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2022.01.30.
공주가 맞고 자라? 구박을 받았다, 시비가 걸렸다, 정도였다면 이렇게 벌떡 일어나지는 않았다.
“누가 감히 그대를 때려?”
“뭐……, 왕비님이나, 왕자들이나……. 에드린 왕도 술 취해서 뭐 집어던지기도 했고요.”
리시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키에르트의 머리에는 불이 확 붙었다. 이런 망할 놈들. 저 작고 가녀린 몸 어디에 손 댈 곳이 있다고. 자신은 손끝 하나 대는 것도 조심스럽게 거리 두고 있는데, 때려? 감히, 때려? 협약이고 뭐고 확 전쟁 내서 쳐들어가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 쳐들어가버리고 싶은 나라가 리시스의 나라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머릿속의 천불만 활활 끓었다.
“어릴 때 얘기예요.”
리시스가 웃으며 따라 일어나 앉았다. 키에르트는 숨을 길게 늘여 머릿속을 채운 뜨거운 김을 내보냈다.
“그 후로는?”
“그 후로는 전쟁터로 몰렸죠. 거기까지 따라와서 때리진 않았어요.”
리시스는 스스로의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웃기지 않았다. 옛날 얘기처럼 하고 있지만 비교적 최근 일이기도 했다.
“대신 암살자가 오기 시작했죠.”
또 울컥 화가 났다. 때리다 못해 암살자? 그러나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그들에게 리시스는 힘없는 서녀였다. 돈 들여 암살자를 보낼 만큼의 입지가 아니었다. 때리는 것이야 자기 손이니 공짜다. 암살자는 돈과 작전이 든다. 실패했을 때의 부담도 생긴다.
“왜 그렇게까지 했지?”
“제가 작전에 끼기 시작한 후부터 거슬렸나 봐요. 에드린 왕이 자꾸 비교하면서 욕했다고도 하고…….”
왕자들이라고 곱게 싸서 키울 위인이 아니었다. 왕자든 공주든 다 자신을 위한 장기말에 불과했다면, 그러고도 남았다. 왕자들 역시 졸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끓어올랐어도 자신들을 괴롭힌 에드린 왕에게 직접 복수하지는 못했다. 결국 가장 약한 리시스를 없애는 쪽으로 머리가 굴러간 게 눈에 훤히 보였다. 키에르트는 노골적으로 혐오의 빛을 띄웠다.
“형편없는 것들이군.”
“그게 사실이라 욕 같지도 않네요.”
리시스는 덤덤하게 동의했다. 왕자들은 화를 낼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궁에 있을 때 보면 늘 답답하고 한심했다.
“암살자는 그 찌질한 놈들만 용돈 털어 보냈던 건가?”
“아, 아뇨. 뒤로 갈수록 좀 다양해졌어요.”
“어디어디였지?”
새겨뒀다가 나중에 리시스가 쫓아가서 죽여도 좋다고 허락하면 당장 목을 딸 작정이었다.
“우선 폐하가 있겠네요.”
“…….”
아차. 가장 많이 보낸 건 자신이었다. 시간의 틈이 민망하게 벌어졌다.
“저도 폐하께 보냈으니까 원한은 없어요.”
리시스는 관대하게 덮어주었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적이었다. 목숨을 노리는 것은 당연한 전략이지 비인륜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키에르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지금은, 이죠?”
사탕도 언젠가 입 안에서 녹아 사라진다. 지금의 달콤한 결혼생활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키에르트가 보여주는 당장의 마음은 고맙지만 스스로 그것에 취하지 않게 경계해야 했다. 자신들의 결혼은 정략결혼이다. 에드린과 쉬란은 계약을 했다. 계약은 언제고 종료된다.
“앞으로도 계속.”
그러나 키에르트는 함부로 영원을 말했다. 친절은 감사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받는 것에 익숙해지면 더 이상 받지 못할 때 슬퍼진다. 리시스는 스스로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었다.
“이러다 에드린이 다시 전쟁 일으켜서 결혼이 깨져도요?”
“…….”
키에르트는 당연하지를 외치려다 멈칫했다. 현재의 관계에서는 연결이 잘 되지 않았지만, 불과 몇 달 전의 상황이었다.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키에르트는 천천히 숨을 삼키고 뱉었다. 지금 당장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있는 이 사람. 내 아내. 내 황후. 리시스. 그러나 언제든 에드린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깨달았다. 키에르트도 쉬란의 황제였다. 황제가 아닌 키에르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로서 쉬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다시 전쟁터에 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둘은 반드시 전쟁터에서 마주치게 된다. 서로에게 칼을 들어야 한다. 지금껏 이어져 온 전쟁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키에르트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리시스는 가만히 키에르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움찔대거나 피하지 않았다. 키에르트의 손끝이 리시스의 앞머리에 닿았다. 이마에 흘러내린 한 올을 떼어내는 동안도 순하게 눈을 깜빡이고만 있는다. 긴 머리카락을 타고 키에르트의 손길이 미끄러져 내리는 동안도 무방비했다. 전쟁터였으면 이 손이 목을 향하진 않을까, 손바닥에 날붙이를 숨기고 있지는 않을까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을 텐데.
리시스도 그때와는 달라졌다. 한 번 생긴 물길이 굵어지듯, 관계의 흐름도 한 번 휘기 시작하면 아무 일 없던 양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 두 나라가 다시 전쟁을 일으켜 우리가 칼을 들고 만난다 하더라도.”
머리를 매만지는 손에도 조용하던 리시스의 눈빛이 그 말에 흔들렸다. 키에르트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암살자는 안 보내지.”
