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 자꾸 져서 화가 남 (35/153)

35. 자꾸 져서 화가 남2021.12.02.

16549361083031.jpg

  티티는 다행히 멀지 않은 나무에 붙어 있었다.

16549361083039.png“티티!”

그러나 티티는 리시스가 한 발 다가가면 한 발 멀어지고, 겨우 잡을 만하면 또 샥 빠져나가버렸다.

16549361083039.png“아니, 저, 이, 아휴.”

반가운 마음도 잠깐. 순순히 잡히지 않는 모습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 저놈은 원래 저랬지. 잡히면 빗질 삼백 번 할 줄 알아. 양치까지 시킬 거다. 정신없이 티티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담장 안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더 이상 시종들의 목소리는 닿지도 않았다.

16549361083039.png“여긴 뭐지?”

리시스는 사방을 둘러보며 경계했다.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듯한 정원이었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키가 큰 정원수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사냥터 못지 않은 무성한 숲이 담장 안에 우거져 있었다. 황제궁에 왜 있는지 모를, 용도가 불분명한 공간이었다. 이런 곳은 꼭 뭔가 심상치 않은 곳이던데. 시종들이 죽어라 말리면서 따라 들어오지 못하는 것도 이제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얼른 티티만 찾아 나가야지. 그러나 그새 숨어버린 티티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작은 짐승이 숨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하지만 리시스도 티티를 잘 알았다. 어떤 곳에 숨었을지 대충 찍을 수 있었다. 리시스는 앞을 가리던 나뭇가지를 밀쳤다.

16549361083039.png“여깄지!”

그러나 나뭇가지 뒤에 있던 것은 티티가 아니었다. 아니, 티티가 맞기는 했다. 티티와, 티티의 모가지를 잡고 있는 키에르트였다.

16549361083058.jpg“삐왜애액! 삐왝!”

키에르트의 손아귀 안에서 티티가 거칠게 저항했다. 일반 다람쥐보다는 크고 고양이보다는 살짝 작은 티티는 작정하고 몸부림치면 당해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키에르트의 큼지막한 손아귀 안에서 티티는 꼼짝도 못 했다.

16549361083039.png“어어, 그. 폐하.”

16549361083065.png“이걸 잡으러 들어온 건가?”

16549361083039.png“그……렇긴 한데요.”

키에르트는 날뛰고 있는 티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16549361083065.png“어디서 본 것 같은데.”

리시스는 뜨끔 놀라 순간적으로 표정이 흔들렸다. 티티는 평범한 새앙다람쥐가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용되던 아이였다. 오며가며 눈에 띄었을 수도 있다.

16549361083065.png“전서다람쥐, 맞지?”

16549361083039.png“아, 아닌데요.”

헷갈리기라도 할 것이지. 어떻게 한 번에 알아볼 수가 있나. 리시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일단 부정했다.

16549361083065.png“아는 다람쥐는 맞네.”

16549361083039.png“아, 아닌데요!”

16549361083065.png“모르는 다람쥐인데 전서다람쥐가 아닌 건 어떻게 알아?”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머리가 안 돌아간다더니. 정곡만 꼭꼭 찔러버리는 키에르트의 추궁에 리시스는 순식간에 궁지로 몰렸다.

16549361083039.png“그냥…….”

두 눈 똑바로 뜨고 거짓말하기 어려웠다. 리시스의 눈이 슬그머니 옆으로 돌아갔다. 양심이 어디에 있나.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키에르트의 눈은 가늘어졌다. 어디 언제까지 잡아 뗄 생각일까?

16549361083065.png“…….”

16549361083039.png“맞기는 한데요…….”

결국 리시스는 인정했다. 하지만 이대로 네, 압수당할게요. 라며 내어줄 수도 없었다. 의외의 사실인데, 키에르트에게는 뻔뻔하게 우기는 것이 잘 먹혔다.

16549361083039.png“……봐 주세요.”

리시스는 조금 더 바싹 다가가 키에르트의 팔에 매달……, 리지는 못했다. 손이 닿기 직전 멈칫했다. 그놈의 사교계의 교태로운 손가락 예절이 바로 떠올라버렸다. 몸으로 배우면 이래서 무섭다. 머리보다 먼저 움직여버린다.

16549361083039.png“진짜 제 가족 같은 아이예요!”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잡는 대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잡고 애원했다. 눈물도 그렁그렁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는 안 되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키에르트를 곤란하게 할 수는 있었다.

