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황제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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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황제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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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황제의 유혹
2023.01.12.
무아렌 강이 가까이 다가왔다.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붙어 살았던 곳이다. 근처 지형지물만 보아도 어디쯤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게나 도망가고 싶던 무아렌 강을, 자신의 발로 다시 찾게 되었다.
떠나 있던 기간은 일 년 반에서 이 년 남짓.
길다면 긴 기간이지만 산과 강이 변화할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
그런데 변해 있었다.
리시스는 마차 창밖에 보이는 낯선 풍경을 머리로 받아들이지 못해 눈을 깜빡였다.
“……과로를 했나…….”
눈을 깜빡이고, 비비고, 머리를 휘젓는 등 정신을 차려보려는 모든 시도를 했으나 역시 보이는 낯선 풍경이 바뀌지는 않았다.
“……저게 뭐예요?”
무아렌 강변에 대체 저것이 왜 서 있는 것인가.
심지어 저 거대한 것으로 향하는 마차가 어느 순간부터 덜컹거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리시스는 뒤늦게 깨달았다.
마차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밑을 보자, 대리석처럼 매끈한 돌로 포장된 도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포장도로?”
도로는 아직 축조 중인 건물까지 쭉 이어지고 있었다.
마차는 건물 앞에 멈춰섰다.
리시스는 건물에 눈을 고정한 채 마차에서 내렸다.
내려서 보니 멀리서 봤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해 보였다.
“……이건 뭐죠?”
리시스는 아찔한 머리를 움켜쥐고 물었다.
“성입니다.”
옆에서 키에르트가 차분히 대답했다.
리시스는 다시 바뀐 키에르트의 말투에 돌아보았다.
건물에 눈이 팔려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보니 사방에서 인부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리시스는 한눈에 정황을 알아차렸다.
“성인 건 보면 알겠는데요……, 이게 왜 여기에 세워지고 있는 것일까요?”
리시스는 약간 실성할 것 같은 기분으로 물었다.
이건 자신이 생각한 선물의 범위를 아득하게 뛰어넘었다.
이제 막 토대 공사를 마치고 위로 올리기 시작한 것 같은데, 얼추 보아도 규모가 에드린 성의 몇 배는 되어 보였다.
“그 질문에 답변하겠습니다, 에드린의 리시스 왕.”
키에르트는 정중한 말투에 정중한 태도까지 더했다. 눈빛에도 장난기 하나 없었다. 언뜻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리시스는 새삼스러운 그 모습에 덩달아 바짝 긴장하며 허리를 세웠다. 왕으로서, 황제 키에르트를 맞이하는 것처럼.
“전 에드린 왕이 국혼 무효를 주장했으나, 이는 적법한 혼례 절차를 거쳤으며 부부로서의 의무도 제대로 지켜진 결혼이었습니다.”
“동의합니다.”
리시스의 대답에 굳어 있던 키에르트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스쳤다.
키에르트의 공식적인 설명은 이어졌다.
“이전엔 에드린의 공주였으나 에드린의 통치자가 된 점, 공주에서 왕으로 신분이 승격된 점으로 인해 애초에 주고받았던 국혼 조약의 재협상을 제안드립니다.”
“……동의합니다.”
공적인 언어로 말하고는 있지만,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이어가고 싶다는 말의 다른 식 표현이었다.
두 사람이 마냥 공적인 위치를 벗어날 수 없는 입지에 있는 만큼 피해갈 수 없는 논의이기도 했다.
리시스도 진지하게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아렌 강은 에드린과 쉬란의 국경이자 각 수도에서부터의 이동거리도 비슷한, 최적의 중간지입니다. 더구나 무아렌 강 유역의 땅은 비옥하며 기온도 두 나라의 중간 정도라 무슨 작물이든 키우기에 적합한 곳임을 에드린 왕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무아렌 강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 지지부진한 전쟁이 이어져왔던 이유 중 하나였다.
무아렌의 훌륭한 기후와 토양은 두 나라 모두 포기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웠다. 그러나 정작 싸워대느라 경작을 할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는 것이 웃긴 일이었다.
두 나라가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다면 무아렌의 땅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자, 성은 쉬란 쪽입니다.”
키에르트가 집 파는 사람처럼 성과 땅을 가리켰다.
리시스는 집 보러 온 사람처럼 키에르트가 가리킨 쪽을 착실히 눈으로 따라갔다.
“네에.”
“하지만 쉬란의 인접한 마을은 이곳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고, 에드린 쪽은 사람이 비교적 많은 편이라 그쪽의 노동력을 많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성을 본 순간 파악했지만 키에르트의 설명을 들으니 조금 더 분명해졌다.
갑작스럽게 살림이 나아진 무아렌 근방의 영지들. 돈 나올 구멍이 생겨서 행복해진 영주들.
건설 현장이야말로 돈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곳이다.
그리고 이곳의 돈은 쉬란에서 흘러나오고 있을 것이고.
리시스는 눈에 힘을 주고 키에르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키에르트가 아무리 자신에게 순수한 선의를 가지고 호의를 베푼다 하더라도, 두 나라는 엄연히 다른 나라였다. 분명히 할 건 분명히 해 두어야 했다.
“그 대가로 쉬란은 에드린에게 뭘 요구하실 거죠?”
“쉬란이 요구할 건 없습니다.”
“결국 쉬란의 돈을 에드린에 퍼주는 일이잖아요.”
“쉬란의 돈이 아니라 제 돈입니다.”
키에르트가 부드럽게 부정했다.
리시스는 잠깐 머리 회전이 느려졌다.
