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 아, 안 돼요! (39/153)

39. 아, 안 돼요!2021.12.16.

16549362005876.png“아, 안 돼요!”

16549362005881.png“내가 뭘 할 줄 알고.”

키에르트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았다. 잡은 손을 타고 징징 진동이 울리는 것 같았다. 리시스는 이번에야말로 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해 진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꺄악, 하고 손을 털려는데, 키에르트가 힘을 주어 꽉 쥐어버렸다. 도망도 칠 수 없었다.

16549362005876.png“이, 이상한 짓…….”

16549362005881.png“이상한 짓 뭐.”

16549362005876.png“아무튼 지금은 안 돼요!”

리시스는 두 눈을 꼭 감으며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그렇게라도 하면 눈앞의 현실이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 마냥.

16549362005876.png“모든 건 순서가 있다고 했어요!”

16549362005881.png“순서?”

16549362005876.png“네! 먼저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볼키스를 하고, 춤을 추고…….”

평소에 너무 당연히 했던 것들이라 순서가 따로 있는 줄도 몰랐다. 새삼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교양을 들으니 신선했다. 물론 사교계에서 그걸 다 지키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손도 잡기 전에 눈 맞았다고 입부터 맞추고 방으로 달려가는 사람들도 숱하게 많았다. 하지만 그건 리시스에게 알려주기는 일렀다. 키에르트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처음의 계약조건은 잊지 않았다. 리시스가 허락하는 만큼만. 하지만 리시스도 허락할 마음이 들게 설득하는 건 막지 않았다.

16549362005881.png“그래, 그럼. 손을 많이 잡으면 포옹으로 넘어가게 되는 건가?”

16549362005876.png“어,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평생 절대 안 넘어간다고는 못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못 했다. 키에르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를 채서 더 그랬다. 포옹이나 춤을 연습하자고 했으면 흔쾌히 그러자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 입술을 쳐다보고 난리인가. 키스하고 싶은 것처럼.

16549362005876.png‘키스라니!’

리시스는 단어만으로도 스커트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키스는 리시스의 세상에서 전설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손등에 키스를 받았을 때의 감촉이 입술에 닿는다고 생각하면……. 궁금한데, 궁금하지 않기도 했다. 아무튼 지금은 아니었다.

16549362005881.png“그럼 종종 손을 잡지. 시간이 맞으면 수업도 같이 들어가고.”

16549362005876.png“어. 그건……, 좋아요.”

키에르트 덕분에 손잡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한 번에 떨칠 수 있었다. 다른 남자 손잡는 건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춤도 키에르트와 합을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허멀 후작도 키에르트가 도와준다면 대찬성을 할 것이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허락에 싱긋 웃으며 다시 걸음을 디뎠다. 손을 앞뒤로 달랑달랑 흔들며.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마냥 즐거웠다.

16549362035379.png

  *** 죽을 뻔했고, 잔뜩 혼난 뒤 돌아왔지만 돌아오는 길은 즐거웠다. 내심 손만 달랑달랑 하는 것 다음도 살짝 기대가 될 정도였다. 키에르트가 원하는 것 같았던 키스까지는 멀었지만 끌어안고 둥가둥가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키에르트는 몸도 크고 단단하니 안기면 안정감이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있었다. 안겨봤던 기억이 하나도 없는 것도 아닌데, 참. 자꾸 까먹는다. 하지만 그건 다 잠깐 잠깐이었고. 본격적으로 꼭 끌어안으면 또 느낌이 다를 것 같았다.

16549362005876.png“음, 둥가둥가…….”

전선에 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리시스는 밤에 화장실을 못 가서 울었었다. 화장실은 가고 싶고, 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 밖을 걷는 것도 무섭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우는데, 렉싱턴 장군이 그걸 발견했다. 그때는 렉싱턴 장군도 무서웠다. 너무 크고, 장군답게 표정도 무뚝뚝해서. 하지만 그는 다정하게 리시스를 달래주었다. 무서움과 낯섦에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리시스를 달래기 위해 렉싱턴 장군은 어부바를 해 주었다. 앞에서 봤을 때는 위압적인 몸통이, 뒤에서 업히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구르다가 자도 될 만큼 넓었다. 그날 이후로 체통을 지키셔야 한다며 다시는 업어주지 않았지만, 그 편하고 따뜻한 기분은 내내 잊히지 않았다. 키에르트와 안아도 그럴 것 같다는 기대감이 솟았다. 몽글몽글한 기분으로 황후궁에 들어서는데, 앨린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맞이했다.