16549361083039.png“눈 먼 화살에 맞아 죽어가고 있던 아이를 구해줬더니 저를 너무 잘 따라서 그 후로 그냥 귀여워서 이래저래 훈련을 시키고, 그러다 보니 심부름 몇 번 한 게 다예요!”

16549361083065.png“부상당한 걸 주워다가 잘 키워 전서다람쥐로 만들었단 소린가.”

사실이 그러했다. 하지만 리시스가 말한 것과 느낌이 달랐다. 왜 같은 사실인데, 다른 느낌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16549361083039.png“그냥 다람쥐가 아니라 제! 다람쥐예요! 우리는 서로 교감을 하고, 서로가 소중하니까 다른 거라고요!”

16549361083065.png“그런데 왜 도망가.”

16549361083039.png“지금 잠깐 놀라서 그런 거예요. 놔 보세요.”

키에르트는 티티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지금 이걸 놓아줬다가 도망치기라도 하면? 상상되는 갈래가 너무 많았다. 리시스가 중요한 궁 안의 정보를 보내려다가 걸린 것이면 쉬란에 치명적인 손해가 될 수도 있다. 황후인 리시스가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보통의 첩자가 수집할 수 있는 것보다 많았다.

16549361083065.png“도망가면.”

16549361083039.png“이젠 안 도망갈 거예요.”

결국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대로 들고 가서 조사해 볼 수도 있지만 그럼 보는 눈이 많아진다. 단순히 궁에 들어온 동물을 황후가 키우는 정도로 끝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어도 키에르트가 손해 볼 건 없었다. 하지만.

16549361083065.png“……하아.”

키에르트는 손에 힘을 풀고야 말았다. 사람이 저렇게 애원하는데. 아무도 아니고 황후가.

16549361083058.jpg“삐익, 끽!”

티티는 키에르트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리시스에게 전력 질주했다.

16549361083039.png“티티!”

리시스는 달리던 속도 그대로 리시스의 품에 날아든 티티를 꼭 안아들었다. 티티는 꼬리 끝까지 꽁꽁 말아넣어 리시스의 품안에 폭 숨었다. 보송보송한 털 속에 손가락을 넣어 쓰다듬으며 리시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소 과장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티티가 소중한 것은 맞았다.

16549361083039.png“감사해요, 폐하.”

이번에는 고마움에 진짜 눈물이 맺혔다. 키에르트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무르게 대처했다. 평생 모르고 살았던 인간미가 요새 폭발하는 모양이다. 봐 주는 건 여기까지고. 따질 건 따져야 했다.

16549361083065.png“하지만 그대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줘야 해.”

‘이곳’에 무단침입한 것부터, 전서다람쥐로 쓰던 동물을 궁에서 정말 키울 것인지 등등. 이것은 키에르트도 쉬란의 황제로서 물러설 수 없었다. 리시스도 일단 티티가 자신의 품안에 들어오자 안정을 되찾았다. 순순히 협조할 의향을 보였다.

16549361083039.png“뭐든 물어보세요. 아, 근데 티티한테 물 좀 먼저 주면 안 될까요?”

16549361083065.png“……이름이 티티야?”

16549361083039.png“네, 귀엽죠! 앞니가 이만큼 커서 뭐 먹을 때 티티티틱 소리가 나거든요. 그래서 티티예요.”

티티는 귀엽다. 귀여우면 조금이라도 관대해지지 않을까. 조그만 단서라도 소중히 이용해야 했다. 묻지도 않은 정보를 줄줄 늘어놓으며 티티의 귀여움을 드러내 보이려 노력했다. 서슴지 않고 티티의 코를 들어 앞니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16549361083058.jpg“삐액!”

직후에 신경질 난 조그만 손에 얻어맞기는 했지만 확실히 친해 보이기는 했다. 물지 않고 새싹만큼 작은 손으로 때린 것만으로도 많이 참아줬다는 것이 보였다. 키에르트는 저 작은 것의 성질머리에 실소했다. 저렇게 작아도 이빨에, 발톱에, 성질머리까지 꼼꼼히 다 갖췄다. 작고 하찮은데 그게 귀여워서 마음이 늘어졌다. 또 리시스가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는 점에 반쯤 늘어져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게 되었다. 전서동물이 황궁에 들어오고, 황후는 그걸 잡겠다고 금지된 장소까지 무단침입했다. 엄하게 다스려야 하는데 자꾸만 물러져 버렸다. 이를 어쩌나.

