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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별게 다 귀여워 (119/153)


119. 별게 다 귀여워
2022.09.22.


리시스는 정말로 당황했다.

얼마나 당황했냐면, 키에르트의 화에 기름을 붓는 발언을 생각 없이 던져버릴 만큼이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황후. ……그게 중요한 건 아닐 텐데……?”

키에르트가 지옥의 수문장처럼 으르렁댔다.


‘어떻게 수습하지?’

이미 기름이 부어져서 활활 타오르는 키에르트의 등 뒤로 황후궁 하녀들이 따라와 섰다.

얼마나 급박한 상황이었는지 모습을 보니 한눈에 알겠다.

손에 쟁반과 그릇을 든 사람, 사탕 단지를 든 사람, 등등.


“그, 황후 폐하, 폐하께서 갑자기 찾아오셔서…….”

하녀들은 쩔쩔 매며 이 사태에 대해 설명하려 했다.

아무리 키에르트가 황후궁을 매일같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자신의 궁은 아니니 들어오기 전 리시스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황후궁에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황제가 아니었다.

리시스가 가는 눈을 뜨고 하녀들을 흘겨보았다.

그 눈빛에 움찔하는 한 사람. ……하녀장이었다.


‘바로 직전까지 ‘내 사람’이라고 그렇게나 믿었는데! 어떻게 쪼르르 달려가 이를 수가 있어!’

하녀장은 시선을 피하려는 듯하더니 그새 생각이 바뀌었는지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마주쳤다.


‘이건 황후 폐하를 위한 일입니다!’

그 당당함에 리시스도 살짝 밀렸다.

언제든 들킬 일이면 지금 들키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지금은 하녀장의 배신을 따지는 것보다 키에르트의 화를 끌어내리는 것이 먼저였다.

리시스는 몸을 일으켜 키에르트를 맞이하려 했다.


“폐하, 그러니까…….”

“왜 일어나.”

그러나 한달음에 다가온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어깨를 잡아 냉큼 다시 눕혔다.

리시스는 홀랑 누워 키에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폐하가 오셨으니까…….”

“그 몸을 하고 일어나긴 왜 일어나.”

당장 혼났다.

리시스는 조금 억울해졌다.

내가 잘못했나? 잘못한 건가?


“몸은 멀쩡한데요…….”

“쓰러졌다며.”

“아, 아뇨. 쓰러진 건 아니고 잠깐 어지러워서 비틀거린…….”

“어지러워? 비틀거려?”

항변이랍시고 한 건데 왜 역효과만 나지.

키에르트가 이렇게 노발대발 하는 걸 처음 보는 리시스는 대처법을 즉시 떠올리지 못했다.


“아뇨, 그게, 목욕하다 보니까……, 아니, 아까 전에 일어나려던 건 폐하랑 얘기를 하려면 앉아야……, 저기.”

하얘진 머릿속에서 겨우 끄집어낸 말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리시스가 어물거리는 동안 키에르트의 분노는 하녀들을 향했다.


“너희는 대체 황후를 어떻게…….”

밀어닥친 키에르트를 따라 들어온 하녀들이 바닥에 엎드렸다.


“죽여주십시오, 폐하!”

“그래, 전원 사형으로…….”

“폐하! 진정하세요!”

키에르트는 말한 것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하녀들 전원 감옥행까지 시킨 사람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지금은 사형이라고 못 시킬 것 없었다.


“렉싱턴 장군님이랑 얘기하다가 바빠져서 밥을 못 먹어서 그랬어요. 제가! 못 챙겨 먹은 거예요. 제가!”

“……렉싱턴 장군……. 감히, 황후의 식사 시간을 빼앗아?”

“…….”

아니, 화살이 그리로 향해버리나요…….

리시스는 말문이 막혀 어버버했다.

그때 양손 가득 구원의 요리를 든 요리사가 등장했다.


“식사! 식사 준비 다 되었습니다!”

“요리사, 어떻게 황후가 쓰러질 때까지 늑장을 부리며 요리를 할 수가……!”

키에르트의 불똥이 요리사에게까지 튀었다.

