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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소유의 키스 (61/153)

61. 소유의 키스202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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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367513745.png“사실 고민 많이 했지.”

리시스가 읽었던 빨간 책도 참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몇 권 봤다가 도저히 실현 가능성이 없어서 미뤄두었다. 애초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지부터가 의문인데, 그걸 어떻게 손도 겨우 잡는 사이에 하겠나. 그보다 분홍색 책들이 알려 준 것이 더 유용했다. 부모에게 학대받은 여주인공이 견디지 못해 집을 뛰어나왔는데, 마차에게 치일 뻔한 위기에서 우연히 지나가던 남주인공이 구해주며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리시스의 상황과도 얼추 맞았다. 그럴 때 남주인공들이 여주인공에게 멋져보이는 방법은 하나였다. ‘다정하게 대하기!’ 키에르트는 쉬란 기준으로 그렇게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냉랭한 황제 폐하였다. 괜히 어중이떠중이 붙는 것이 싫어 거리를 두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예의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리시스에게도 처음에는 적당선의 예의만 지켰다. 그런데 시시때때로 리시스는 그것에 감동하고는 했다. 키에르트도 당황했었다. 감동시키려고 한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시스가 그런 걸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큰 수확이었다.

16549367513745.png“남성성이라는 것이 꼭 강하고 폭력적이어야만 드러나는 건 아닌 것 같더군.”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시스와 달리 키에르트가 제대로 잘 고른 책들은 다른 길을 알려주었다. 키에르트는 가만히 팔을 뻗어 리시스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리시스는 움찔하면서도 얌전히 키에르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이 사태의 발단은 머리카락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웬 놈이 ‘남자’의 손길로 리시스를 만지려 든 탓에. 리시스는 그 때문에 키에르트를 ‘남자가 아닌’ 무언가로 규정했었다. 키에르트도 그 때문에 울컥했던 것인데, 차차 공부해 보니 굳이 울컥할 이유가 없었다. 사람을 긴장시키는 것은 쉬워도 편하게 만드는 건 어려웠다. 긴장감으로 가득 찬 관계는 언젠가 터질 수 있다. 편한 것은 놓기 어렵다. 이미 합궁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긴장하는 리시스다. 여기서 더한 긴장감을 주는 건 퇴각하는 적군에게 칼을 들이대며 투항하라 설득하는 짓이었다.

16549367513745.png“그대는 내 ‘아내’잖아.”

황후가 아닌 ‘아내’라는 말에 리시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549367513745.png“적어도 ‘내’ 아내가 ‘내’ 품안에서는 편안하게 해야 진짜 남자 아니겠어?”

16549367513768.png“아…….”

키에르트는 ‘내’에 유난히 힘을 주었다. 리시스는 강조된 소유격에 침을 꿀꺽 삼켰다. 맞는 말인데……. 틀렸다고 할 부분이 없기는 한데…….

16549367513745.png“틀렸나?”

리시스는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16549367513768.png“폐하랑 저는……, 그, 남녀관계가 아니라 동맹관계……잖아요.”

16549367513745.png“남녀관계가 우선이고, 그 관계의 거리를 동맹으로 협상한 거지.”

키에르트가 정정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리시스는 더욱 할 말이 궁해졌다. 그러니까 키에르트와 소유격 달린 관계가 맞기는 한데, 왠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어색함이 견딜 수 없이 컸다.

16549367513768.png“그럼 폐하도 ‘제’ 남자고, 뭐 그렇게 되는 거예요?”

16549367513745.png“아니었어?”

키에르트는 웃으며 되물었다.

16549367513768.png“……어.”

리시스는 당연하다는 듯 돌아온 키에르트의 대답에 멈칫했다. 왜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하지 못했을까. 지금까지 늘 일방적인 소유와 의무를 강요받아 그렇게 생각하는 방법도 몰랐다. 에드린‘의’ 공주 리시스, 쉬란‘의’ 황후 리시스. 반대로 리시스의 에드린, 리시스의 쉬란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소속당했기 때문에 의무를 다해야 한다, 자신을 희생해서 내놓아야 한다. 그것밖에 몰랐다. 반대로 소속된 곳에서 주는 것은 당연히도 없었기 때문에. 키에르트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을 내려 리시스의 손등을 슬쩍 매만졌다. 리시스는 눈을 내리 깔아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16549367513768.png“제 것.”

