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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에드린의 새 왕 (143/153)


143. 에드린의 새 왕
2022.12.15.


리시스의 일갈과 동시에 선물을 감싼 상자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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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엇!”

알현실에 있던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리시스와 렉싱턴만이 놀라지 않았다. 그들의 뒤로 상자 안에서 ‘쉬란의 선물’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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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경비병!”

에드린 왕은 경악하며 옥좌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경비병들이 서둘러 활을 시위에 메기고 창을 꼬나쥐며 달려왔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실전으로 훈련된 리시스의 부대를 상대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에드린 왕은 실전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리나 꽥꽥 질러대는 유약한 왕의 병사는 마찬가지로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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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경비병으로 감당하지 못해 왕실 친위대까지 달려 나왔다.

그러나 그들 역시 전투를 모르는 햇병아리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에드린 왕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병력이었다.

무아렌 강변에서 키에르트를 상대로 싸울 때, 한 번만이라도 빌려주면 안 되겠냐고 리시스가 애걸복걸하던 그들.

에드린 최고의 천재들만 모아 만든 부대였으며 아마 그 무위는 지상 최고일 것이라 모두가 입 모아 칭송했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에만 번드르르한 허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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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하네.”

리시스는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며 짧게 소감했다.

뭐하러 저 따위 부대를 아쉬워했었을까. 있으나마나 했던 병력이었다. 이렇게 일격에 우수수 나가떨어질 정도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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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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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이다!”

검을 피해 도망가던 귀족 중 하나가 외치는 말에 리시스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랬다.

이것은 반역이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들고 일어날 만큼 최악의 왕이라면, 그것을 반역이라 말하는 것이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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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상관없어.’

자신의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저 휘황찬란한 옥좌에서 에드린 왕을 끌어내리는 것.

그리하여 엄마와 자신의 묵은 복수를 달성하고, 황폐해진 에드린이 살 만한 곳이 되는 것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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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 이 무슨 짓이냐!”

에드린 왕이 옥좌 위에서 벌벌 떨며 외쳤다.

리시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한 발, 한 발 그 옥좌로 다가갔다.

옥좌에 앉은 이는 파랗게 질려 벌벌 떨고 있었고, 다가가는 이는 더없이 차갑고 침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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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죄의 굴레를 벗어난 리시스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등 뒤로 아무리 처참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도, 피비린내가 온 세상에 퍼져도. 리시스의 세상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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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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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가 감히 왕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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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리시스는 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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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당신더러 왕이래?”

리시스의 손이 에드린 왕의 머리 위에 얹혀 있던 왕관을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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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이익! 네가 감히! 감히!”

에드린 왕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홀의 전투는 거의 마무리되어 갔다.

‘왕’이나 ‘공주’, ‘황후’ 같은 지위가 아닌, ‘리시스’를 위해 모인 자들은 머리 위의 관을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리시스의 머리 위에 금은보화가 박힌 왕관이 없어도 그들은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에드린 왕의 병사들은 왕관을 잃은 왕의 모습에 우왕좌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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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 도망가!”

기울어진 전세는 순식간에 전장을 사로잡았다.

모든 것이 정리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에드린에는 무아렌 강변에서 쉬란에 맞서 싸우던 군사 외에 상비군이 없다. 왕을 지키는 친위대, 그리고 에드린 성을 지키는 수비대가 전부였다.

나약한 그들은 리시스의 흉폭한 친위대에 잡아먹히듯 제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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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완료했습니다.”

보고를 들은 리시스가 에드린 왕을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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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려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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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 이것들이! 감히! 무엄하다! 무엄하다!”

에드린 왕이 악을 쓰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평생 술잔보다 무거운 것은 들어 본 적도 없는 이가 친위대의 힘을 이겨낼 리 없었다.

결국 에드린 왕은 끝의 끝까지 버티고 앉아 있던 왕좌에서 끌려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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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악!”

에드린 왕은 질질 끌려 내려가며 발악했다.

귀를 찢을 듯한 시끄러운 소리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악기의 소리보다 달콤했다.

리시스는 텅 빈 왕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따위 의자가 뭐라고.

뒤를 돌아보니 에드린 왕은 계단 밑까지 끌려 내려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자신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났던 왕비와 왕자들도 함께였다.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이들이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높아진 눈높이가 단박에 느껴졌다.

절벽 위에 오른 것처럼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왕위.

이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문득, 이것을 빼앗는 것이야말로 에드린 왕에 대한 진정한 복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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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공주도, 황후도, 원한 적 없었다.

마찬가지로 왕도 되고 싶다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이대로 손에 쥔 왕관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느냐, 자신의 머리 위에 얹느냐.

한참을 내려다보던 리시스는 천천히 왕관을 자신의 머리 위에 얹었다.