리시스를 비틀거리게 한 모든 것에 시비를 걸고 싶은 기분인가 보다.

빨리 이 사태를 끝내버려야 했다.


“와! 맛있겠다! 저 빨리 먹고 싶어요! 빨리!”

리시스는 호들갑을 떨며 음식을 반겼다.

키에르트가 누구 하나라도 잡아 죽일 기세라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저희가 나머지를 얼른 나르겠습니다!”

“움직여! 빨리!”

리시스도 키에르트를 잡아두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안에 물고 있던 사탕을 쪽쪽 빨았다.

볼이 파이도록 사탕을 빨며 키에르트에게 뺨을 가리켰다.


“저 사탕 먹어요! 사탕! 안 굶고 있어요!”

“황후 폐하, 하나 더!”

사탕 단지를 들고 있던 하녀가 신속하게 사탕 하나를 더 물려주었다.

양 볼이 사탕으로 볼록해진 리시스는 티티와 같은 종족 같았다.

리시스는 양 볼만큼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키에르트를 바라보았다.

키에르트가 멈칫했다.

아직 머릿속에 가득 찬 울화는 가시지 않았는데, 리시스가 치사하게 너무 귀여웠다.


“……아니, 그래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지 사탕은…….”

“시, 식사 준비 되었습니다! 어서!”

키에르트의 잔소리가 다시 터지기 전, 황후궁 하녀들은 호화로운 저녁상을 차리는 것에 성공했다.

침대 위에 만찬이 펼쳐졌다.

형식도 예의도 없는 저녁상에 키에르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 입이 다시 열리기 전, 리시스가 웃으며 빵을 들어보였다.


“저 먹어요? 네? 이제 먹으니 괜찮은 거죠?”

“…….”

“네? 폐하, 저 먹어요?”

키에르트는 대답 대신 성큼 다가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리시스가 들고 있던 빵을 잡았다.

친히 빵을 쭉 찢은 키에르트가 빵조각을 리시스의 입에 대 주며 으르렁댔다.


“저녁도 굶었는데 빵 찢을 기운은 있겠나.”

“한 끼 굶는다고 죽지는 않……, 지만 빵 찢을 기운은 없는 것 같네요.”

리시스는 헤헤 웃으며 입을 벌렸다.

이렇게 얌전히 받아먹는데 잔소리하지는 않을 거죠?

리시스의 계략은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

키에르트는 자신이 내민 빵을 오물오물 씹는 리시스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마실 것도 내밀었다.

리시스는 얌전히 꼴깍 마셨다.


 


“이것도.”

키에르트는 고기, 채소, 곡물 등등 다양한 음식을 먹기 좋게 손수 잘라 리시스의 입으로 열심히 날랐다.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내미는 족족 받아먹기만 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식사가 술술 진행되었다.

어차피 배도 고팠겠다, 편히 먹으니 좋았다.


‘의외로 괜찮은데?’

처음엔 이게 웬 낯간지러운 짓인가 싶었지만 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뻔뻔해진 리시스는 급기야 키에르트를 부려먹기까지 했다.


“저거요.”

“이거? 옆에 빨간 걸로 줄까?”

“네.”

키에르트는 턱짓 하나로 황제를 부려먹는 황후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랐다.

커다란 등을 웅크리고 손톱만한 과일 껍질에 집중하는 키에르트를 바라보던 리시스가 문득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제 키에르트도 화가 누그러진 것 같은데다 배도 불러와서 슬슬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키에르트는 과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아직 심통이 다 가시지는 않은 목소리였다. 그래도 아까처럼 길길이 날뛰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찌르면 다시 웃어줄 수도 있어 보였다.


“폐하 손은 큰데 과일이 너무 작아요.”

“음. 잘 안 까지기는 하는군.”

“폐하가 그러고 있으니까 귀여워서.”

키에르트의 손이 잠깐 삐끗했다. 하지만 과일 까는 것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과일 까는 귀여운 남자가 되어버린 황제 폐하의 귓불이 슬그머니 붉어졌다.

