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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살아있다는 안도 (117/153)


117. 살아있다는 안도
2022.09.15.


티티는 한달음에 키에르트의 몸을 타고 올라 목덜미에 몸을 감았다.


“음, 티티도 왔군.”

“삐!”

키에르트의 부름에 삑! 하고 대답도 잘 했다.

키에르트의 마음 한구석이 밝아졌다.

리시스는 보내도 리시스와 자신을 이어주는 티티는 자신을 선택했다.


“티티는 내 쪽이 편한 모양이군. 잠시 내가 맡고 있도록 하지.”

키에르트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티티는 키에르트의 목깃, 소매, 주머니를 분주히 오가며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호두 빨리 내놓으라는 재촉이었다.

평소에는 괘씸하던 이 행동도 지금은 그저 뿌듯한 애교였다.

찾는 것이 호두면 어떠하리. 일단 렉싱턴의 어깨에서 키에르트에게 달음질쳐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르스즈요…….”

렉싱턴이 자식 뺏긴 표정으로 뿌드득 이를 가는 것을 보면서 키에르트의 뿌듯함은 한 단계 상승했다.

이러니 함정은 충실히, 열심히, 많이 파 두어야 한다.

적이 언제 어떻게 제 발로 걸어 들어와 걸릴지 모르니까.

그동안 티티에게 뜯긴 호두가 나무 한 그루 분은 될 거다.

키에르트는 오랫동안 묵혀 둔 승리에 취해 헤어짐의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



“상의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렇게 긴 소식이 왔어?”

“길게 얘기해야 할 일입니다. 저녁까지 함께하면서 얘기하지요.”

키에르트와 헤어진 렉싱턴은 응접실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리시스는 바로 진지해졌다.

렉싱턴 장군이 ‘길게’ 얘기해야 할 정도의 일이라면 꽤 심각한 사안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키에르트와 함께 있을 때 그만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에드린 쪽으로만 전달된 기밀인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 일이면 폐하께도 공유해야 하는 것 아닐까?”

“에드린의 일입니다.”

렉싱턴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리시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린의 공주를 때려치웠다고는 하지만 리시스의 몸에 흐르는 피가 사라지지 않는 한 에드린의 일은 남 일이 아니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생판 남일 뿐더러 적이기도 했다.

키에르트가 에드린의 일까지 깊숙이 관여하며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알겠어. 그러지.”

리시스는 아쉽지만 키에르트와의 저녁을 포기했다.

하녀장에게 저녁식사에 관한 명을 내린 리시스는 무릎 위에 깍지 끼운 손을 올리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무슨 내용인데?”

“알헨크의 목적이 어쩌면 쉬란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응?”

렉싱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주앉은 테이블 앞에 차가 놓였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에드린을 생각하니 갑갑해 물도 안 넘어갔다.


“알헨크의 군대가 에드린의 민가를 털어 군량을 채우고 있는 모양입니다.”

“뭐?”

리시스의 안색이 대번에 바뀌었다.

군대를 운용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군량이다.

군인도 사람이다.

먹어야 산다.

보통 군량은 군대와 함께 이동하거나 따로 보급을 받는다.

원정의 경우 가까운 영지에서 사들이는 식으로 해결하기도 한다.

지금 알헨크의 군대는 에드린의 국경 안에 들어와 있다.

에드린은 국경을 열어 준 것만으로도 이미 넘치는 호의를 보였다.

보급로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하고 식량을 사야 옳았다.

그 과정에서 중재가 필요하다면 에드린 왕실이 맡아야 하는 역할이었다.


“……털었다는 말은, 강탈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강도나 다를 바 없다고 합니다.”

“강도. ……설마 인명피해도 있어?”

“사망자는 없습니다만 협조하지 않는 경우 폭력이…….”

“하…….”

리시스는 무겁게 얼굴을 쓸어올렸다.

이 망할 놈. 썩을 놈. 죽일 놈.

