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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느린 복수의 맛 (132/153)


132. 느린 복수의 맛
202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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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 내게 감히!”

알헨크는 칼을 들고 다가오는 리시스의 병사들을 보고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하지만 꽁꽁 묶인 몸으로는 바닥을 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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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이딴 짓을 벌여도 로구안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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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리시스는 칼을 든 병사에게 손짓해 잠시 멈추었다.

알헨크가 혹시 자신의 협박이 통한 것인가 기대하며 리시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남의 말에 이렇게까지 열심히 귀를 기울인 건 온 생애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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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른 후엔 들을 정신이 없을 것 같으니, 지금 얘기해 줄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번 알헨크가 리시스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래, 빨리 지금이라도 명을 취소해. 차라리 포로로 잡아서 로구안과의 전쟁을 무마하는데 쓰겠다고……. 그 정도 수모는 참아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알헨크의 기대에 불과했다.

리시스는 초조한 알헨크와 달리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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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어차피 로구안이랑은 전쟁 중이야. 가만히 안 있으면 뭐 어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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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시스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알헨크의 기대를 와장창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알헨크가 굳이 외면하고 싶던 사실. 어차피 전쟁 중인데 왕자 하나 잡아갔다고 더 큰 난리가 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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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로구안은 딱히 네가 간절하지 않을 거야. 죽어주면 오히려 감사할 사람이 더 많겠지.”

로구안은 왕비도 많고 왕자도 많다. 거기에 공주들까지 합쳐지면 그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알헨크가 유력한 차기 왕 후보라 한들 다른 이들의 욕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로구안 왕도 특정 왕자를 편애하는 편이 아니었다. 영토를 넓힌 왕자가 예쁠 수도 있으나 그러다 발목을 잡으면 언제든 버릴 것이다. 그것이 로구안에서 왕자의 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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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당신은 아무 가치가 없어. 포로로 써먹을 수도 없고. 놓아주면 주변에서 귀찮게 굴 테니, 목숨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다 끊어버리는 게 제일 편한 선택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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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야, 나를 로구안에 넘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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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기면? 대가로 누가 뭘 줄까?”

리시스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했다.

약간의 희망은 더 큰 절망을 줄 수 있는 매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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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렇게 해 볼까? 너 대신 팔다리를 잘려도 좋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대신 잘리는 만큼은 봐 줄게. 그런데 그럴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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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어!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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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럼 말해 봐. 어디, 누구? 연락을 해서, 답장이 올 때까지는 기다려 줄게.”

알헨크도 어딘가에 전서조나 연락책 하나쯤은 숨겨 놓았을 것이다. 로구안에 연락을 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알헨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사람을 찾는 것은 그 무엇보다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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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봐, 누구든.”

알헨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누구든 있을 거다. 자신에게 유혹 당했던 수많은 사람들……, 자신에게 찬사를 보내던 추종자들, 내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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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내 편…….’

절망이 드리워진 순간, 알량한 자존심은 거짓말을 뱉지 못했다.

알헨크는 언제나 가볍게 유혹하고 돌아온 마음을 가볍게 저버렸다.

렌데일 저택에서 하녀들을 건드리던 것과 마찬가지로, 로구안에서도 똑같이 살았다. 그런 그를 안타까워하며 그리워할 사람은 없었다. 자신에게 준 상처를 돌려주고 싶어 이를 가는 사람만 잔뜩이다.

없다.

사람은 이용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진지하게 누군가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제 와서 그 ‘마음’이 필요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것을 얻을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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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너희들 중…….”

당장 알헨크의 곁에 같이 나뒹굴고 있는 몇 남지 않은 수하들마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같이 죽게 생긴 이 시점에는 남은 체면이고 의무감이고 없었다.

알헨크는 망연자실하게 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리시스는 재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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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줄게. 며칠이고, 몇 달이고.”

아무리 오래 기다린다한들 나타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만한 시간이 흐른 뒤, 알헨크는 더욱 절망하고, 더 깊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겠지.

리시스는 느리게 복수의 맛을 즐겼다.

***

알헨크는 버티고 버텼다.

혹시 버티다보면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을까 하는 미약한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연락의 답장이 도착하는 순간까지 그런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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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네.”

눈앞에서 색색의 포장을 하나씩 열어 그 안의 썩어 들어가는 절망을 보여주는 것은 리시스의 도락이었다.

알헨크는 기운이 다 빠진 눈으로 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딱히 가혹행위를 하지도 않았지만 알헨크는 이미 다 시들어 바스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동정심이 생기지 않았다.

리시스는 눈앞에서 쪽지를 펼쳤다. 그리고 본인이 먼저 읽는 대신 알헨크의 눈앞에 가져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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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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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이었다.

마지막 절망의 전갈은 간단했다.

『그냥 죽어.』

혹시 자신에게 악감정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이라도 무작정 연락을 했다. 팔 하나, 다리 하나를 담보로 자신을 노예로 들일 수 있다는 유혹까지도 해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헨크에게 그만큼의 집착조차 없었다.

거기에 로구안의 내부 사정은 알헨크 한 사람을 가지고 노는데 정신을 팔 만큼 여유롭지 않게 변화하고 있었다.

키에르트의 로구안 침략은 예상보다 더 본격적으로 바뀌어 갔다. 알헨크가 정복했던 나라들을 하나씩 로구안에서 다시 빼앗아 들어갔다. 그리고 이젠 슬슬 로구안 본토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알헨크는 순식간에 로구안의 영토를 넓힌 위대한 왕자에서 전란을 불러일으킨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그런 이에게 누가 팔 하나, 다리 하나를 떼어 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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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네.”