그것을 본 에드린 왕이 다시 한번 발작하듯 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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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네가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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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리시스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예전에는 에드린 왕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감히’ 오만방자한 행동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리시스는 느린 동작으로 빈 왕좌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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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누가 ‘감히’를 말할 수 있지?”

이렇게 옥좌에 앉아, 왕관을 쓰고 있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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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스는 사람을 찔러 죽일 수도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으로 에드린 왕과 그의 가족을 돌아보았다.

에드린 왕은 아직도 발악 중이었지만 늘 눈치를 보며 살던 왕비와 왕자들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들이 그렇게 미워하고 마음껏 괴롭히던 리시스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자존심 상해 부들부들 떨고는 있지만, 적어도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숙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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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분할 것 없어.”

저들은 몰랐기 때문에 자신을 미워했다.

그렇다면, 진실을 알게 된 후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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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왕을 꼬신 게 아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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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비가 숙였던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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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였어.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리시스는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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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지키기 위해 발버둥쳤을 뿐이야. 그게 최선이고, 고를 수 있는 최대한의 선택지였으니까. 그걸 잘못했다 말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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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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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어야 했다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어?”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왕비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알현실 안에는 베일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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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러지 않을 수 있었어.”

그 침묵을 깰 수 있는 것은 오직 리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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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굳이 한 사람의 인생을 희생시켜 또 한 생명을 나락으로 끌고 갈 필요도 없었어.”

엄마를 희생시키지 않았어도. 자신이라는 슬픈 운명을 가진 존재를 만들지 않았어도.

당신은 살 수 있었다.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했다는 것은 욕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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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지.”

에드린 왕과 공존할 길은 없다.

반드시 둘 중 하나만 살아남아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자신은 소중했다.

그 누가 그렇게 말해주지 않아도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자신을 소중히 하고, 자신의 욕심을 최고로 우선시하고, 멋대로 살 수 있는 만큼 멋대로 살 수 있었다. 자신은 그런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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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하라.”

리시스는 지극히 이성적으로 명했다.

***

아무리 썩어빠졌다 한들 일국의 왕을 끌어내리는 것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반발하는 사람, 대적해 보려는 사람, 자신이 왕이 되겠다며 나선 먼 방계의 왕족까지.

이 모든 것들이 리시스에게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까지 급물살을 타는 상황까지는 리시스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드린 왕을 끌어내린 것은 이미 저질러진 일. 물리적인 저항부터 차근차근 대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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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는 영지의 세율을 너무 높여 백성들이 굶어죽기 직전이었습니다.”

리시스의 명으로 저항하는 세력들의 조사가 일일이 진행되었다.

썩어빠진 물에 살던 물고기들은 마찬가지로 썩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에드린 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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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해.”

리시스의 목표는 일단 사람이 살 수는 있는 나라로 만들어 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드린 왕,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쓸어내야 했다.

그런데 하다 보니 끝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완전무결하게 깨끗하지 않았다.

키에르트나 렉싱턴같이 청렴결백한 사람이 드문 것이었다.

웬만큼 청소를 해 두면 당장 왕이 없어도 어떻게든 나라는 잘 굴러갈 거라 생각했다. 왕위를 원하는 이는 숱하게 많을 테고, 그들 중 가장 잘 해낼 것 같은 사람에게 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있었다.

욱하는 마음에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기는 했지만 직접 왕이 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과연 그 왕좌에 어울릴 사람이 있기는 한가 좌절감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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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리시스는 시들시들한 마음으로 다음 서류를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전술에는 통달했지만 국정에는 초보였다.

그래서 읽고 또 읽고, 완전히 이해가 될 때까지 집중해서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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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끝이 없네.”

벌써 밤이 깊었다.

곁에는 티티도, 렉싱턴 장군도 없었다.

티티는 키에르트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보냈고, 렉싱턴 장군은 에드린 왕을 끌어내리는 데 동참했다는 충격 때문에 은둔했다.

자신의 눈으로 백성들의 참담한 실상을 확인했으니 리시스의 작전에 동의했지만 그래도 ‘반역’이라는 글자가 주는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혼자 해결해야 했다.

리시스는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홀로 고군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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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

혹시 티티가 돌아오지는 않았을까 창문을 내다보아도 소식은 없었다.

키에르트는 잘 있을까.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키에르트의 생각이 파고들었다.

쉬란의 황제가 반역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문제가 커질 수 있어 키에르트는 우선 쉬란으로 돌아갔다.

로구안과의 협상이나 군사를 일으킨 것에 대한 후처리 등 키에르트도 황제로서 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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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똑같은 밤을 보내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견딜 만한 것 같았다.

그런다고 밤바람의 차가움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혼자 견뎌야 하는 밤은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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