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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남자는 주기가 좀 (92/153)


92. 남자는 주기가 좀
2022.06.19.



 
상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리시스가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정설로 미는 것이 하나 있었다.

에드린 왕은 상식이 없다.


“상식이 없으니 어디로 튈지 몰라요.”

상식적으로 자신의 혈통은 조금이라도 더 싸고도는 것이 사람이다.

에드린 왕은 그딴 것도 없었다.

혈통이고 혈연이고 나발이고, 세상에 자신밖에 없었다.


“그러니 제가 아이를 진짜로 가졌든 안 가졌든 에드린 왕의 결정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거예요.”

진짜로 혈통을 소중히 하는 왕이었다면 애초에 리시스를 이렇게 덜렁 홀몸으로 적국에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당연히 그 리시스의 몸에서 나온 아이에게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후계가 생긴 것으로 심리전을 펼치는 건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

“……아닙니까?”

“아니에요? 진짜?”

리시스의 딱 자른 선언에 제럴드도, 미하엘도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반응에 리시스는 더 크게 눈을 떴다.


“그걸 설마 진짜로 믿고 있었다고?”

“상황상……,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봐도.”

키에르트의 어마어마한 주접과……, 그 후로도 쭉 이어지고 있는 주접과……, 끝없는 주접이 오해를 밑받침했다.


“아니, 뭐……, 그럴 수 있긴 한데…….”

그걸 그냥 좋다고 주섬주섬 다 받아대던 리시스는 머쓱하게 눈을 돌렸다.

주는대로 다 받으니까 또 그게 오해를 증폭시킨 모양이었다.


“굳이 확률이 0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오, 그럼 역시!”

“……아닐 확률이 훨씬 높지…….”

“아…….”

리시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위아래를 극명하게 오르내린다.


‘후계가 진짜 중요한 일이긴 하구나.’

그래도 이게 자신의 의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키에르트와 밤을 함께 보낸 것은 맞다. 그러니 아이가 생길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쉬란 제국의 ‘후계’라는 생각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자, 집중! 오늘은 전략회의 때문에 모인 거잖아.”

리시스는 책상을 탕탕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제럴드, 미하엘을 다시 불러 모아 이 자리를 만든 것은 저번 회의에 이어 쉬란 군의 배치와 훈련에 관한 회의를 위해서였다.

저번 회의는 에드린과 로구안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리시스가 동석하리라 생각지 못해 당황한 두 사람이 제대로 이야기를 풀어놓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다.


“오늘은 나도 필수 인원으로 동석했으니까.”

“예, 황후 폐하.”

“넵.”

이제야 두 사람도 눈에 힘을 주고 똑바로 앉았다.

저번 회의 이후 추가적으로 수집한 정보도 있었다.


“로구안의 쉬란 공격은 확실해졌어. 그럼 쉬란이 할 일은?”

“대비해야죠.”

“또는 선공을 하든가요.”

두 사람의 대답에 리시스의 눈이 빛났다.

리시스가 전쟁을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질 수 없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가령, 아주 창의적으로…….


“에드린이 합세하기 전에 에드린 왕을 먼저 암살해 버리면 안 되려나?”

“원하나?”

키에르트가 진지하게 물었다.

리시스가 원한다면 해 보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리시스도 살짝 흔들렸다.

……괜찮은데?

하지만 그래서 리시스에게 남는 것이 있으면 모를까, 괜히 전력만 깎아먹는 짓이었다.

암살이 공짜로 되는 것도 아니고.

돈도 들고 사람도 든다.


“그건 나중에 내킬 때 해도 될 것 같아요.”

“언제든 내키면 말하도록.”

원래부터가 원수였으니 키에르트도 죽여버릴 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거기에 리시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증오스러운 정도까지 진화 발전했다.

키에르트의 든든한 응원을 받으며 리시스는 말을 이었다.


“에드린은 로구안이 부채질을 하니 동요하긴 하겠지만 본인들이 앞에 나서서 싸우지는 않으려 하겠죠.”

“그렇겠지.”

“하지만 로구안이 자존심을 건드리면 눈이 뒤집혀서 나댈 수도 있기는 해요.”

“음…….”

알헨크의 성격을 보아 못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움직이게 될지 예상이 되나?”

“쉽죠.”

그렇게 움직여 주는 쪽이 더 고마울 수도 있다.

로구안은 아직 미지의 적이지만 에드린은 뻔하니까.

아주 적은 힘으로도 쉽게 제압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상대하기 쉬운 적 아니겠는가.

자국인 에드린을 적으로 명명하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싸워야 한다면 적이다.


“렉싱턴 장군님을 보낼 거예요.”

에드린의 이후 행보는 리시스에게 훤히 보였다.


“왕실군은 절대 수도를 떠나지 않아요. 하지만 열받으니 무슨 짓이든 하긴 해야 할 테고. 하지만 군을 보내자니 너무 대대적인 싸움이 될 테니까 렉싱턴 장군님을 보내서 절 협박이라도 하겠죠.”

키에르트의 표정이 묘해졌다.

렉싱턴 장군이라면 리시스를 엄청나게 아껴주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이 보내서 하란다고 리시스를 협박할까?

키에르트의 표정을 읽은 리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렉싱턴 장군님은 충직하니까 일단 가라면 가긴 할 걸요?”

“그리고 와서는?”

“제대로 못하겠죠.”

“그런 사람을 왜 보내지?”

리시스는 후훗, 웃었다.

