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나랑만 해2022.03.24.
“어머. 많이 피곤하세요?”
“잠시 쉬시겠습니까, 폐하?”
다행히 키에르트는 황제였고, 황제의 건강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안이었다. 두 사람 모두 헛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었다. 키에르트는 고개를 저으며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사람들 앞에서 리시스의 춤 솜씨를 제대로 선보이는 것은 중요하다. 전쟁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 온 리시스는 그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에드린과의 분위기가 다를 수도 있고. 쉬란에서는 춤이 사교의 방법이었다. 화려한 화술만큼이나 춤 솜씨도 사교계를 휘어잡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쉬란의 황후는 사교계의 중심이어야 했다. 후발주자인 리시스가 사교계에 뼈가 굵은 아가씨들과 견주어 이겨내려면 완벽해야 했다.
“아니, 계속하지. 시간이 없으니.”
키에르트는 자기 자신을 다잡으며 이미 잡고 있던 리시스의 손을 힘주어 고쳐 잡았다. 손바닥 안에 리시스의 작고 보드라운 손의 감촉이 가득 찼다.
“네, 감사해요.”
동시에 어깨 위에 올라오는 깃털 같은 손의 무게. 가슴 속에서 화산이 터진 것처럼 뜨끔, 아픈지 뜨거운지 구분되지 않는 통증이 일었다. 겉으로 보이지 않게 참았지만 가슴에서 용암 같은 열기가 흘러내렸다. 서 있는 것만으로 심장은 한계까지 몰렸다.
“황제 폐하, 움직여 주십시오.”
“아? 아아. 어.”
춤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허멀 후작의 재촉에 키에르트는 어찌어찌 몸을 움직였다. 당연하게도 평소의 유려한 춤 솜씨는 발휘되지 않았다. 목각인형처럼 삐걱거리는 키에르트의 움직임은 사교계에 처음 진출한 어린 도련님 같았다.
“거기서 허리에 감긴 손을 따라 몸을 한 바퀴 핑그르 도시고, 가슴을 밀며 다시 원래 위치로, 예, 그렇지요.”
하지만 리시스의 솜씨는 기대 이상으로 뛰어났다. 키에르트가 아무리 엉망으로 움직여도 허멀 후작의 지시에 맞추어 착착 움직였다. 오히려 리시스의 움직임에 키에르트가 덩달아 따라가게 될 정도였다.
“그렇지요. 꼭 남성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속으로 깜짝 놀라며 흥미로워 할 수도 있습니다.”
“아하, 꼭 따라만 가야 하는 건 아니구나.”
금세 요령을 익힌 리시스는 흥미로워하며 움직였다. 하나를 배운 리시스는 열을 할 줄 알았다.
“그럼 여기서 이렇게 해도 되나?”
리시스의 손가락이 키에르트의 손끝에 걸렸다. 키에르트가 움직이지 않아도 혼자 빙글 돌며 스텝을 밟았다. 목석처럼 서 있기만 해도 리시스가 꽃잎처럼 팔랑거리며 주변을 돌아 그럴싸한 춤이 되었다.
“멋지십니다!”
허멀 후작은 순수하게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남들은 몇 년이 걸려도 겨우 박자를 따라가는데, 리시스는 불과 몇 시간 만에 혼자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타고난 재능이었다. 원래 타고난 재능은 키에르트의 수식어였는데 순식간에 리시스의 것이 되었다.
“저 어땠어요? 같이 추는 입장에서.”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칭찬도 욕심냈다. 보기에 좋은 춤도 중요하지만 같이 춘 사람의 느낌도 중요하니까.
“아, 어.”
“아, 어? 끝이에요? 별로였어요?”
“아니, 그.”
키에르트는 사실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없었다.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스친 리시스의 손길만 남아 있었다. 지금도 어깨에 닿아 있는 손길만 느껴졌다. 하지만 무슨 말이든 꺼내야 했다.
“나랑만 춰.”
“……예?”
진짜 무슨 말을 해 버리면 어떡하나. 키에르트는 자신의 입을 후려치고 싶었다. 덕분에 정신은 조금 났다.
“너무 매력적이야. 다른 남자와 추는 걸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어머.”
잘했다, 처음인데 곧잘 한다, 정도의 칭찬만 기대했다. 따지자면 감자 한 알 정도의 칭찬이었다. 전선에 있을 때는 식량이 굉장히 소중했다. 그래서 고기 한 점, 감자 한 알을 준다는 것은 굉장한 호의이자 칭찬의 의미였다. 그런데 키에르트는 감자를 포대에 담아 와르르 쏟아놓는 것 같은 칭찬을 해 주었다. 리시스는 기쁨에 볼을 붉혔다.
“진심이야. 가능하면 거절해 주었으면 좋겠어.”
“황후가 그래도 되려나요?”
“황후 마음이지. 정 사교계 활동 때문에 춰야만 한다면 딱 한 놈만 골라서 추든가 하면 안 되겠나?”
그걸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칭찬으로 해석한 리시스는 대답 대신 키득키득 웃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허멀 후작도 푸근하게 웃었다.
“황후 폐하의 춤은 황제 폐하께서 조바심이 나실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그런데, 황제 폐하? 황제 폐하께선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나 허멀 후작은 지적할 건 지적하는 사람이었다. 리시스에게 흠잡을 것은 많지 않았다. 초심자라 어쩔 수 없는 자잘한 실수나 어색한 부분은 시간이 해결해 줘야 하는 부분이니 굳이 짚지 않았다. 지금은 그 생동하는 매력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리시스는 에드린 출신이다. 완벽하면 가장 좋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타고난 재능에 모두가 놀랄 것이다. 다만 키에르트의 심각하게 저하된 실력은 문제였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춤이 아니라 체조를 하시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만.”