리시스는 조용히 복수의 끝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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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아니야아아!”

끝을 받아들이지 못해 울부짖는 알헨크를 내려다보며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떠올렸다.

만약 키에르트가 알헨크 같은 인질이 되어 자신에게 연락이 온다면 어떻게 할까. 팔다리 한 개쯤은 가벼이 내어줄 수 있겠다.

아니, 팔다리 모두를 내어주고 남은 생은 키에르트의 품에서 숨만 쉬며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반대로 자신이 인질이 된다면? 키에르트는 팔다리가 아니라 목이라도 내어줄 것 같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다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정말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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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잘 좀 살지 그랬어.”

리시스는 잔인하게 비웃으며 함께 마지막을 기다렸던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칼날을 곧추세운 병사들이 알헨크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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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야! 안 돼! 아아악!”

알헨크가 발악했다. 그러나 리시스의 단호한 명령이 거둬지는 일은 없었다.

알헨크의 팔다리 힘줄이 끊어지는 것을, 리시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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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악!”

자신의 비참한 말로를, 알헨크는 끝내 지켜보지 못하고 기절했다.

지켜보는 내내 숨을 참고 있던 리시스는 사위가 고요하게 내려앉은 후에야 겨우 날숨을 길게 토했다.

복수가 끝났다.

의외로 기분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만큼 알헨크라는 존재가 리시스에게 있어 정말 별것 아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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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절한 알헨크는 말에 묶여 로구안 쪽으로 보내졌다.

살면 사는 거고, 재수 없이 죽어도 그만이다.

리시스는 말이 멀어질 때까지 한참을 지켜보다가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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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야지.”

드디어 키에르트에게 돌아갈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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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 연락부터 해야겠지. 전서조는 돌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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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곧 돌아올 겁니다. 일단 렌데일 영지로 돌아가면 그동안 도착하지 싶습니다.”

미하엘이 날짜를 계산해 보며 말해주었다.

이미 버린 왕자라고는 하나 로구안에 자그마한 빌미조차 주고 싶지 않아 일부러 로구안 땅을 벗어나지 않고 버텼다.

그러는 동안 다른 일들은 방치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우선 렌데일 공작의 죽음에 대한 뒤처리도 해야 하고, 영주성에 가둬 둔 세니아도 수도로 압송해야 했다. 알헨크가 엉망으로 약탈한 마을들을 살피기도 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다 뒤로 던져버리고 키에르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마음이 달아 동동거리는 리시스의 모습에 미하엘은 황후 폐하지만 귀여워서 미소를 지었다.

반면 렉싱턴은 죽상이 되었다.

그걸 본 리시스는 자신이 깜빡하고 있던 것 하나를 다시 떠올렸다.

렉싱턴은 리시스를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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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 장군님은……, 그냥 우리가 인질로 끌고 가버리면 안 되나?”

그냥 쉽게 처리해 버리고자 하는 리시스의 시도에 렉싱턴이 가늘게 눈을 뜨고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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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디로 갈지는 저 스스로 정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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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디로 갈 건데?”

렉싱턴이 미련하게 에드린 왕에게 돌아가 ‘공주님을 모셔오는 건 실패했습니다. 대신 로구안 왕자를 처단하는 것은 도왔습니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할 것 같으면 그냥 의견 무시하고 납치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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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방의 마을들을 돌아보고……, 그 다음은 그 후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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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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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렌데일 쪽보다 에드린 쪽의 약탈이 더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에드린 쪽까지는 리시스 님이 챙기시기 입장이 애매하니 저라도 뭐라도 도울 것이 있는지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드린 왕이 그런 걸 챙길 사람이 아니니까.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렉싱턴도, 리시스도, 우리 모두도 다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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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리시스가 신음하며 렉싱턴을 빤히 쳐다보았다.

렉싱턴은 우직한 충정을 품고 있지만 작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물러남이 없었다. 에드린 왕이 아니라 에드린 자체를 위한 일이니 리시스도 말릴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그 후’가 걱정되었다.

돕는 것까진 좋은데, 그런 다음 이곳에 정착을 한다 하더라도 에드린 왕이 가만히 내버려 둘까? 더구나 리시스를 도와 알헨크까지 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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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같이 가.”

결심을 마친 리시스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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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일단 에드린의 공주니까,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가서 같이 보고, 도울 게 있으면 내 개인 이름으로라도 지원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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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실 겁니다.”

미하엘이 화들짝 놀랐다.

리시스가 키에르트에게 가는 길을 바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이 먼 곳으로 홀로 싸우러 온 것으로 끝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바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에드린을 돌아보시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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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 장군님이 죽겠다는데 지켜만 볼 수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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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겠다고는 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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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거나 마찬가지인 길을 가겠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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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마 부정하지 못한 렉싱턴이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의외로 싸우는 동안, 이동하는 동안, 미하엘과 의견이 잘 맞아 떨어졌지만 이 순간만큼은 리시스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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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도 이 정도는 기다려 주실 거야.”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믿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라고 했던 사람이지 않은가.

리시스가 렉싱턴을 살리고 싶어서, 그리고 에드린의 백성이 걱정이 되어서 귀환을 조금 늦추는 정도는 웃으며 넘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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