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보고 싶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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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보고 싶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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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보고 싶어 죽겠다
2022.12.18.
에드린 왕의 목이 성벽에 걸렸다.
리시스는 성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결정한 에드린 왕의 최후였다.
왕비와 왕자들은 황야로 추방당했다.
반역을 일으켰을 때 에드린 왕의 목은 바로 잘렸다. 그러나 그 후의 처분은 한참을 고민한 후에야 결정할 수 있었다.
에드린 왕과 관련된 왕족을 모두 죽이느냐, 살린다면 어떻게 처분하느냐.
함께 상의할 사람이 없으니 더욱 힘들었다.
‘폐하…….’
이럴 때 키에르트가 곁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고민이 힘들지도 않았을 텐데.
혼자서 살아남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완전히 혼자였던 적은 없었다.
전선에서는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했고, 쉬란에서도 키에르트와 늘 함께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모조리 돌아오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 책임이 이렇게 무거울 줄이야.’
뭐든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의지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진작 이렇게 되었어야 했다. 이제야 비로소 한 사람으로서 제대로 살아가게 되었는데……. 그 무게가 생각 이상이었다.
무거웠다.
“전하. 바람이 찹니다. 외투를 준비했습니다.”
“응.”
리시스는 시종이 내민 외투를 어깨에 걸쳤다.
이제는 어릴 때처럼 리시스가 춥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 하녀들이 아니라, 털끝 하나라도 상할까 걱정하는 사람들로 에드린 성이 가득했다.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삶이었다.
“전하, 센트린 공작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온 사방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찾는다.
그러나 뭘 하든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공작이든 백작이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간다. 만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게 할 수도 있다.
그 아무도 리시스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리시스는 천천히 성벽 밖, 도시의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더욱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움직여야 했다.
자신이 뱉은 단어 하나로 누군가의 인생이 확확 뒤바뀌어버릴 수도 있었다.
분명히 백성을 위해 에드린 왕이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움직였다. 그런데 막상 그를 끌어내리고 보니 그 후에 에드린을 이끌어가는 것이 더 큰 문제로 남았다.
‘왕…….’
아직 에드린의 왕위는 빈 상태다.
보통은 반역을 일으킨 사람이 왕위에 앉지만, 리시스는 그 자리를 선뜻 거머쥘 수 없었다.
책임감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그 외에도 마음이 가지를 않았다.
키에르트처럼 태어난 순간부터 황제의 자리를 약속받은 존재가 아니라 그런 모양이다.
“……가지.”
리시스는 천천히 몸을 돌려 성벽을 내려갔다.
복도 안으로 한 발짝을 내디딘 리시스는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공주 리시스’였을 때에는 이 천장이 얼마나 높고 두려웠던가.
으리으리한 왕궁에 잔뜩 겁을 먹었고, 깊고 넓은 복도 끝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머리채를 휘어잡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그 누구도 리시스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
***
“리, 리, 리시스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편히 앉아도 돼.”
“화, 화, 황공하옵니다.”
리시스는 마음 편히 가지라는 의미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센트린 공작은 그 미소에 더욱 바짝 얼어붙었다. 긴장 외에도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았다.
“오는 길이 많이 힘들었나?”
“아, 아, 아닙니다.”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서.”
“아, 이, 이건 지병이 좀 있습니다. ……쿨럭!”
“아……, 그랬구나.”
리시스는 낙담하며 머릿속의 리스트에서 센트린 공작의 이름에 줄을 그었다.
“그런데, 왕위 때문에 부르신 것입니까?”
리시스가 축출당하지 않은 귀족들을 하나씩 불러들이고 있다는 소문은 오만 곳까지 다 퍼졌다.
센트린 공작도 자신의 차례가 오겠지 생각하며 대기 중이었다. 그래서 리시스의 부름이 닿기가 무섭게 신속하게 달려왔다.
“……왕위라.”
“예, 반발할 이는 아무도 없을 텐데, 아직 조심하시는 겁니까.”
“없을까?”
“누가 감히 반발하겠습니까…….”
“정당한 이유로 반발하면 들어보고 양보할 의향도 있는데.”
“예……?”
리시스는 진심이 담긴 농담을 중얼거렸다.
센트린 공작은 리시스의 저의를 이해하지 못해 눈만 껌뻑였다.
“……아니야.”
리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각 지역의 상황이 어떤지, 직접 보고를 들어보려고 불렀어.”
“아, 아아……, 예.”
그제야 센트린 공작은 마음을 놓으며 준비해 온 보고자료를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왕보다는 신하가 되기에 좋을 타입의 사람이었다.
“흉년이 이어진 지 삼 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날씨 문제도 있지만 물자의 흐름 자체가 멈춰 있어 악순환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음. 쉬란과 새로이 교역을 트기 시작하면?”
“그럼 해결의 물꼬가 트일 수도 있지요. 알음알음 물밑에서 오가던 것과 달리 본격적인 시장이 열리게 될 테니까요.”
“흐음…….”
생각에 빠진 리시스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센트린 공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이건 개인적인 질문이긴 합니다만.”
“응?”
“해도 됩니까?”
무슨 질문을 하려고.
리시스는 눈을 깜빡이며 센트린 공작을 마주보았다.
“해 봐.”