16549367513745.png“그래. 그대도 내 것이듯이.”

키에르트는 소유를 확인하듯 리시스의 손등을 몇 번이고 매만졌다. 그러나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손끝이었다. 저것이 자신의 것이라 한다. 물이 가득 든 통을 발로 찬 것처럼 가슴속이 출렁였다. 쉬란으로 올 때 빈손으로 왔던 것처럼 리시스는 무언가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꽃을 받았다. 너무 기뻤다. 시장에서 만지작거리던 온갖 농기구도 자신의 것이 되었다. 그 순간이 떠올랐다. 무언가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란 뿌듯함. 그것이 자질구레한 물건도 아니고, 쉬란을 대표하는 키에르트라는 거대한 사람이었다. 너무 커서 덜컥 겁이 났다. 지금은 가진다 하더라도 언젠가 반납할 때가 올 것이다.

16549367513768.png“언제까지요……?”

키에르트가 눈썹을 미미하게 들어올렸다. 그러나 흔들린 속내를 티내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인내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16549367513745.png“그대가 원할 때까지.”

16549367513768.png“빼앗기거나 놓칠 바엔 가지지 않고 싶어요.”

16549367513745.png“빼앗기지 않으면 되지. 도망가지 않으면 되고.”

16549367513768.png“그게 제 맘대로 되나요?”

16549367513745.png“빼앗기지 않을 만큼은 강하잖아, 그대는.”

리시스는 고개를 들었다.

16549367513745.png“세니아와 싸워서 지지 않을 정도면 그대를 이길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없지 않을까?”

키에르트의 확신 어린 장담에 리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다. 에드린 왕이 훼방을 놓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접었다. 이미 자신은 친서를 찢어버릴 정도로 강해졌다. 그렇다면 정말, 자신이 가져도 되는 거지? 리시스는 탐욕스럽게 키에르트의 손끝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16549367513768.png“그럼, 당분간 폐하는 제 거예요.”

리시스는 손을 뒤집어 키에르트의 손끝을 꼭 붙들었다. 키에르트는 자신의 남편이니까, 자신의 것이다.

16549367513745.png“그래.”

그도 리시스의 손을 마주잡았다. 이제는 손을 맞잡아도 껄끄럽거나 안절부절못하지 않았다. 리시스는 그 사실에 멋쩍어졌다.

16549367513768.png“그런데, 정말 마냥 편하기만 해도 돼요?”

16549367513745.png“그걸 바란다니까.”

16549367513768.png“으, 으음…….”

키에르트가 그렇다니 믿긴 믿었다. 그래도 긴가민가했다. 너무 다 자신에게 좋은 것들만 있었다. 이렇게 자신에게만 좋은 것만 해도 되는 건가 모르겠다.

16549367513745.png“그럼 누워서 편하게 얘기할까?”

16549367513768.png“좋아요.”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손을 끌어 침대로 갔다. 초야에는 공포스럽기 그지없던 침대가 이제는 얼른 눕고 싶은 편한 장소로 인식되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내민 팔을 베고 냉큼 누웠다. 키에르트의 바람대로 이제 그의 팔베개는 베개보다 더 편하고 안락했다. 체온이라는 것은 강력했다.

16549367513745.png“소화는 됐나? 더 앉아 있다가 누울 걸 그랬나?”

16549367513768.png“아뇨, 저 소화 잘 시켜요. 먹다 자고, 자다 먹고, 다 잘해요.”

리시스는 소화기관 자랑을 했다. 덕분에 전쟁터에서도 까탈스러운 공주님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남들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자고, 두개를 섞어도 잘하는 것은 전쟁터에서 큰 장점이었다. 먹고 자는 것만 잘하면 사람은 웬만큼 잘산다.

16549367513745.png“훌륭하네.”

키에르트도 대견하다는 듯 칭찬했다. 스스로 자랑해 놓고 칭찬을 받으니 민망한 마음도 들어 리시스는 괜히 몸을 옆으로 데굴데굴 굴렸다.