리시스는 그 모습에 다시 킥킥 웃었다.

키에르트를 웃겨야 하는데 자꾸 자신이 먼저 웃음을 흘렸다.


“자.”

키에르트는 결국 과일 껍질 까는 것에 성공했다.

리시스의 입 안에 반쯤 뭉개진 과일을 쏙 밀어넣은 키에르트는 이제야 임무를 완수한 사람처럼 개운해 했다.

리시스는 과일을 입 안에서 굴리며 웅얼거렸다.


“이제 배불러요.”

“더 먹어.”

“……그럴까요?”

리시스는 결코 식탐이 없는 편이 아니었다.

에드린에서 지낼 때 굶지는 않아도 맛있는 걸 풍족하게 먹지는 못했다.

그래서 먹다 먹다 남길 수도 있는 쉬란에 와서도 과식을 할 만큼 먹었다.

소화가 안 될 정도로 먹는 건 문제가 있다 싶어 평소에는 자제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자신의 굶주렸던 배와 놀란 키에르트, 양쪽을 다 위로해줘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리시스는 논리적으로 식탐을 허락했다.

그리고 결국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꾸역꾸역 먹고, 드러누웠다.


“헉, 허억……, 헉. 수, 숨이 안 쉬어져…….”

“소화제를 들이라 할까?”

“아뇨, 안 돼. 소화제도 안 들어가…….”

“괜찮아?”

“말 시키지 마세요. 공기도 배부르니까.”

리시스는 헉헉거리며 배를 두드렸다.

사람 배인데 통통통 북소리가 났다.

쓸어내리면 소화가 될까 싶은데 배가 너무 불러서 손끝 하나 움직이기 싫었다.


“으으.”

“내가 해 줄게.”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곁에 누워 팔을 내밀었다.

리시스는 익숙하게 베개 밑에 키에르트의 팔을 끼워 넣고 품에 달라붙었다.

키에르트의 커다란 손이 리시스의 배에 닿았다.

평소에는 납작하던 배가 동그랗게 솟았다.


“그대의 배가 이렇게 될 때도 있군.”

“저도 사람인데요. 많이 먹으면 나오죠.”

“귀여워.”

“별게 다 귀여우세요.”

리시스는 민망해져서 키에르트의 가슴을 팔꿈치로 밀었다.

당연히도 키에르트의 몸이 움직일 리는 없었다.

키에르트는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리시스의 배를 계속 문질렀다.


“별것이 아니라 모든 게 귀여운 거지.”

“…….”

“그대는 내가 과일 까는 것도 귀엽다고 해 놓고선. 나는 그대의 배가 귀여우면 안 되나?”

“……맘대로 하세요.”

원래 기습은 리시스의 주특기인데, 요즘 들어 키에르트의 기습이 더 강해졌다.

부부가 닮는다고는 하나 이런 부분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이러다 할머니가 되어도 귀엽다고 하시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당연히 귀엽겠지.”

키에르트의 대답이 돌아오는 데는 단 일 초의 틈도 없었다.

리시스는 웃다가 문득 생각해 버렸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곁에 있을 수 있을까?’

키에르트와 있으면 평화에 젖어든다.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전란의 기운마저도 잊어버릴 정도로.

이렇게 녹아내리면 안 되는데.

준비해야 하는데.


“……저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음.”

키에르트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 말을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을 욕심내는 것은 아니니까.

지금 당장, 이 순간이 너무 좋아 조금만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뭐지?”

시간이 지나도 리시스가 입을 열 기색이 없자 키에르트가 먼저 물어왔다.


“……음……. 지금은 말고요.”

말을 꺼낸다고 했다가, 지금은 아니라고 했다가.

웬일로 리시스가 변덕이었다.

키에르트는 안 하던 짓을 하는 리시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리시스가 먼저 꺼내지 않는 것을 일부러 끄집어 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다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저 졸려요…….”

“그래, 자.”

키에르트는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며 가슴께를 토닥였다.

소화가 좀 되었는지 리시스의 눈은 금방 가물가물해졌다.


“일어나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리시스는 헤헤 웃으며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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