16549362035388.jpg“오셨어요.”

16549362005876.png“……뭐야?”

16549362035388.jpg“올 것이 왔어요. 생각보다 너무 이르게.”

16549362005876.png“응?”

앨린이 내민 것을 받아보니, 고상하고 우아한 편지봉투였다. 봉투 겉장에 쓰인 이름을 발견한 리시스가 어, 하고 놀랐다.

16549362005876.png“세니아?”

16549362035388.jpg“네, 티파티 초대장일 거예요.”

봉인을 뜯고 선 채로 내용을 눈으로 훑어보니 앨린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일전의 초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황후 폐하께 작게나마 차를 대접하고 싶어 자리에 청하옵니다.』 말이야 고왔지만 일정이 흉폭했다. 위치는 당연히 세니아가 살고 있는 렌데일 공작가의 저택. 그리고 문제의 날짜.

16549362005876.png“……일주일 뒤?”

티파티 준비는 최소 한 달 전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지 않았나. 지금은 리시스의 티파티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이건 준비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참가하는 사람도 빠듯한 일정이었다.

16549362035388.jpg“일부러 그렇게 정한 걸 거예요. 황후 폐하께서 쉬란의 매너 교육을 받고 계시다는 걸 알아낸 것이 분명해요.”

준비가 미흡한 티파티일지라도, 리시스가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속셈이었다. 그렇게까지 압박하려 든다고? 일주일이면 리시스도 벅차기는 했다. 하지만 준비를 못 할 건 아니었다. 문제가 되는 건 남성을 상대로 하는 접촉이었지 그 외의 것은 물 흐르듯 진도를 잘 빼고 있었다. 허멀 후작의 일정만 맞으면 일주일 내에 대비하는 것은 문제없었다. 드레스도 박물관에서 잔뜩 가져왔겠다, 오히려 세니아가 이렇게 일정을 잡은 것을 후회하게 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16549362005876.png“색출은 아직이야?”

16549362035388.jpg“송구합니다……. 각방으로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하녀장은 몸 둘 바를 모르며 고개를 조아렸다. 하녀장이 색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리시스도 알았다. 황후궁 안의 분위기가 바짝 얼어붙고 있었다. 그러나 색출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16549362035388.jpg“쉽게 꼬리를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를 찾았다 싶으면 다른 하나가 걸리고, 그렇게 다 들어내려고 보니 아예 황후궁에 일하는 하녀들 전체가 얽혀 버렸습니다.”

16549362005876.png“본인도 모르는 사이 첩자 짓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

까다로운 작전이다. 리시스는 눈앞의 전투에 신경을 쓰는 편이라 그런 침투나 첩보전까지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병법을 들어서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라도 같은 방 쓰는 동료에게 수다를 떨다가 정보를 넘기게 되는 일은 흔하다. 특히 이렇게 같이 먹고 자며 일하는 사람들끼리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중, 삼중 숨어 있으니 누가 범인인지를 꼭 집어내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16549362005876.png“하지만 앞으로도 모든 정보를 냉큼 넘겨주며 살 수는 없으니…….”

허멀 후작이 ‘내가 황후 폐하의 과외교사요.’ 하고 떠벌리고 다닐 사람은 아니다. 공공연히 알렸던 것도 아니니 이 사실이 퍼져나갔다는 사실은 첩자가 물어 날랐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는다. 이번에야 무사히 넘어갔다 쳐도, 정보를 상대에게 쥐여 주는 것 자체가 자신의 입장을 불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잡기는 해야 했다.

16549362005876.png“당분간 전원 휴가를 보내.”

