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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남성성에 대한 강한 주장 (57/153)

57. 남성성에 대한 강한 주장2022.02.17.

16549366602041.jpg“저는 황후 폐하의 충실한 시녀로서, 황후 폐하의 고민을 함께해 드릴 것입니다.”

앨린은 늠름하게 시녀로서의 면모를 내세웠다. 그러나 눈빛은 듣고 싶어 미치겠다는 듯이 희번덕 빛나고 있었다. 그냥 고민도 아니고, 황제 폐하와의 합궁에 대한 고민이다. 이건 놓칠 수 없었다.

16549366602041.jpg“차라도 한 잔 드시면서 찬찬히 말씀해 주세요.”

16549366602051.png“응…….”

리시스는 영혼 없이 앨린이 내민 차를 홀짝 마셨다. 맛에 대한 평도 없고, 반응도 없었다. 앨린은 자신이 그렇게 무난한 맛의 차를 내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앨린은 긴가민가하게 리시스의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한 입에 다 털어 넣어 남아 있는 찻물이 없었다. 이번엔 실수로 잘 내렸나? 앨린은 시녀의 본분 중 차 내리기에 끔찍하게 재능이 없었다. 리시스가 가지고 온 재료로는 특히 더 그랬다. 리시스가 독극물을 순화하여 훌륭한 차를 만들어낸다면, 앨린은 독극물로 독극물을 만들어 냈다.

16549366602041.jpg“으읍, 컥!”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 입 차를 마셨던 앨린은 그대로 유명을 달리할 뻔했다. 그럼에도 리시스는 멍하니 빈 찻잔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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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366602041.jpg“안 쓰세요?”

16549366602051.png“모르겠어…….”

16549366602041.jpg“……이 맛도 모르시겠다고요?”

16549366602051.png“몰라……, 아악! 몰라!”

리시스는 머릿속에 뱅뱅 도는 키에르트의 짓궂은 미소 때문에 절규했다. ‘남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안 들 수 없게 하는’ 짓은 대체 무슨 짓인가. 그것도 합궁날 밤에. 뭔가를 하긴 하겠다는 뜻인데, 대체 뭘 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리시스는 알헨크의 평가처럼 지나치게 순진했다. 어렴풋이 느낌은 와도 구상이 되지는 않았다. 진짜 아무것도 몰라서.

16549366602041.jpg“황제 폐하와 무슨 일 있으셨어요?”

16549366602051.png“폐하가…….”

16549366602041.jpg“네, 폐하가.”

16549366602051.png“……아니, 아냐.”

앨린은 울컥해서 식탁을 엎어버릴 뻔했다. 이건 반칙이지! 말하지 않을 거면 말을 꺼내지 말고, 고민도 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연애사는 듣고 들어도 재미있다. 그것이 황제 커플이면 더 재미있다. 더구나 망할 수가 없는 키워드, 선결혼 후연애의 전형 아닌가! 최측근이라는 장점을 살려 뭔가 들을 줄 알았던 앨린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근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앨린은 리시스가 꺼내 놓은 작은 단서들을 주워모았다.

16549366602041.jpg“그러니까, 폐하께서 합방 날 뭔가를 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거예요?”

16549366602051.png“어떻게 알았어?!”

황후 폐하께서, 본인의 입으로 말씀하셔서요. 화들짝 놀라는 리시스는 저절로 앨린의 지레짐작이 사실임을 증명해 버렸다. 앨린은 흡족스러운 마음을 숨겼다. 고민 있는 사람은 곪은 여드름처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알아서 톡 터진다.

16549366602041.jpg“폐하께서 얼마나 엄청난 무엇을 작정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오……?”

16549366602051.png“어, 엄청난 무엇, 작정……. 뭘 어떻게 작정하신 걸까?”

16549366602041.jpg“글쎄요, 밤에 남녀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무궁무진하다던데. 다른 힌트는 없으셨어요?”

16549366602051.png“어……. 본인의 남성성에 대한 강한 주장을 하셨긴 했어…….”

16549366602041.jpg“어머나. 어머나!”