허멀 후작의 냉정한 지적에 리시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춤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접하고 붕붕 떠서 키에르트가 그런 줄도 몰랐다. 가만 생각해 보니 처음에 자신을 자유자재로 이끌어주고 춤을 끌어갔던 키에르트와 사뭇 동작이 다르긴 했다. 먼저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던 적극성은 온데간데없고 리시스와 닿을 때마다 끼긱 소리가 날 정도로 뻣뻣했다. 꼭 춤이 아니어도 몸이 그렇게 뻣뻣하게 움직이는 것은 큰일이다. 무술에 조예가 깊은 키에르트는 스스로의 몸을 관리할 줄 알았다. 그런 키에르트가 춤 정도의 가벼운 동작에 뻣뻣할 정도면 컨디션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안색도 안 좋으세요. 혹시 열 있으신 것 아니에요, 폐하?”
“아,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혹시 근육이 뭉치셨나? 요새 일 무리하신 것 아니에요? 여기 안 좋으신 거죠? 어깨랑 허리가 뻣뻣하신 거면 이쯤일 텐데.”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어깨와 승모근을 꽉 쥐었다. 걱정한다고 한 일이었지만 키에르트는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 가슴이 콩당콩당거려 두 손이 가슴까지 올라가려는 걸 애써 참았다. 하마터면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린 채 팽 돌아 도망가는 수줍은 모습을 보이는 불상사는 겨우 막았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속마음은 세상모른 채 순진하게 그의 몸만 걱정했다. 악력을 끌어모아 어깨를 주물거리며 안색을 살폈다.
“여기 시원하세요? 여기가 좀 뭉치신 것 같긴 한데……. 어때요?”
“괘, 괜찮아.”
“아니에요. 뭉쳤는데.”
입김만 불어도 훅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리시스의 손길이 왜 이렇게 강경하게 느껴지는지. 키에르트가 쳐내지도 못하고 도망가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는 사이 홀랑 당했다. 당했다고 표현하면 조금 이상하지만, 기분은 그랬다. 안마를……, 당해버린 기분…….
“음, 이건 안마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아니, 괜찮아.”
“아니에요, 행사 준비도 준비지만 폐하의 몸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계속해도 될까, 허멀 후작?”
“물론입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 대신 결단력 있게 상황을 정리했다. 전선에서도 자신의 몸부터 챙기지 않고 과도한 충성심과 의무감으로 무리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렉싱턴 장군이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사람들은 곁에서 챙겨주고 일부러라도 쉬게 하지 않으면 언젠가 진짜 큰일이 난다. 그래서 리시스는 키에르트에게 더욱 강경하게 휴식을 들이밀었다.
“폐하는 일단 쉬세요. 어차피 저도 할 일이 있으니까 그걸 미리 하면 돼요.”
“……그러지.”
어차피 더 붙잡고 있어도 자신의 집중력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안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명에 얌전히 따랐다.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발목만 잡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잔뜩 들었다.
“여차하면 어의도 꼭 불러서 괜찮은지 확인 받으시고요.”
“그래.”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염려어린 당부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바꿨다. 리시스의 손길을 의식한 탓에 어색해진 것이지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하지만 왜? 지금까지 멀쩡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몸이 굳는 것은 분명 이상했다. 생각해 보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이전에 리시스의 쪼가리 잠옷을 입은 모습을 봤을 때. 그때도 심각할 정도로 의식했었다. 여성의 몸에 면역이 없어서일 리는 없다. 황태자로 태어난 키에르트는 당연히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나이부터 연회에 참석했다. 연회에서 춤을 추느라 잡은 여성의 손만 수백, 수천은 족히 되고도 남을 것이다. 리시스가 ‘여자라서’라는 이유는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그 외의 이유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정말 몸에 뭔가 이상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키에르트는 자신의 몸이 이렇게까지 통제되지 않는 경험이 낯설었다.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황제궁으로 돌아온 키에르트는 당장 어의부터 불렀다.
“시도 때도 없이 몸이 굳고, 부정맥 증상이 일어나신다고요. 가끔은 미열도 동반하면서.”
“손이 떨리기도 하고, 정신이 혼미해질 때도 있어. 눈앞이 아찔하고.”
“일단 진찰을 하겠습니다.”
키에르트는 건장한 청년이었다. 타고난 체질도 튼튼했거니와 본인이 매일 신체를 갈고닦기도 했다. 전쟁터를 누비는 튼튼한 몸은 평소 자잘자잘하게 아파서 어의를 볼 일이 없었다. 오랜만에 황제 폐하를 뵙는 어의는 신중한 손길로 촉진을 시작했다. 탁-!
“?”
그러나 손이 키에르트의 몸에 닿자마자 떨어졌다. 자의는 아니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몰라 어리둥절했다. 어의는 자신의 내쳐진 손을 내려 보았다가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키에르트가 어의의 손을 걷어치운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 폐하? 소신이 뭔가 불충한 짓을 했나이까?”
맹세코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왜 황제 폐하는 불쾌함 한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단 말인가. 어의는 억울했다. 그러나 키에르트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던 타인의 손길마저 신경이 쓰였다. 매우 나쁜 쪽으로. 리시스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이 닿는 것이 불쾌했다. 리시스의 손이 닿으면 머리가 하얘지고, 다른 사람의 손이 닿으면 불쾌감이 치솟았다.
“내가 왜 이러지?”
키에르트는 스스로를 알 수 없어 미칠 지경이 되었다. 언제고 자신이 말했던가. 그대 때문에 미치겠어. 이제는 벗어난 줄 알았는데 리시스는 몇 번이고 키에르트를 미치게 만들었다. 리시스의 의도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키에르트는 더욱 미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