“쉬란과의 국혼은 진짜로 무효……, 가 된 겁니까?”
“어?”
“전 왕이 혼인 무효를 선언해서 에드린으로 돌아오신 건가 싶기도 하고…….”
“……아.”
리시스가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으로 보일 수 있었다.
아직 키에르트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자신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쉬란의 황후, 에드린의 왕.
“두 가지를 동시에 하시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센트린 공작이 리시스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똑같이 했다.
역사적으로 왕과 왕의 국혼이 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보통 서류상의 혼인관계에 불과했다.
후계를 만들 때까지만의 단기간 동거. 그리고 후계가 생긴 이후로는 각자의 나라를 통치하며 살았다.
‘그건 싫어…….’
잠시 떨어져 있는 지금도 이렇게나 싫은데, 평생을 그렇게 지낼 수 있을까?
그렇다고 에드린을 저버릴 수도 없었다.
에드린도, 키에르트도 소중했다.
둘 다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둘 다 가져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리시스는 두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러나 잡히는 것은 허공뿐이었다.
***
“물러가. 잠시 쉬겠다.”
리시스는 피로로 뻐근한 눈을 문지르며 손을 내저었다.
아직 보고할 일이 남아 있는 신하들이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조아렸다.
“예, 전하.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아니, 퇴근 좀 하라고.”
“하지만 밀린 안건이 너무 많습니다.”
“퇴근해. 명령이야.”
“앗…….”
신하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오늘은 날이 아니다 판단했는지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집무실을 벗어났다.
“하아…….”
리시스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눕혔다.
왕은 아니었지만 왕의 역할은 리시스가 수행하게 되었다.
당장 에드린 안에 급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어쩔 수가 없었다.
에드린 왕이 미뤄뒀던 일들이,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폭우처럼 쏟아졌다.
리시스는 잠깐, 이라는 말을 할 새도 없이 일이 밀어닥쳤다.
몸과 마음이 다 무거웠다.
‘몸이 진짜 좀 안 좋은데……?’
알헨크와 싸울 때부터 쉴 새 없이 일에 몰아붙여졌다.
슬슬 한계가 올 때도 되었다.
리시스는 어의를 부를까 하다가 그만두고 집무실 한쪽에 놓인 소파에 몸을 눕혔다.
‘잠깐만 쉬었다가…….’
생각이 끝을 맺기도 전, 리시스는 깜빡 잠에 빠져들었다.
***
“……응?”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것은 한밤이었다.
벽난로의 타닥거리는 소리에 리시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낮에는 난로가 필요할 정도로 춥지 않아 불을 켜지 않았다. 깊은 밤, 자기 직전에만 조금 피우는 정도다.
그나마도 집무실에 있을 때는 일을 하느라 추운 줄도 몰라 거의 피우지 않았다.
리시스는 오늘 집무실에 불을 때라는 명령을 한 적이 없었다.
“누구야.”
리시스는 벽난로를 들여다보고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웬만한 반대세력은 정리했지만 암살의 위험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리시스는 몸을 굳혔다.
“저 때문에 깨셨군요. 죄송합니다.”
그때 벽난로 앞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이 몸을 돌렸다.
리시스는 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장군님!”
렉싱턴은 에드린 왕을 몰아낸 이후, 줄곧 은둔 중이었다.
에드린 성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마련해 준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에드린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동안, 렉싱턴은 가만히 있었다. 싸우지도 않고, 그렇다고 막지도 않으며.
리시스가 처음부터 그러라고 명을 내렸다.
에드린 왕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렉싱턴. 그런 렉싱턴에게 자신의 손으로 에드린 왕을 끌어내리는 일을 명령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미 흔들리고 있던 마음에 추 하나를 얹을 수는 있었다.
렉싱턴은 에드린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궁핍한 에드린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했다.
에드린 왕이냐, 에드린이냐.
리시스는 렉싱턴에게 어느 한쪽을 고르라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현장의 습격에서도 그저 가만히 있으라 명했다.
그리고 이제는 진짜 선택을 할 순간이었다.
에드린 왕을 끌어내린, 하지만 에드린 왕가의 피를 가진 리시스.
또는 반역자.
어느 쪽을 택하든 렉싱턴의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못내 미안했던 리시스는 방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그저 기다렸다.
어쩌면 자신에게 화를 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유난히 마음이 약해졌던 하필 오늘 이렇게 자신에게 먼저 와 주다니.
“……괜찮아?”
리시스는 조심스레 물었다.
렉싱턴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옆으로 불빛을 받은 볼이 깊게 파였다. 혼자 한 마음고생의 깊이가 그대로 보였다.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잘 계신지 보고 싶어 찾아오게 되네요.”
“나도 보고 싶었어.”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울 뿐이다.
그 마음에 그저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자신을 찾아온 것이 부담스럽지 않게.
용기 내어 방 밖으로 나와 준 만큼, 반가운 얼굴이 될 수 있도록 웃으려 했다.
“……리시스 님.”
렉싱턴이 당황하며 허둥지둥 다가왔다.
리시스는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주워 담기라도 할 것처럼 더듬더듬 얼굴을 짚었다.
“……보고 싶었어.”
말을 해 버리니 마음이 선명해졌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죽겠다.
황제 폐하.
키에르트.
내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