살짝 건드리기만 했는데도 숨겨져 있던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평생 스캔들 한 번 나지 않았던 철두철미한 황제 폐하시다. 남들은 썸타고 연애하고 지지고 볶는 동안 폐하께선 ‘그런 쓸데없는 감정놀음은 왜 하지?’ 하는 눈으로 차게 쳐다보기만 하셨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런 황제 폐하께서? 황제 부부는 대체로 표면적으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사석에서까지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건 새벽 출근해서 새벽 퇴근하는데 집까지 일거리를 가져가는 것이나 똑같은 짓이었다. 키에르트와 리시스는 이미 일반적인 황제 부부보다 특히나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16549366602041.jpg‘진짜로 뭔가 작정하신 게 분명하다!’

리시스가 본의 아니게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황제를 향해 강철의 성벽을 쌓아올린 것을 모르는 앨린의 머릿속에는 이미 소설 한 권이 뚝딱 만들어졌다. 하룻밤만에 지독하게 얽혀버린 마음. 그러나 황후는 역할에만 충실해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하고, 답답한 황제 폐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들이댄다! 실제와는 몹시 달랐지만 묘하게 결론만은 비슷하게 맞아 떨어졌다.

16549366602051.png“……어떡하지? 뭘 하시려는 생각이지?”

뭘 하시긴요. ‘으으으른만’ 아는 뭔가를 최선을 다해 ‘여어얼심히’ 하시겠죠. 하지만 앨린도 최소한 지켜야 하는 체면이라는 것은 알았다.

16549366602041.jpg“음, 그걸 제가 말씀드리긴 어려울 것 같고요……. 하지만 큰일 나겠어요? 차라리 기대해 보시면 어떨까요? 초야를 생각해 보시면 되잖아요.”

16549366602051.png“초야…….”

아무 일도 없었다. 장기만 머리가 터지도록 두었지. 초야의 핵심 행위를 건너뛰었다는 걸 앨린 앞에서 티낼 수는 없었다.

16549366602041.jpg“어떠셨어요? 해가 중천을 넘어갈 때까지 침실을 안 떠나셨잖아요!”

16549366602051.png“아주…….”

앨린은 미끼를 문 잉어처럼 생기발랄하게 눈을 빛냈다. 이제 와서 모른다고 발뺌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리시스는 최대한 보편적이고 다방면에 적용 가능한 단어를 고르고 골랐다.

16549366602051.png“……집요하셨지.”

16549366602041.jpg“어머나, 꺄아!”

-승부에 발동이 걸리니-는 생략했다. 얼추 앨린이 생각한 ‘초야’에 들어맞는 말이었는지 반응이 적절했다.

16549366602041.jpg“그리고요? 또요!”

16549366602051.png“그리고……. 열……정적이시고.”

16549366602041.jpg“어머, 어머!”

16549366602051.png“……틈을 보이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물어뜯을 기세셨는데…….”

16549366602041.jpg“세상에!”

차마 험한 말을 할 수는 없었는지 이상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거기에 담긴 진심만큼은 뚜렷했다. 그게 좋은 거구나. 리시스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를 말했다. 리시스의 편법에 내리 세 판 진 뒤,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물어뜯어버리고 싶은 눈빛으로 노려봤었다.

16549366602051.png“그게……, 좋아?”

16549366602041.jpg“그럼요! 완전 설레요!”

16549366602051.png“…….”

그 무서운 눈빛이 좋고 설레는 거라면, 작정하면 얼마나 더 무서워질 수 있다는 걸까. 혹시 키에르트의 살해 예고였을까. 리시스는 배가 터지도록 겁을 집어먹었다. *** 리시스가 겁을 집어먹는 동안 키에르트는 결전에 임하는 각오를 다졌다. 이상하게 리시스와 관련된 일은 언제나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 전쟁터에서도 그랬고, 장기도 그랬고, 이제는 하다하다 남자로서의 매력 어필마저도 그렇게 되었다. 어디 가서 남성미 없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않았고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역사가 없는 키에르트였다. 훤칠한 키, 드넓은 어깨와 등, 단단한 뼈마디, 탄탄한 근육.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물구나무서서 봐도 남자였다. 가끔 무도회에서 눈이 마주치는 여인들이 한숨을 내쉬는, 남성미 넘치는 남자. 키에르트는 목욕 후, 빈틈없이 짜인 자신의 몸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수건을 들고 다가오던 제롬이 이상한 듯 물었다.

16549366602041.jpg“왜 그러십니까?”

16549366694212.png“혹시 내가 매력이 부족한가?”

16549366602041.jpg“별 해괴한 질문을 다 하십니다.”

