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이혼하면 되지 2022.05.08.
리시스의 저력을 맛본 두 남자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밖에서 지켜보는 전투와 실제 맞서 싸운 전투는 체감의 깊이가 달랐다. 숨이 막히게 몰아쳤다. 이것이 실제 전투였으면 완벽한 전멸이었다.
“와아아아! 황후 폐하 만세!”
승리에 도취된 병사들은 리시스가 에드린의 공주라는 것도 홀랑 잊어버렸다. 쉬란의 황후 폐하는 전투도 잘하신다! 병사들의 고양된 분위기에 다른 사람들도 박수를 치며 맞춰주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어찌되었든 전장에서 고생한 병사들이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황후 폐하!”
“멋있으셨어요!”
리시스의 등장으로 인해 어색해졌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날아갔다. 이제는 적국의 공주가 아닌, 쉬란의 황후만 남았다.
“자, 황후 폐하. 그럼 이제 소원을 말해 보시겠습니까?”
사회자가 리시스에게 다가와 물었다. 승자의 소원을 빌 차례가 되었다.
“아. 뭐 하지?”
소원 때문에 나섰던 것이 아닌 리시스는 소원권의 사용처에 난처해졌다.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어 한참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소원권을 쓸 만한 일이 없었다.
“으음, 으으음…….”
리시스의 고민이 길어지자 사회자가 옆에서 거들었다.
“모든 걸 갖추신 황후 폐하시니 소원하실 것이 없을 수 있지요! 그래도 승자의 권리이니 뭐라도 하나 말씀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으음, 예를 들어……, 황제 폐하께 선물을 달라고 하실 수도 있고요.”
사회자는 최선을 다했다. 리시스가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과, 지나치게 투명한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이었다.
“폐하는 뭐든 과분하게 해 주셔서 딱히 바랄 게 없는 걸.”
“아……, 아하핫, 그러시군요오……. 그럼 뭔가 직접 해 주실 만한 거라도.”
리시스는 사회자의 진땀을 보고 말았다. 그 노력에 부응하여 뭐든, 어떻게든 답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진짜로, 정말 요구할 것이 없었다. 없는 소원을 만들어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폐하는 뭐든 늘 내가 원하는 걸 너무 잘 해 주셔서…….”
진짜로 키에르트에게 요구할 것이 없어 중얼거린 말에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리시스는 본의 아니게 부부사이의 알콩달콩함을 홍보하고 있었다. 뭐든 다 해주고, 잘해줘서 바랄 것이 없는 부부랍니다! 사회자는 황제 부부의 염장질에 표정관리를 순간 잊어버렸다.
“와, 진짜……. 다 가지셨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외모에, 출중한 두뇌에, 황제 폐하의 마음까지!”
그래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아부를 잊지 않았다. 리시스는 순식간에 발그레해졌다. 얕은 호의로 좋은 말을 해 주는 경우는 있어도 이렇게 대놓고 아부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리시스에게서 받아갈 것이 없으니 아부를 할 사람도 없던 것이었다.
“그렇긴……하지.”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적당히 겸양을 떨 생각도 못 했다. 지금 자신이 다 가진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으니까. 리시스의 뻔뻔한 대답에 사회자는 한 번 더 표정을 무너뜨릴 뻔했다. 더 이상 말이 길어졌다가는 무슨 헛발질을 하게 될지 몰랐다. 사회자는 얼른 이번 순서를 마무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역시 황후 폐하는 완벽하십니다! 소원이 없으시면 대신 벌칙 같은 건 어떠십니까?”
상대를 골탕 먹이는 것도 재미가 될 수 있다. 그 말엔 리시스도 눈이 빛났다. 내기에서 일단 이기긴 했으니 승자의 권한을 누리긴 해야겠다.
“좋아. 그럼, 음…….”
리시스는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돌아보았다. 벌칙이라 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지목을 받는 것 자체가 눈에 띌 기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뽑히고 싶어 발꿈치를 들었다. 키에르트에게도 눈길은 닿았다.
‘뭐든 말만 해.’
키에르트는 답하듯 자신만만한 눈빛을 보냈다. 살짝 흔들리기는 했다. 이 자리에서 키에르트에게 뭔가를 요구하면 딱 좋은 그림이 그려질 텐데. 애석하게도 정말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벌칙 같은 불미스러운 일로 키에르트를 언급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했다. 결국 리시스는 고민 끝에 진짜 마음이 가는대로 대상을 선정했다.
“당신.”
“알헨크.”
지목당한 알헨크는 꽤나 뿌듯하게 자신의 이름을 강조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시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본론부터 꺼냈다.
“이겼으면 무슨 소원을 빌려고 했어?”
알헨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리시스로서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자꾸 알짱거리는 저 로구안 놈의 꿍꿍이가 뭔지 알아야겠다. 속마음을 그대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선 꺼내놓는 대답에서 진짜 속마음을 유추할 수도 있다. 알헨크는 길게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답했다.
“황제 폐하 버리고 나한테 오라고 하려 했지.”
“……뭐?”
“!”
모두가 놀랐다. 리시스는 물론, 키에르트도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컥, 하고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이 무슨 불경한 발언이란 말인가. 그러나 정작 그 폭탄을 던진 알헨크는 여유로웠다.
“승자는 뭐든 소원을 빌 수 있는 거잖습니까?”
리시스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알헨크를 바라보았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런 말을 꺼내는 저의가 뭘까. 도저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진짜 순수하게 미친놈인 것 같았다. 맥락 없이 돌아버린 놈은 정상인의 생각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 미친……!”