“……? 아?”
마주 미소 지으려던 리시스가 멈칫했다.
“……아, 그러니까, 암살자‘는’ 안 보내시겠다?”
“응, 그러니 밤에는 편히 자.”
이것 참 알쏭달쏭한 배려였다. 전쟁 중에 암살자를 안 보내주겠다니 참 고마운 일이긴 한데……, 어째 더 받을 걸 덜 받은 느낌이다. 그게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럼 저는 보내도 돼요?”
“……그러기야?”
이번엔 키에르트가 비슷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리시스는 왠지 통쾌해졌다. ***
“……?”
리시스는 눈앞에 보이는 사람에 멍해졌다. 폐하가 왜 여기 있으세요?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눈빛을 잘도 알아보았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폐하까지 움직이시면 호위 동선이 다 꼬이잖아요.”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나.”
굉장히 막무가내였다. 리시스는 진정으로 괜찮은지 제롬과 미하엘에게 표정으로 물었다.
“…….”
“…….”
두 사람의 표정은 물론 좋지 않았다. 그래도 결사반대까지 나오지는 않았다. 자신들의 몫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였다. 자신들은 황제 폐하를 보위하는 사람들이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잘 맞춰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두 사람이 말을 아끼자 리시스도 말릴 이유가 없어졌다.
“그……, 하지만 옆에 그러고 앉아 계시게요?”
“왜? 이 정도면 허름하지 않나?”
“…….”
허름……. 허름의 사전적 의미를 바꿔야 할 것 같다. 키에르트는 어디서 구했는지 진짜 허름한 옷을 구해 왔다. 옷만 보면 망해가는 귀족 가문의 영식 같았다. 하지만 옷이 문제가 아니었다. 얼굴이 그렇게 화려한데 옷이 무슨 문젠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모공에서 귀티가 줄줄 흘렀다. 키에르트가 거지 옷을 입는다 한들 거지 옷을 입은 황제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망토를 뒤집어 쓰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안 보이는 데 숨어 계세요.”
키에르트는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잘 납득하지 못하는 태도에 리시스는 한숨을 쉬며 자신을 가리켰다. 평소에 입던 허름한 드레스를 입은 리시스는 딱 망할락 말락 하는 가문의 아가씨처럼 보였다.
“이 정도는 돼야 사람들이 속죠. 폐하는 너무 귀하신 분 티가 나서 안 돼요.”
“그대도 귀해 보여.”
리시스도 눈이 달려 있다.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적당히 객관적으로 볼 줄도 알았다. 자신은 딱 망하기 직전의 귀족가 영애로 보였다. 반데스 가문도 딱 그 상황이라 잘 맞춰 보았다.
“아니, 그건 아니고요……. 일단 가시죠.”
마차 문을 열었더니 키에르트가 앉아 있었다. 이미 앉아 있는 키에르트를 내쫓을 수는 없다. 리시스는 포기하며 마차에 앉았다. 일부러 허름해 보이려고 빌린 짐마차의 내부는 좁고 불편했다. 출발을 하니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덜컹거렸다.
“……굳이 왜 이 고생을 사서 하세요.”
“내 황후인데 내가 지켜야지.”
“아니, 뭐…….”
내 사람이라고까지 말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리시스는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자꾸 이런 간지러운 말을 하시는데……, 좀 감동이긴 하다. 욕하는 것보다는 몇 만 배 나았다. 기분이 좋아지긴 했지만 괜히 티내고 싶지는 않은 기분. 리시스는 공연히 새초롬한 표정으로 허리를 세웠다. 짐마차는 다각다각 최악의 승차감으로 길을 달렸다. 반데스 가문은 시내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안전한 장소였다. 그렇게 한적한 곳에 있는 저택은 누가 숨어들기도 어렵다. 반데스 가문의 하인들은 당일 모두 휴가를 주어 저택을 비웠다. 대신 황제궁의 시종들과 친위대원들이 하인 행세를 했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맞이한 사람은 앨린이었다. 리시스는 반갑게 달려가 앨린을 끌어안았다.
“어머! 이게 얼마 만이야!”
하루 만이었다. 귀엽고 소박한 계획에는 앨린의 먼 사촌이 시골에서 올라왔다는 설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어, 오랜……, 만이에요, 언니…….”
앨린은 어색하게 리시스의 등을 토닥였다. 죽었다 깨도 언니 같지는 않았지만 차마 황후에게 반말을 할 수 없어 그렇게 설정했다.
“얼른 들어가세요……. 근데 저분, 아니 사람은 뭐죠?!”
빨리 데리고 들어가서 이 어색한 설정을 끝내버리고 싶던 앨린은 마차 안에서 뒤따라 내리는 키에르트를 발견하고 기겁했다. 왜 거기서 황제 폐하가 나오시는 건데요!
“아, 저분,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야.”
“음,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졸지에 아무것도 아니게 된 황제 폐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닐 수가 없었다. 앨린은 거의 울었다.
‘이런 건 얘기에 없었잖아요!’
‘대충 해.’
사촌인 척하는 것도 혹시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염탐꾼에 대비한 작전이었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연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리시스는 대충 두 사람을 몰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은 시종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반데스 남작과 가족들도 절대 나오지 말라고 엄금해 두었다. 원래도 각자 방에만 처박혀 사는 사람들이니 그래야 평소와 같아 보일 거였다.
“그럼 내 방은 어디야, 앨린아?”
“크헙!”
리시스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앨린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줄줄 울며 앨린은 계단 위로 안내했다.
“이, 쪽요, 언니…….”
시녀는 너무 극한직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