키에르트는 완벽했다. 황제로 태어나서 완벽한 것인지, 완벽한 사람이니 황제가 된 것인지 앞뒤의 선후는 모른다. 하지만 ‘황제 = 완벽함’의 공식은 키에르트의 것이었다.

16549366694212.png“그럼 부족한 것이 매력은 아니란 소린데.”

16549366602041.jpg“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16549366694212.png“황후가 가끔 내가 남자라는 걸 깜빡깜빡 하는 것 같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남편인데. 남자라는 자각이 없는 건 큰 문제가 아닌가?”

제롬은 키에르트의 소원을 진지하게 귀담아 듣고 고민했다. 황제의 곁에서 사소한 치다꺼리를 하기도 하고 말상대를 하며 고민을 해소해 주는 것도 시종장의 업무였다. 그러나 오늘 키에르트가 꺼내는 말들은 얼토당토가 없었다.

16549366602041.jpg“역사상 황제 폐하를 남자로 의식한 황후 폐하가 있으셨습니까?”

목석처럼 누워서 할 것 하고 가세요, 했던 황후들의 일화는 특정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황제를 남자로 의식하며 애태워 품에 안겨든 황후는 없었다. 그런 건 황후가 아니라 정부에게서 기대할 일이었다.

16549366602041.jpg“그걸 황후 폐하께 기대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16549366694212.png“왜?”

16549366602041.jpg“역할이 아니니까요.”

16549366694212.png“하지만 내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않나?”

16549366602041.jpg“그걸 어떻게 내키게 만드실 생각입니까.”

16549366694212.png“그러니까 물었잖나. 매력이 부족한 것 아니냐고.”

16549366602041.jpg“으으으으음…….”

제롬은 드디어 머리가 터지기 직전까지 갔다. 그건 매력의 차원을 넘어 두 사람의 관계의 바닥부터 다시 다져야 할 문제였다. 그런데 그걸 하시겠다고? 황후 폐하랑 달짝지근한 소문을 파다하게 뿌리더니, 그 소문이 역시 진실이었음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으신 것인가.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일방적으로 애정과 관심을 구걸하는 건 너무 많이 온 것 아닌가 싶다.

16549366602041.jpg“취향이 아니면 답이 없지요, 사실. 취향을 어떻게 다 맞춥니까.”

16549366694212.png“결국 영원히 불가능하다?”

16549366602041.jpg“아뇨, 그런 말씀을 드린 건 아닙니다만…….”

16549366694212.png“그럼 하면 되겠군.”

제롬은 입술을 물었다. 불가능이란 없다. 어떻게든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키에르트는 이제껏 몇 번이고 그런 기적을 일으켜 왔다. 그런데 이번 기적은 어느 방향부터 시도해야 할지 막막했다.

16549366602041.jpg“일단 황후 폐하의 취향부터 파악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6549366694212.png“음.”

키에르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리시스가 뭘 좋아하더라?

16549366694212.png“꽃?”

그래, 길가에 핀 잡초 같은 꽃도 좋아했으니 꽃을 좋아하는 건 확실했다. 제롬은 신중하게 키에르트의 말을 복기했다.

16549366602041.jpg“예, 꽃……. 또 뭐가 있으십니까?”

16549366694212.png“음……. 수학 문제?”

16549366602041.jpg“……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매한 취향이었다. 꽃과 수학문제라니. 이걸 어떻게 연결시키란 말인가. 제롬의 머리가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16549366602041.jpg“그……, 꽃을 든 지적인 남자?”

16549366694212.png“아?”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막 던졌는데 키에르트가 진지하게 받았다. 이렇게 반응이 좋으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의견을 내놓아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낀다. 제롬은 다시 한번 신중히 던졌다.

16549366602041.jpg“꽃을 든……, 몸 좋고 지적인 남자?”

정말 대충 던졌다. 좋은 것만 다 갖다 붙이긴 했는데 아무리 곱씹어 봐도 좀 이상했다. 제롬은 살짝 반성했다. 조금 더 생각하고 말할 걸 그랬나. 하지만 키에르트의 눈은 두 번, 세 번 빛났다.

16549366694212.png“……괜찮은데?”

얻어걸렸지만 기쁘지는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진정으로? 일단 황후 폐하의 취향에는 맞아야 할 텐데. 과연 꽃을 든 몸 좋고 지적인 남자로 될까? 말만 들어도 고기에 초콜릿 올려 먹는 느낌이었다. 제롬은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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