그냥 아랫도리 가벼운 망나니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썩어빠진 미친놈일 줄이야.

리시스는 두 손 안에 얼굴을 묻고 숱한 욕을 입안에서 중얼거리며 화를 삭였다.


“에드린 왕은?”

“……아무 말도 없다고…….”

기대한 것이 없어도 실망할 수도 있었다.

리시스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얘질 정도의 분노에 휩싸여 숨도 쉬지 못했다.


“그래……, 원래 그런 놈이었지. 제 백성, 제 나라 소중하면 우리가 전선에서 그렇게 굶었겠어?”

“……공주님.”

렉싱턴마저 험난했던 그 순간이 떠올라 호칭마저 과거로 돌아가 버렸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전선을 지켰다.

에드린 왕이 나서서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으니 지지부진한 전투만 이어졌다.

차라리 아예 외면하고 잊어버려주면 아슬아슬한 휴전이라도 유지하며 그럭저럭 정착하고 살았을 텐데, 가끔 한 번씩 생각날 때마다 ‘무아렌 강은 언제 차지하는 거야.’ 하는 채찍질이 날아왔다.

왕이 원하니 싸워야 했다. 하지만 지원은 없었다.

친위대와 황제가 직접 나선 후부터는 돈과 악의 싸움이 되었다.

그 지긋지긋했던 전투들.

분노를 터뜨리던 리시스는 씨근덕거리던 숨을 가라앉히며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상황을 정리해 보려 애썼다.


“아니, 그런데. 무아렌 전선이야 역사적으로 내내 싸웠던 곳이니 있든 말든 신경이 안 쓰여 그랬다 쳐.”

“예.”

“그런데 이건 문제가 다르잖아. 제 땅에서 남의 나라 군대가 도적질을 하는데 자존심도 안 상하나?”

“쉬란을 차지하면 땅을 나눠준다는 말이 오가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만…….”

“따아앙?”

기가 막힌 말을 들어버렸다.

리시스의 눈이 회까닥 돌아갔다.

사람이 열을 받다 받다 못하면 눈이 돌아간다는 것을 오랜만에 기억해 냈다.

그 전에도 에드린 왕 때문인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에드린 왕 때문이다.


“미쳤나? 아니, 뭘 모르는 게 문제겠구나. 왕이라는 새끼가 병서 한 줄 안 읽어봤나? 동맹군과 함께 함락을 시켜도 물자 나누는 순간부터 적인데, 애초에 적인 놈이 퍽도 제가 따먹은 땅 곱게 반 갈라 바치겠네? 그 전에 쉬란을 나눠먹을 수도 없겠지만.”

말을 하다 보니 더 이상 오를 곳도 없을 것 같던 열이 더욱, 더더욱 치솟았다.


“대체 그런 인간을 어딜 어떻게 믿고 명에 따르니 마니 하는 거야, 장군은?!”

“……그래도 왕이시잖습니까.”

“왕이 왕다워야지!”

“왕은 그냥 태어난 순간부터 왕 아닙니까.”

“누가 그래! 어디 왕이 그래! 저 가까운 로구안만 해도 왕 숨 넘어 갈 때까지 어느 왕자가 다음 왕 될지 몰라.”

“그건 로구안이고요.”

“역사에도 그랬어!”

리시스는 황궁 도서관 덕분에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식견을 넓혔다.

지식을 얻으니 이전과 극명하게 달라진 것이 있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된 것.

‘당연히’라는 말에 의심조차 품지 못하고 넘어갔던 것들이 무수히 많음을 리시스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것에는 ‘왕이기에 당연히’도 포함되었다.


“역사적으로 잘못해서 쫓겨난 왕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세상 그 많은 왕들 중에 계승으로 자리에 오른 사람보다 찬탈로 오른 사람이 더 많은 것도 아냐고!”

“공주님!”

렉싱턴은 기겁해서 리시스를 불렀다.

이건 역모였다.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황후 리시스라면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장군 렉싱턴은 감히 들어서도 안 될 말이었다.