16549367513745.png“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키에르트는 팔베개를 해준 팔 말고 다른 팔로 리시스의 배를 토닥였다. 배와 등허리는 은근히 만질 일이 많은 곳이다. 춤을 출 때도 그렇고, 말에서 내리거나 에스코트를 받을 때 등등 의외로 만질 일이 많았다. 리시스는 아무렇지 않게 배를 내밀고 누워 키에르트의 손길을 얌전히 받았다. 키에르트의 손길에도 이상한 느낌은 없었다. 배부르겠다, 침대 포근하겠다, 목과 배에 닿은 체온은 따뜻하겠다. 리시스는 기분이 좋아져서 헤실헤실 웃었다.

16549367513768.png“엄마 같아요.”

그래서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16549367513745.png“……뭐?”

모든 말을 다 편하게 받아주리라 다짐하던 마음이 싹 날아가는 헛소리였다. 키에르트는 불끈했지만 간신히 가라앉히고 친절하게 확인했다.

16549367513745.png“엄……마처럼 친근하다는 소리지?”

16549367513768.png“어릴 때 엄마가 이렇게 재워줬던 기억이 있어요.”

반쯤 잠결이라 아직 제정신 못 차린 리시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금 자신이 키에르트를 또 건드렸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몰랐다. 키에르트는 좋은 남자인 척 다정하게 웃으며 잠시 멈칫했던 손을 계속 움직였다.

16549367513745.png“엄마가 이렇게 배를 토닥거리며 재워줬나? 자장가는?”

16549367513768.png“음……, 음치였던 것 같은데…….”

그나마 자장가는 안 불러줘도 돼서 다행이다. 키에르트도 노래에 크게 소질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16549367513768.png“대신 책을 많이 읽어줬던 것 같은데…….”

16549367513745.png“그리고, 또?”

16549367513768.png“자기 직전엔 굿나잇 키스 해 주고?”

16549367513745.png“굿나잇 키스. 어디에?”

16549367513768.png“음……, 뭐, 그냥. 이마랑 뺨이랑.”

쪽.

16549367513768.png“……?”

이건 무슨 소리지? 소리뿐만이 아니다. 이마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 낯설고, 또 낯설고, 아니, 그냥 낯설다고밖에 할 수 없는. 남의 입술. ……입술? 리시스는 얼음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잠결에 가물거리던 정신이 확 돌아왔다.

16549367513745.png“이마, 그리고 뺨?”

16549367513768.png“어, 으어, 어어어?”

키에르트의 입술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잠결에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헛것도 아니었다. 리시스는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컥 숨이 막혀 신음했다. 눈앞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리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쪽. 다시 이어진 부드러운 접촉. 이번엔 뺨이었다. 리시스가 말한 대로,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이마와 뺨에 굿나잇 키스가 떨어졌다. 그러나 엄마가 해 주었던 키스처럼 잠꼬대를 하며 뿌듯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리시스의 얼굴에 치솟은 홍조는 순식간에 임계점을 돌파해 머리끝으로 펑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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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367513768.png“으, 아, 아!”

16549367513745.png“쉿. 또 호위들이 지레 겁먹고 달려올라.”

키에르트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리며 속삭였다.

16549367513768.png“아, 그건 그렇죠.”

이 와중에도 그건 곤란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리시스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성을 챙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49367513745.png“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 엄마와 똑같이 해 줬을 뿐인데.”

16549367513768.png“아니, 그게, 그.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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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367513768.png“모, 몰라요.”

같은 입술, 같은 위치, 같은 의도의 키스인데 달라도 너무 달랐다. 키에르트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양 고개를 갸우뚱하며 웃었다. 리시스는 혼자 부끄러움에 몸부림쳤다. 키에르트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자신만 이상해진 것 같았다.

16549367513745.png“한 번 더 해보면 알지 않을까?”

16549367513768.png“예? 뭘요?”

16549367513745.png“키스.”

일부러일까. 키에르트는 굿나잇, 을 생략하고 말했다. 그러나 맑고 곧은, 다정하기 그지없는 눈빛에 다른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자신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16549367513768.png“네, 그럼. 네.”

16549367513745.png“그래.”

키에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리시스의 입술에 쪽, 입술을 마주쳤다.

16549367513768.png“!”

리시스가 경련하듯 몸을 튕겼다. 그러나 이미 입술은 닿은 후였다. 키에르트의 입술이 그 이상 만족스러울 수 없게 휘어 올라갔다. 역시, 상상하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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