당황한 세니아가 파랗게 질려 단상 위로 뛰어올랐다. 사람들의 흥미어린 시선이 세니아를 불쾌하게 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알헨크의 입을 막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알헨크는 가볍게 세니아의 손을 피했다. 세니아가 재차 알헨크를 끌어내려 했지만 알헨크의 다부진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궁의 사정을 잘 몰라 저지른 철없는 실수입니다……! 제가 단단히 주의를 줬는데도……!”
이 미친놈이 제멋대로 날뛰긴 했지만 내 책임은 아니다, 급해진 세니아가 주장했다. 파트너로 데리고 온 것만으로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다만 도의적인 책임이나 평판이 걸려 있기 때문에 세니아도 절박했다.
“아니야, 괜찮아. 재미있네.”
리시스는 깔깔 웃으며 단상을 내려갔다. 당사자인 황후가 웃으니 사람들도 따라 웃었다. 세니아의 당황한 모습만으로도 사실 꽤나 재미있었다.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리시스가 단상을 내려가면서 판은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끝내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쉬란의 황후가 꽤 할 만한 모양입니다?”
사람들을 상대하던 리시스가 잠깐 쉬러 베란다로 향했을 때였다. 언제 따라붙었는지 알헨크가 다가와 있었다. 이곳은 연회장이고 사람이 많았다. 언제든 도움을 청하거나 도망갈 수 있었다. 안전을 확보한 리시스는 아까 채 해결하지 못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멈춰섰다.
“에드린의 공주보다는 나은 것 같네.”
“더 나은 자리도 있을 텐데.”
“네 옆자리?”
“말도 하기 전에 정답을 알아 맞추셨네.”
알헨크는 하하하, 웃었다. 리시스는 웃지 않고 알헨크를 바라보았다. 일국의 황후에게 저런 농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정체는 대체 뭘까. 뭔가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직은 찍기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정보가 없었다.
“황후 자리보다 더 좋은 자리가 있을까?”
“있을 수도 있지.”
“그게 무슨 자린데?”
“온다고 하면 말해주고.”
어쭈. 힘겨루기를 걸어온다. 진짜 뭐가 있는 걸 수도 있지만 허세일 수도 있다. 리시스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이미 결혼을 했어.”
“이혼하면 되지.”
“건방지네?”
리시스는 어이없이 웃으면서도 복잡하게 머리를 굴렸다. 머리가 없는 놈이 아니다. 저 정도면 황실 모독죄로 즉결처분을 내릴 수 있는 정도다. 뭘 몰라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 건 분명했다. 뭔가가 있다. 뭔가가……. 그런데 그 뭔가가 아직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나를 요구하는데?”
“귀여워서?”
“…….”
혹시 설마 진짜 그냥 놀리는 것에 목숨을 건 놈인가?
“첫눈에 반해서. 가지고 싶어서. 뭐 그런 이유?”
장난처럼 던지는 알헨크의 말에 리시스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반한 사람의 눈이 저럴 리가 없다. 그런 눈을 마주해 본 적도 없지만 확실히 저런 눈빛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말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다. 가지고 싶어서. 그래 보였다. 왜 가지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이다. 여기서 더 파고들어봤자 건질 것도 없을 듯해서 이만 물러나려 할 때였다.
“뺏길 것 같나.”
등 뒤에서 뻗어온 따뜻한 팔이 리시스의 몸을 감쌌다.
어느샌가 다가온 키에르트였다.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뒤에서 단단히 끌어안았다. 포근하게 리시스를 끌어안았지만 팔의 단단함이 어지간하지 않았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완강한 포옹이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뺏을 수 있다면 뺏고 싶은?”
알헨크가 한 발 물러서며 웃었다. 황제 폐하 앞에서도 저 여유는 어디 가지 않았다. 뺏는다는 말에 뼈가 느껴졌다.
“절대 그렇게 둘 수 없지.”
키에르트도 지지 않았다. 맞서서 미소를 짓지만 마주친 눈빛은 쨍 소리가 났다. 중간에 낀 리시스는 두근거리며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키에르트가 알헨크의 머리통을 어떻게 깰지 궁금했다.
“지금 당장 추방을 명한다.”
“음?”
“나가.”
키에르트는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깔끔하게 알헨크를 쳐내버렸다.
“농담 한 마디에 너무 발끈하시는 건 아닌…….”
“끌어내.”
슬그머니 자존심을 건드리며 유들유들하게 넘어가려는 시도도 원천 차단이었다. 키에르트의 명령에 뒤따라 왔던 친위대가 냉큼 알헨크를 결박했다.
“아, 정말 재미없는 분이네.”
“당장.”
“갑니다, 가요.”
알헨크는 두 손을 들고 끌려나갔다. 키에르트는 알헨크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때까지도 끌어안은 리시스의 몸은 놓아주지 않은 채였다.
“남의 아내를 빼앗아 가겠다 해 놓고, 농담? 어딜 감히.”
상대가 웃으며 농담으로 넘어가려 한다고 똑같이 따라가 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리시스는 슬그머니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분노로 뜨거운 눈빛. 동시에 차갑게 가라앉기도 했다. 아까 알헨크의 눈빛엔 뜨거움도, 차가움도 없었다. 하늘을 바라보듯, 길가의 돌멩이를 바라보듯 무미건조했다. 그와 상반되게 키에르트의 눈빛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반한 눈빛이라면 차라리 이런 것이 맞지 않을까.
‘……어?’
리시스는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