국고는 황제의 개인 지갑이나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래도 완전한 개인 자산과 분리되어 있기는 하다. 국가를 운영하는 돈을 그렇게 섞어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을……, 개인 돈으로 올릴 수가 있어요……?”
“아직도 남편이 얼마만큼 대단한 부자인지 파악이 덜 되신 모양입니다. 이런 성 몇 개를 더 지어드려야 파악이 되실까요?”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파악할게요.”
리시스는 파랗게 질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필요하지도 않은 성을 그렇게 쓸데없이 막 지어올리며 돈 낭비, 자원 낭비, 인력 낭비를 할 필요는 없었다.
“이어 설명하자면, 이 성은.”
키에르트가 성문이 될 곳 앞에 다가가 서서 리시스를 돌아보았다.
아직은 성문이 달려 있지 않고 돌벽뿐이지만 그의 머리 위로 까마득하게 뻗어 올라간 벽의 높이만으로도 그 위용이 가히 짐작이 갔다.
“혼인조약을 유지하고 싶은 쉬란의 성의 표시이자, 황후국인 에드린에 대한 존중이며, 키에르트의 뇌물입니다.”
“네?”
진지하게 듣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어울리지 않는 것 하나가 붙어왔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진지했다.
“잘 봐달라는 뇌물.”
“…….”
“그리고 마음의 크기는 물질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니까요.”
그렇기는 한데……, 너무 커서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도 좀 문제가 있긴 한데요…….
남편에게 집을 선물받았다면 몹시 기뻤을 텐데 성을 통째로 받게 되니 감당이 안 되는 기분이었다.
“저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뭘 돌려드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쉬란으로서는, 혼인관계의 유지. 그거면 충분합니다.”
“정말 그것뿐이에요?”
“예, 거기서 더 나아가 향후 두 나라가 더 많은 협력관계를 맺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꼭 쉬란에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에드린이 가진 개발되지 않은 자원과 노동력, 수출품 등을 쉬란이 우선적으로 챙길 수 있게 되는 것은 큰 이득이다.
“해서, 두 나라의 중간지점에 이 부부성을 짓고 협력에 필요한 논의는 이곳에서 ‘함께’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위치도 각각의 수도에서 딱 중간이겠다, 발전시킬 주요 위치의 한가운데겠다, 무아렌은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게다가 전쟁을 벌였던 곳이니……, 무아렌에서 통합이 이루어지면 차차 다른 지역의 감정도 옅어지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쉬란의 황제’라면 흰 눈을 뜨는 사람이 에드린에 많다. 하지만 오가는 인부들이 지나가며 키에르트를 보는 눈빛에 증오는 보이지 않았다.
‘어이구, 우리 고용주님!’
애틋했다.
키에르트의 선택은 지나칠 정도로 과감했으나 그 효과만큼은 최고였다.
두 나라의 묵은 감정 해소, 무아렌 지역의 개발, 황제 부부가 중간에 지낼 곳 해결까지.
“이제 다 끝난 건가요?”
리시스는 만족하며 활짝 웃었다.
키에르트의 눈이 흔들렸다.
“아, 아니……, 이제 시작인데…….”
무슨 소리인가. 지금까지는 프롤로그에 불과했다.
이제 막 전채 요리를 해치우고 메인 요리를 꺼내오려는데 잘 먹었다며 일어서는 법이 어디 있는가.
키에르트는 다급히 리시스의 두 손을 끌어와 잡았다.
“아직 진짜 할 말은 남아 있습니다.”
“아직요?”
“예. 이번에는 쉬란의 황제가 에드린 왕에게 하는 말이 아닌, 키에르트가 리시스에게 하는 말.”
“아…….”
키에르트는 맞잡은 리시스의 손등에 차례로 입술을 댔다.
키에르트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감각에 리시스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꽉 붙잡고, 삼켜버릴 듯 꽉 쥐었다.
키에르트의 눈동자가 리시스를 향했다. 세상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이 말을 진작부터 했어야 했는데……, 나도 이 말을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지 뭐야.”
“뭔데요?”
기다리다 못한 리시스가 재촉했다.
키에르트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리시스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마주치며, 입술을 타고 말을 넘기듯 속삭였다.
“사랑해.”
“……!”
리시스는 숨을 멈췄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엄마가 편지에 써놓은 ‘사랑한다.’를 봤을 때는 그저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키에르트의 입에서 나온 ‘사랑해.’는 그럴 수 없었다.
아까 전 마차에서도 느꼈던 것을 다시 느꼈다.
막연히 머릿속에서 느끼고 있는 것과, 그것을 말로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물리적으로 힘을 가진 것처럼, 거세게 몸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사랑해, 리시스.”
키에르트가 다시 한번 고백했다.
“……정말?”
리시스는 겨우 되물었다.
키에르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리시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키에르트는 이미 온몸으로, 모든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으니까.
“응. 사랑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만큼 사랑했던 사람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아…….”
가슴 한가운데에서 온천이 샘솟은 것처럼 뜨끈했다.
그런 감정은 자신에게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뭔지도 몰랐다. 알 필요도 없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사랑을 받아보니 너무 좋았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행복했다.
웃음이 나와야 하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꾹꾹 밀어 넣어두었던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리시스는 울먹이며 키에르트를 바라보았다.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붉어진 눈가를 손끝으로 쓸었다.
이 사람 앞에서는 내내 웃을 필요도, 밝고 예쁜 모습만 보여줄 필요도 없었다.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 진짜 사랑을 해 주는 사람.
리시스는 인정했다.
자신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도 사랑해요.”
사랑하고 있었다고.
<황제의 유혹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