리시스도 흥분을 가라앉히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상황 보아하니 그 로구안 놈이 얌전히 물러나길 기대하기는 틀렸네.”

전쟁을 적당히 마무리하게 되는 계기는 언제나 돈이다.

특히 식량.

그러나 에드린 왕의 무책임함 덕분에 로구안은 무제한으로 공급되는 창고를 얻은 셈이다.

장난치듯 리시스를 내놓으라며 쉬란을 건드리는 짓이든, 에드린 땅을 휘젓고 다니든, 알헨크가 손해 볼 일은 없었다.


“에드린 왕이 멍청한 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에드린도 아주 손쉽게 꿀꺽 삼킬 수 있게 됐고 말이야.”

알헨크는 어느 쪽이 손에 들어오든 그저 버티기만 하면 이기는 싸움이었다.

첫 수를 잘 놓았다.

말이 거칠기는 했지만 렉싱턴도 리시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래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뭘?”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리시스는 대답하지 않고 렉싱턴을 노려보았다.

평소의 병아리처럼 귀엽고 포근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당장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숨겨놓은 손톱, 발톱, 이빨까지 다 꺼내도 모자랐다.

그러나 렉싱턴 역시 목숨만큼 중요한, 신념이라는 방패를 둘렀다.

렉싱턴은 리시스의 날카로운 눈빛을 흔들리지 않고 마주보았다.


“지금 장군이 나서서 로구안 놈들을 몰아낸다 하더라도 에드린 왕은 오히려 왜 자기 뜻대로 안 움직였냐며 반역죄를 물을 수도 있어.”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몸으로 로구안 군대를 상대하겠다고? 그냥 죽고 싶은 것 아니야, 장군님?”

“죽는다 하더라도 저는 에드린을 버릴 수 없습니다.”

리시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렉싱턴의 고지식함이 답답했지만 동시에 이해도 갔다.

리시스는 쉬란에서 행복이라는 것을 찾았다. 그 행복이 있으니 나라와 신분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아 지금도 이렇게 고민할 수 있는 것이다.

렉싱턴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것, 왕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것만 머리에 담고 살아왔다.

에드린과 왕에 대한 충성은 렉싱턴이 살아 온 이유였다.


“……잠시만 기다려 봐. 생각이라도 해 봐, 우리.”

리시스도 그 맹목적인 믿음 앞에 한풀 꺾였다.

이건 자신이 화를 내고 소리를 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을 리시스도 알았다.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포로로 구금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렉싱턴의 마음이 죽었다.

그렇다고 그래 가라, 하고 보내면 렉싱턴이란 사람이 죽는다.

하다못해 머리라도 같이 굴려보면 둘 다 살릴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죽을 각오를 하는 건 이길 자신이 있을 때뿐이야. 지금이 그때야?”

“……아닙니다. 하지만 나서지 않으면 에드린의 희생이 더 커질 겁니다.”

“나도 에드린 사람이야, 장군.”

리시스가 조급해하는 렉싱턴을 타일렀다.


“왕가가 더러워 공주라는 이름은 버린다 했지만, 내 엄마가 살았고 내가 태어나 자란 나라야. 나도 에드린이라는 나라가 소중해.”

“…….”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낼 때까지만이라도.”

마지막은 거의 애원이었다.

렉싱턴은 더 이상 조를 수 없었다.

쉬란에서 본 리시스가 매 순간 너무나도 행복해 보여서, 그만 에드린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리시스의 말을 들어버린 이상 돌아서서 에드린을 향한다 하더라도 마음이 편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렉싱턴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실 리시스 님이 하실 수 있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리시스의 마음은 고마웠다.

하지만 최근 며칠 내내 키에르트와 함께 만나면 나눈 얘기였다.

결론은 언제나 ‘방법이 없다’로 끝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리시스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전선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찾으려 그렇게 안간힘을 썼는데, 황후가 되어서도 그 고민은 계속되었다.


“……응?”

그때 리시스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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