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황녀와 황후
(86/153)
86. 황녀와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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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황녀와 황후
2022.05.29.
세니아는 미간을 구긴 채 허공을 노려보았다.
“아가씨, 저녁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
“응.”
하녀의 부름에 대답을 하면서도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이제까지 웬만한 일은 다 예상할 수 있는 범위 안이었다.
그런데 점점 일이 예상범위를 벗어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를 걷는 도중에도 눈에 닿는 모든 곳에 리시스의 얼굴이 보였다.
세니아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생각은 바로 리시스였다.
‘너무 방심했나?’
아니다, 얕보기는 했지만 방심한 적은 없다.
방심이란 빈틈을 주었다는 의미다.
세니아의 계획에 빈틈은 없었다.
일이 이만큼 틀어지게 된 것은 온전히 변수 탓이었다.
세니아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살면서 예상하지 못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것으로 일일이 기분 상하며 살면 버티지 못한다.
‘대책을 세울 수 있을 때는 괜찮지.’
지금까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바로바로 대책을 세워 수습을 했다.
지금 세니아의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대책’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아.’
아침에 황궁에서 소식이 날아왔다.
황궁에는 황후궁의 쥐만 사는 것이 아니다.
그 밖에도 다른 눈과 귀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합궁일이 아닌데 황제 부부가 부부궁에서 밤을 보냈다.’
부부궁 안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훤히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정략결혼 한 부부 이상으로 친밀감을 다지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예상할 수 없던 일이 벌어진 것이겠지.
‘아닐 수도 있기는 해.’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일이 벌어졌을 확률이 높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정황상 너무 확실했다.
공식 행사에서 사이좋은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정략결혼의 기본 의무다.
그런데 키에르트는 반대로 굴었다.
리시스에게 집착하고, 매달리고, 다른 사람이 다가오기라도 하면 기분나쁜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대외적으로 황제 부부가 보일 모습은 아니었다.
‘미친놈 같았지.’
부인에게 온 마음을 다 빼앗긴 미친놈.
그게 문제였다.
차라리 리시스가 꼬리를 치며 기세등등했다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키에르트가 정신을 못 차리는 상황은 대처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황제의 마음이 그렇다는데 어쩔 건가.
아무리 황제가 국익을 우선해 움직인다 하더라도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은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왔느냐.”
복잡한 마음을 가진 채 식당에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렌데일 공작이 맞이했다.
세니아가 자리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공작도 그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세니아 역시 그것에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식사 시간에 필요한 이야기를 나누면 시간절약이 되니 약속을 잡은 것이니까.
필요에 의한 관계란 이렇다.
상대의 행동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관계.
그런데 키에르트는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까지.’
세니아는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식사가 준비되었지만 손을 댈 생각이 들지 않아 물만 마셨다.
렌데일 공작은 그런 것엔 신경도 쓰지 않고 고기를 입안에서 으적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로구안 놈이 연락을 보냈다.”
“……그놈이요?”
알헨크.
그 망할 로구안 놈을 생각하니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사고를 칠 거란 생각은 했지만 대형 사고를 쳐 놓고 사라져 버렸다.
덕분에 알헨크를 대동한 책임을 물게 될까 봐 세니아가 얼마나 조바심이 났는지 모른다.
다행히 키에르트는 치워버린 것으로 만족했는지 추가 조치는 없었다.
사람들의 입에 몇 번 오르내리기는 했으나 그대로 없던 일처럼 조용해졌다.
남은 것은 리시스의 무용과 키에르트의 불타는 집착 정도였다.
그렇게 사고 쳐서 쫓겨나고 끝난 줄 알았는데, 뭐가 또 있어?
“에드린 산 물건을 많이 들여놓는 게 좋겠구나.”
“……에드린요?”
두 나라가 적국이라고 상인의 왕래마저 아주 끊긴 것은 아니다.
직접 오가지 않아도 중간상을 통해 유통하거나 다른 나라를 거쳐 오는 등, 방법은 많다.
지금도 세니아는 에드린의 물건을 어렵지 않게 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에드린 산 물건을 많이 들여놔야 한다면…….
“……전쟁이 난다고요?”
화평의 상징인 황후가 멀쩡히 황후좌에 앉아 있는데?
“……아.”
그러나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세니아는 스스로 답을 찾았다.
리시스가 에드린에서 중요한 존재인가?
아니.
에드린 왕실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조차 싫어 전장에 처박아둔 애물단지였다.
모처럼 쓸모를 찾아 잘 이용해 먹었을 뿐이지, 리시스 때문에 발목을 잡힐 일은 없었다.
인질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공주.
에드린이 전쟁을 내서 이길 자신만 있다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패였다.
“로구안과 에드린이 손을 잡는다고 했나요?”
“그렇게 될 것 같더군.”
로구안 놈이 소식을 보내왔다면 그럴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마냥 웃을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내버려 두면 안 되잖아요?”
에드린과는 침략전쟁이 아니니 고만고만하게 싸웠고, 희생도 크지 않았다.
감정의 골이 깊은 것에 비해 전장의 잔혹함은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로구안은 전쟁을 일으키는 목적부터가 달랐다.
그놈들은 오로지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로구안이 점령한 나라들은 하나같이 쑥대밭이 되었다.
쉬란의 군사력이 강하다고는 하나 둘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만만치 않은 희생이 잇따를 것이다.