16549362035388.jpg“예?!”

16549362005876.png“당분간 황후궁 일은 하녀장이랑 앨린 둘이서 어떻게든 해줘.”

16549362035388.jpg“그, 그게 어떻게든 될 일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리 리시스의 말에 충성하는 하녀장이어도 애초에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는 하지 못했다. 황후궁은 일단 컸다. 하루만 청소를 하지 않아도 온 사방이 먼지 천지가 된다. 청소만 담당하는 사람만 열 명이 넘었다. 기간이 얼마가 될지는 몰라도 전원 휴가를 보내버리면 황후궁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버릴 것이다.

16549362005876.png“음……, 어떻게 안 되면…….”

방법을 잠시 고민하던 리시스는, 만능열쇠를 꺼내들었다. 세상에 남편만큼 쉬운 열쇠가 없었다.

16549362005876.png“폐하한테 도와달라지 뭐.”

한 번이 어렵지, 이젠 습관이 되었다. *** 같은 시각. 황제궁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16549362005881.png“에드린 왕이?”

16549362035388.jpg“예, 정식 사절은 아닙니다.”

키에르트는 어이가 없어 콧방귀를 뀌었다.

16549362005881.png“그러니까, 이제 와서 내다버린 공주를 ‘딸’ 취급하며 정다운 편지를 보내셨다?”

16549362035388.jpg“그렇습니다.”

16549362005881.png“내용은.”

편지는 단단히 밀봉되어 있었지만 밀봉을 건드리지 않고 내용을 알아내는 방법도 있었다. 키에르트는 수하가 건넨 편지 내용의 복사본을 받아들었다.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 들었다. 황제와도 사이가 좋다고.』 딸 취급하며 보낸 편지 치고는 바로 본론이었다. 몸은 괜찮은지, 먹을 건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자식을 타국에 보낸 부모의 걱정은 한 줄도 없었다. 키에르트는 인상을 쓰며 다음 줄로 시선을 옮겼다. 『부인답게 애교도 좀 피우고, 귀엽게 굴어 보아라. 그러면 혹시 뭐라도 하나 더 받아낼 지 아느냐.』 안 그래도 애교가 철철 넘치고, 귀엽다. 이미 키에르트에게서는 쪽쪽 잘 뽑아가고 있다. 아니, 본인이 뽑지 않아도 키에르트가 알아서 뽑아주고 있다. 하지만 에드린 왕이 말하는 것은 드레스 몇 장 정도가 아니겠지. 키에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16549362005881.png“에드린이 요구할 만한 것이 뭐가 있지?”

16549362035388.jpg“로구안 경계 지역의 군사 배치로 문제가 있다 합니다.”

키에르트의 밀정도 에드린에 심어져 있다. 서로의 패를 훤히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패를 숨기는 짓을 얼마나 오래 반복해 왔는지 모른다. 다행히 에드린 왕은 미련해서 대부분 키에르트만 일방적으로 들여다보았다.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은 리시스의 패뿐이었다.

16549362005881.png“에드린 왕에게 정보는 어떻게 들어간 거지?”

착실히 대답하던 미하엘이 처음으로 주저했다. 궁으로 돌아온 지 오래되지 않아 그도 모든 것을 파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키에르트가 지적한 것은 큰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두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봤자 쉬란에 머무는 귀족들의 사교계 안이다. 넓은 듯하지만 은근히 좁고, 밀집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대놓고 소문을 퍼뜨리려 한 로구안에서도 아직 반응이 없다. 그런데 에드린 왕의 편지가 먼저 도착했다. 거의 실시간으로 정보가 새어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16549362035388.jpg“털어보겠습니다.”

16549362005881.png“안 그래도 황후궁에 다른 집 쥐가 있던데.”

16549362035388.jpg“……겸사겸사 잡아보지요.”

16549362005881.png“쥐 소굴이었던 모양이야.”

키에르트는 집 청소에 큰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집에서 쥐가 우글거리는 꼴까지 보아 넘겨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청소는 미뤘다가, 한 번 할 때 대대적으로 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황제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1654936213028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