정상인의 눈으로는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중심에 자신밖에 없는 에드린 왕이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일이다.


“자기가 그렇게 생각해서 하라고 했으면, 세상은 당연히 그렇게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니까요.”

하지만 도무지 리시스의 말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에드린 왕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세 사람은 난처하게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기만 했다.


“그럼 일단 렉싱턴 장군이 무력으로 부딪쳐 오진 않을 거란 소린가?”

“그럴 거예요. 만약에 티티의 쪽지를 제대로 받아 읽었다면 또 달라질 수도 있고요.”

렉싱턴 장군에게 망명하라고 부추기는 그 쪽지는 바로 보내졌다.

티티는 호두를 볼주머니에 가득 욱여넣고 먼 여행을 떠났다.

그 쪽지가 언제 도착할지는 모르지만 에드린 왕의 명령보다는 빠르지 않을까 예상했다.


“……그럼 이러나저러나 렉싱턴 장군은 쉬란에 오겠군.”

키에르트가 손깍지를 끼우며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칼부림이 심하게 나겠어요……?”

“더한 것이 날 수도 있지.”

리시스를 그렇게나 아끼던 사람이다.

키에르트는 미친 듯이 싸우던 원수이고.

전쟁터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긴장감이 키에르트를 감쌌다.


“렉싱턴 장군님 착해요!”

리시스가 까르르 웃으며 키에르트를 달랬다.

그러나 키에르트의 심각한 어둠의 기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과연 나에게도 착할까?”

“……아…….”

그러게요.

리시스도 확신하지 못했다.

렉싱턴 장군님은 리시스에게 누누이 말씀하셨다. 남자 조심하라고.


‘하지만 남편이니 괜찮지 않을까?’

……안 괜찮을지도.

여차하면 도망쳐도 된다고 티티를 보내기까지 한 사람이다.

키에르트와 거하게 부딪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최악의 상황에 대비합시다.”

아무리 따져봐도 그게 맞았다.

어쩌면 로구안 놈보다 렉싱턴 장군님이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저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압도적인 승리를 가져오겠습니다.”

미하엘이 비장하게 선언했다.

그러나 리시스는 입맛을 쩝 다시며 볼을 긁었다.

사기가 높은 건 좋지만 현실은 언제나 차갑게 봐야 했다.


“되겠어?”

“……예?”

미하엘은 아직 철두철미하게 현실적인 리시스를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

적이었을 때야 적이니까 냉정하고 차갑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군도 마찬가지로 다그쳐야 그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리시스가 지금까지 객관적인 수세에도 불구하고 쉬란을 조이고, 압박할 수 있던 비결이었다.


“나 상대할 때 하던 만큼 무르게 훈련하는 걸로는 턱도 없을 텐데.”

키에르트에게 받아 확인한 로구안의 전력은 상당했다.

에드린과 쉬란은 긴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선의 긴장감이 덜한 편이었다.

그러나 로구안은 짧은 시간, 강하게 치고 들어올 저력이 있었다.

그 폭력적인 강함은 글자로만 읽어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물론 몇 배로 단단히 준비할 것입니다.”

“……그래……?”

리시스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럼 보여줘.”

“……예?”

“얼마나 훈련 잘하는지 내 눈으로 보고 싶어.”

“황후 폐하께서 직접요?”

두 사람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리시스가 아무리 전략에 통달했다고는 하나 병사들의 훈련까지 직접 참관하겠다 나설 줄은 몰랐다.


“어, 안 돼?”

“안 되는 게 아니라요…….”

미하엘은 키에르트의 눈치를 보았다.

헐벗은 남자놈들이 악 지르며 바닥에 뒹구는 모습은 미관상 썩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걸 황후 폐하께 보여드리는 것이 맞나……, 진짜 이게 맞나…….


“안 될 이유가 없지.”

키에르트도 미하엘이 왜 눈치를 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전력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 리시스를 서운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더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훈련은 언제야?”

“예? 회의가 끝나면 바로 시작할 예정이었습니다만…….”

“그럼 바로 가면 되겠네.”

리시스는 결정하고, 즉시 움직였다.

키에르트도 리시스를 따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리시스의 발이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안아올렸다.


“……폐하?”

“몸을 소중히 해야지.”

“…….”

저 작고 하얀 발로 이 드넓은 황궁을 걸어다닐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파 참을 수가 없었다.

리시스는 웃으며 키에르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예, 그러세요…….

키에르트는 마음의 안정을 찾아 좋고, 리시스는 편해 좋고.

서로 좋은데 뺄 이유가 없었다.

키에르트는 흡족하게 걸음을 옮겼다.

맛있는 것만 먹이고, 편한 것만 하게 하고, 좋은 것만 보여주겠다는 각오는 착착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다보면 뭐든 가지고 싶은 것이 생기겠지.

욕심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리시스에게 경험의 기간이었다.

그런 뒤 가지고 싶다는 건 뭐든 쥐어 줄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키에르트의 결심은 오래지 않아 휘청 흔들리고 말았다.


“호오…….”

리시스의 눈이 한 곳에 꽂혀 예리하게 빛났다.

뭐든 예쁜 것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왜 저딴 것을 보면서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인가.

키에르트는 마음속으로 불만을 구시렁댔다.

하지만 리시스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저거, 저한테 넘겨주실 수 있어요?”

심지어 달라고까지 했다.

리시스가 원하면 뭐든 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남자는 주기가 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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