최악의 경우……
“쉬란이 당할 수도 있어요.”
광기어린 침략자 로구안.
쉬란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에드린.
두 나라가 손을 잡으면?
최소한 쉬란이 휘청일 정도의 위협은 될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
충격을 받는 세니아와 달리 렌데일 공작은 태연했다.
세니아는 그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쉬란이 없으면 렌데일 공작가도 없어요.”
내 황후 자리도 물론.
그러나 렌데일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공작가에 만족하지 못한 건 너 아니었더냐?”
“예?”
렌데일 공작이 피처럼 붉은 포도주를 입에 댔다.
입술을 타고 넘어가는 포도주를 세니아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설마.
야욕은 자신만 있는 줄 알았다.
“황녀도 황후만큼 괜찮지 않겠어?”
세니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
“……몸뿐이야?”
황제 폐하가 우는 줄 알았다.
리시스는 순식간에 ‘몸 때문에 접근한 불량배’가 되어버렸다.
몸 때문에 접근한 것도 아니고, 불량한 것도 아니라 상당히 억울했다.
하지만 이미 말은 입 밖으로 튀어나온 후였다.
“몸이 ‘제일’ 매력적이시란 말이었……죠.”
어떻게든 수습을 해 보려 노력은 했다.
먹힐지 안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제일’?”
“그럼요. 우리 폐하께서 매력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럼 제이는 뭔데?”
“…….”
이래서 사람은 말조심을 해야 한다.
리시스는 겨우 도망쳐 나온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몰렸다.
“두……번째 매력은요.”
이번에도 당장 생각해 내려니 눈에 보이는 것이 가장 먼저였다.
“얼굴?”
“…….”
“……아니, 그러니까. 껍데기만 좋다는 말이 아니고요.”
진땀이 죽 났다.
하지만 염려하던 추궁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껍데기라도 ‘좋다’라.”
키에르트의 신경은 다른 곳에 꽂혀버렸다.
리시스는 어쨌든 이 위기에서 도망칠 수 있는 것에 만족했다.
“네, 좋아요.”
거짓말도 아니었다.
실제로 처음에는 키에르트가 반짝거린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화려하고 빛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지금도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눈에 너무나 예쁘게 반짝반짝거렸다.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흘러나올 정도로.
리시스는 본능적으로 웃으며 키에르트의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눈이 마주쳤다.
이미 아침이 되었지만 다시 밤이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 두 사람을 감쌌다.
키에르트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눈을 감고 천천히 다가오는 입술을, 리시스도 눈꺼풀을 내려 밤을 만들며 맞이했다.
그러나 그들의 밤은 오래지 못했다.
톡톡톡.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처음엔 빗소리인가 해서 무시했다.
그러나 두 번째 입술을 겹쳤을 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더욱 분명해졌다.
“티티……?”
리시스는 혹시 티티가 찾아왔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창가에 앉아 있는 새는 처음 보는 애였다.
팔뚝만 한 새였다.
“쟨 뭐예요?”
그냥 밖에 풀어놓고 키우는 새라기에는 털의 상태가 너무 좋았다.
거기에 발목과 목에는 장식물도 달고 있었다.
애완 새 같았다.
“……아. 부부궁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으니까 저 녀석을 보낸 모양이군.”
키에르트도 눈을 들어 확인하고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자 새는 후드득 날아 키에르트의 손목에 앉았다.
익숙하게 새를 받아 든 키에르트는 새의 발목에 묶인 편지통을 확인해 쪽지를 꺼내들었다.
“……예상할 수 있었던 일 하나가 확인되었어. 그 로구안 놈.”
“알헨크요?”
“그래. 로구안 왕자였군.”
황도 경계까지 동행했던 병사들 말고도 키에르트가 따로 붙인 미행이 있었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따로 지시했던 것인데, 딱 노린 만큼의 수확이 돌아왔다.
리시스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 그랬네요.”
두 사람 모두 그런 쪽으로 감은 있었다.
“그리고 에드린 쪽으로 움직임이 있었다는데…….”
이번 소식만큼은 태연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리시스는 눈을 찌푸렸다.
로구안이 에드린에게로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다면 둘이 손잡고 쉬란을 엎어 보려는 것 외에 뭐가 있겠는가.
“……가능할까요?”
에드린 왕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모른다.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은 기본이지만, 이따금 상황은 말도 안 되는 제 기분에 따라 휙휙 변하기도 했다.
리시스도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국혼까지 치른 상태다.
공주를 버린다는 선택을 하면서까지 로구안과 손을 잡는 것이 에드린에게 이득일까?
그건 로구안이 무엇을 내밀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그 로구안 놈이 혓바닥에 얼마나 꿀을 잔뜩 발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 ……리시스?”
생각을 하느라 키에르트는 잠깐 리시스의 표정을 놓쳤다.
그래서 에드린과 로구안의 동맹과, 쉬란과의 전쟁의 가능성에 대해 차갑고 진솔하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리시스의 추측어린 말이 제발 아니기를 바라는 소원이 담겨 있는 것인 줄 미처 몰랐다.
순식간에 파랗게 질린 리시스가 울먹였다.
“전쟁, 안 되는데, 아 안……. 렉싱턴 장군님이……!”
“…….”
키에르트의 머리도 파랗게 식었다.
리시스가 맨 처음부터 자신과 동맹을 맺었던 이유.
렉싱턴 장군, 저 작자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