를 챙기는 건 당연…… 엇.”
그때 사고가 일어났다. 키에르트가 풀고 있던 리본이 느슨해지며 물 먹은 무거운 드레스가 제 스스로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쑥 흘러내렸다.
“꺅!”
리시스는 당황하며 얼른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젖은 드레스를 벗으려고 풀고 있던 것이지만 너무 갑자기 벗겨져서 당황했다. 게다가 키에르트가 보고 있는 앞에서. 흘러내리는 드레스 앞섶을 움켜쥐고 우왕좌왕하던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폐하아아! 여기 계십니까! 억!”
“꺄악!”
리시스는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키에르트는 재빨리 팔을 뻗어 리시스를 품에 숨겼다.
시종장 제롬은 절규하며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그는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황제 폐하가 피하지 못했을까 봐 걱정이 되어 맨몸으로 달려왔을 뿐이었다.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초야 다음날의 아침이 겹쳐 보였다.
“죽여 주시옵소서!”
“나가!”
키에르트의 일갈에 제롬은 눈물을 뿌리며 문을 닫았다. 야속하게도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
“흐흣, 흐흐흣.”
앨린은 헤벌쭉한 얼굴로 리시스 앞에 앉았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티파티 예산안을 짜기로 한 날이었다. 한마디로 제대로 일하는 날이었다.
“일하는 게 그렇게 좋아?”
“파티를 짜는 것도 좋지만……, 궁 안에 쫙 퍼진 소문이 너어무 달아서요, 황후 폐하.”
“소문? 무슨 소문?”
“엥? 못 들으셨어요?”
앨린 말고 리시스가 황궁에서 개인적으로 교류하는 사람은 키에르트밖에 없다. 키에르트는 일정이 없으면 스칠 일도 없으니 리시스에게 소식을 물어 올 사람은 앨린뿐이었다. 심어 놓은 사람이 없으니 궁의 소식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정보에 뒤처지면 안 되는데, 리시스는 쓴 입맛을 다셨다. 앨린은 자신이 물어 온 소식에 흥분해 그런 리시스의 표정을 놓쳤다. 그만큼 엄청난 소식이었다.
“황제 폐하랑 황후 폐하께서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셨다고……!”
“……응?”
리시스의 얼굴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기껏 들려 온 새로운 소식이 자신과 키에르트의 로맨스라고? 심지어 있지도 않은 로맨스?
“뭐라고 소문이 났는데?”
“수국 정원에서요! 세니아 양이랑 황후 폐하께서 여름축제를 서로 맡겠다고 싸움이 났는데 황제 폐하께서 무조건 황후 폐하 편을 들어 주셨다면서요?”
세니아랑 싸웠……던가? 신경전 비슷한 기류가 흐르기도 전에 정리가 되어 싸울 겨를도 없었다.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편을 들어줬다고 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절차적으로 처리했을 뿐이니까. 긴가민가 아리송한 리시스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앨린의 수다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황후 폐하께서 마음이 상하신 바람에! 황제 폐하께서 달래주시려고 산책을 하다가 비가 내렸고!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곳에서 두 분이……! ……이상은 무엄하니 이만하겠습니다.”
앨린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닫았다. 무엄하긴 하지만 리시스가 듣기에도 꽤 그럴싸했다. 게다가 상황도 실제와 비슷했다. 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곳곳에 눈과 귀가 있던 모양이다. 앞으로는 말과 행동을 조금 더 조심해야겠다. 하지만 소문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화제성 없이 존재가 묻히는 것보다는 어느 쪽이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편이 힘을 가지기 쉽다. 더구나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소문이라니. 얻어걸렸다.
“그런데 진짜세요? 진짜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 뿅 반하신 거예요?”
“반하신 것까진 모르겠고 잘 해주시기는 하는 것 같네.”
리시스는 은근슬쩍 아주 부정하지는 않았다. 실상이야 어떻든 겉보기에 두 사람이 따끈따끈한 분위기라는 건 긍정적인 신호였다. 이 소문이 로구안까지 널리 퍼지게 되면 더욱 좋겠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조금 더 본격적으로 냄새를 풍겨도 괜찮겠다 싶었다.
“내가 급히 준비를 하느라 변변한 드레스도 없는 것이 마음 불편하셨나 봐. 예산 신경 쓰지 말고 맘껏 마련하라던데.”
“꺄아아!”
돈 문제 해결만큼 기쁜 소식은 없었다. 앨린은 드디어 자신의 이상이 코앞으로 다가온 현실에 만세를 불렀다.
“그럼 뭐부터 시작해 볼까요, 황후 폐하?”
“돈 쓰는 일부터?”
돈이 생긴 이상 천하무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