16549361083058.jpg“삐힝…….”

티티는 리시스의 품안에서 애교어린 소리를 냈다. 어리광 부리는 짐승의 옹기종기한 행동에 자꾸 눈이 갔다. 키에르트는 자신의 엄격함이 이미 저 세상 멀리까지 가 버렸음을 인정했다.  

16549361166764.png

16549361083065.png“우선 여기서 나가지.”

여기서는 물을 먹이고 싶어도 풀과 나무밖에 없었다. 키에르트는 자연스럽게 리시스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팔을 내밀었다.

16549361083039.png“어, 으음. 티티를 안고 있어서요. 그냥 따라갈게요.”

그런데 리시스가 어색하게 거리를 벌렸다. 티티는 한쪽 팔에 매달려 있어서 충분히 다른 쪽 손을 내밀 수 있었다. 키에르트는 따지지는 않았지만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스코트를 위해 손을 내미는 것까지 거절할 정도로 거리를 둘 필요는 없잖아?

16549361083039.png“얘가 또 도망가면 어떡해요.”

리시스의 핑계는 적당했다. 손 하나 내놓지 않는다고 더 따지고 드는 것도 이상했고. 키에르트는 먼저 몸을 돌렸다. 맘대로 해라. 이미 자신의 맘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16549361083039.png“그런데 여기는 뭐예요? 황제궁 안에 사냥터가 또 있었어요?”

그런 키에르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시스는 관광 가이드라도 따라가는 양 질문도 했다. 이젠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찾았다. 정신없이 헤맸을 때에는 ‘여긴 뭐야! 티티가 숨을 곳 투성이잖아!’란 생각만 했는데 이제 보니 이런 곳이 왜 황제궁에 붙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16549361083065.png“음.”

그런데 키에르트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못 들은 척 걷기만 했다.

16549361083039.png“?”

리시스는 문득 이상함을 느끼며 키에르트의 등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키에르트가 자신에게 뭔가를 대답하지 않고 숨겼던 적은 없었다. 하다못해 세니아와의 관계까지 시원하게 오픈했던 사람이다.

16549361083039.png“황후도 알면 안 되는 곳이에요?”

16549361083065.png“위험한 곳이야. 그냥 숲처럼 보여도 사방에 함정이 있고 독초도 많아.”

16549361083039.png“황제궁 근처에 왜 그런 곳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16549361083065.png“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랬겠지?”

키에르트는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리며 선을 그었다. 구체적인 대답의 거절이었다. 진짜로 대답해 주기 난감한 이유도 있었지만, 약간의 심술도 섞여 있었다. 어디 거절당하는 느낌을 너도 한번 겪어봐라, 하는 못된 마음이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의도대로 움찔 놀랐다. 지금껏 리시스가 밀어내기만 했지 키에르트에게 밀린 적은 처음이었다.

16549361083065.png“그러니 앞으로는 이런 사고 일어나지 않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16549361083039.png“어……, 네…….”

리시스는 눈치 빠르게 더 묻는 대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밀쳐졌다고 아파할 만큼 연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던 사람에게 밀쳐져서 그런가. 가슴 언저리가 얼얼했다. 황제궁 안의 숲은 아주 작았다. 빠져나가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빠져나가려 했으면 훨씬 오래 헤맸을 것이다. 키에르트의 말처럼 지나가는 길에 보인 함정만 열 개가 넘었다.

16549361083039.png“진짜 함정이…… 있네요?”

키에르트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설핏 돌아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충고했다.

16549361083065.png“어디 가서 그 소리는 절대 하면 안 돼. 지금껏 그 함정을 보고 살아 나간 사람은 없거든.”

16549361083039.png“…….”

리시스는 다시 얌전히 침묵했다. 선을 밟으면 의기소침해진다. 웬만큼 선을 볼 줄 안다고 생각하고 살아서 더 그랬다. 사람의 마음은 진흙처럼 여렸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해도 한순간의 실수로 확 멀어지고는 했다. 아무리 사람 마음 얻는 일에 익숙해졌다 생각해도 방심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는데. 키에르트가 너무 편하게 대해줘서 마음을 확 놓아버렸던 모양이다. 리시스는 쭈뼛쭈뼛 쪼그라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