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아.”
머릿속이 아찔했다.
역겨운 토기가 목구멍 위로 차올랐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숨을 들이켰다.
‘어째서 나를?’
절망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나는 몰려올 통증을 대비하기 위해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한데 이상하지. 왜 전혀 아프지 않은 걸까?
조심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아랫배를 뚫은 녹슨 청색의 검이었다. 바닥을 적셔야 할 피 웅덩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건 그저 ‘관통’만 하고 있었으니까.
위이이잉.
그뿐만이 아니다.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검 손잡이 위로 느리게 자전하는 구체가 보였다.
구체는 볼품없이 깨진 상태였는데, 보드라운 흰색 실이 그런 구체를 보호하듯 촘촘히 감고 있었다.
나는 단숨에 알아차렸다.
“이건, 내 영혼?”
“그래.”
뭐야, 정말이야?
루의 금안이 내 배를 뚫은 검을 불만족스러운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널 부른 이유이기도 하지. 네 영혼의 구조와 형상을 더 면밀하게 확인할 필요성을 느꼈거든.”
그 말에 홀린 듯 구체를 탐색했다.
‘신기해.’
만져 볼 수도 있을까?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실타래처럼 촘촘히 묶인 하얀 실을 건드렸다.
“아야야.”
나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아, 젠장. 심장이 너무 아파서 잠이 확 깨 버렸네.
루가 간만에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언제쯤 클래?”
“흠흠. ……그럼 이 검은 로궤의 물건이겠네?”
“구식 마도구를 우르드가 개조했지. 임시로 영혼을 추출해 내는 마도구로.”
“우르드?”
“경보가 울리고 만났을 텐데? 며칠 쥐어짠 대가로 휴가를 보내 줬더니만. 성역에 침입자가 생기자마자 꼬리에 불붙은 원숭이처럼 허겁지겁 돌아오더군.”
아, 그 은발의 칼레파. 그 남자가 제작한 마도구였구나.
루가 조심스럽게 내 구체를 턱짓했다.
“이 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겠어?”
당연히 안다.
“내 영혼이 깨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는 정체 모를 힘.”
“잘했어.”
뭘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내가 꺼내고 싶던 주제였다.
“루 씨, 며칠 전 세레니예 성 지하에서 말이야. 내게 심장 결정석을 삼킨 적 있느냐고 물었던 거 기억해?”
“글쎄. 그런 일이 있었나? 떠오르지 않는데.”
나는 그의 모르는 척을 못 들은 척했다.
“퀸 섬에서 만난 당신도 심장 결정석을 찾고 있었지. 나는 그게 필시 메피스토와 연관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어.”
“아아.”
“당신이 찾던 심장 결정석. 혹시 내가 삼켜 버린 거야?”
“흠.”
반응이 영 시원찮다. 나는 멋쩍은 기분으로 되물었다.
“왜? 틀렸어?”
“아니. 그냥, 똑똑하게 구니까 재미없네.”
이런 또라이를 다 봤나.
그때. 루가 내 영혼 위로 손을 펼쳤다.
강렬한 기운이 구체 안으로 스며들었다. 곧 구체를 감고 있던 하얀 실이 풀리면서, 하나의 작은 진주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게…… 내 영혼을 보호하는 힘의 본래 형태.’
이렇게 보니 평범한 영혼 결정석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응집된 미지의 힘을 손끝에 올린 루가 내게 말했다.
“잘 봐 둬. 이게 바로 메피스토가 퀸 섬을 불바다로 만들고, 마도 전쟁을 일으킨 원인.”
“…….”
“디안 케트의 심장이다.”
뭐?
그 순간, 응집된 힘이 재차 풀렸다.
한낱 실의 모습으로 돌아온 힘은 내 영혼의 구체를 천천히 둘러 안았다.
“쯧.”
짧게 혀를 찬 루가 내 몸에서 우르드가 만든 마도구를 뽑아냈다. 뽑힌 검은 한 줌의 검은 재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역시 일회성인가? 제작에 필요한 인력과 원가를 고려하면 쓰레기 못지않은 효율성인데.”
일회성이고 뭐고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 남은 것이라곤 충격적인 한 문장뿐.
디안 케트의 심장.
내가, 디안 케트의 심장을 먹었다.
‘물론 루가 칼레파 급의 영혼 결정석일 거라고 언급해 두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디안 케트라니.
내가 디안 케트의 심장을 먹었다니!
“어, 어떻게 해? 중요한 물건 같은데 내가 먹어도 되는 거야? 소화는? 소화는 언제 돼?”
루는 다시금 잡힌 제 옷깃과 함께 내 손등을 감싸 쥐며 자신의 옆으로 바짝 이끌었다.
“진정해, 데이지. 중요한 건 ‘먹었다’가 아니야. ‘언제 먹었느냐’지.”
“언제 먹었냐니? 그야 당연히 널 처음 만날 때쯤…….”
루가 살짝 비소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시절의 너? 지금도 연약하지만 그 시절의 너는 뭐랄까. 밟히다 만 풀꽃 같았는데. 그때의 네가 디안 케트의 심장 결정석을 삼켰다면 육체가 터져 버렸겠지.”
아.
‘틀린 말은 아니야. 강력한 힘은 강력한 육체를 필요로 하니까.’
하지만 그리 여기면 의문은 더 깊어진다.
“그럼 언제 먹었는데?”
“몰라.”
뭐어? 몰라아?
“나를 계속 지켜봤다며? 그런데도 언제 주워 먹었는지 모른다고?”
“바로 그거야.”
헉. 숨을 삼켰다. 두 발이 붕 뜬다 싶었는데, 어느새 루가 나를 안아 든 후였다.
그는 이전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내 걸음이 너무 느려서 답답했나 보다.
“14년간 나는 딱 세 번 너를 돌보지 못했어. 마도 전쟁 3년 차, 6년 차 그리고 9년 차.”
“……그 말은, 그 3년 중 언젠가, 내가 디안 케트의 심장을 삼켰을 거란 뜻이야?”
“3년까지는 아니고 3주 정도. 전부 연말에 가까운 겨울이었지.”
고작 일주일씩 자리를 비웠구나.
‘그런데 언제 먹었는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이미 내 배 속에 있다잖아. 다 소화돼서 영혼의 일부가 됐는데, 뱉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삼킨 날짜를 따지는 건…….
“한 가지 묻지. 이런 거 주워 먹은 적 없나? 아니면 누가 억지로 먹였다거나.”
……아니,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다.
‘우연히 삼킨 게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내게 먹였다면. 확실히 그 시기를 따질 필요가 있어.’
3년 차, 6년 차, 9년 차 겨울의 끝이라.
그해 겨울…….
기간은 일주일쯤…….
“떠오르나?”
떠오르냐고?
“전혀.”
그때도 그냥 마귀나 베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막사에 박혀서 상처를 치료하거나.
마침내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이제껏 돌아다닌 성역 내부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환한 달빛이 떨어지는, 어쩐지 음산하면서도 맑은 기운을 풍기는 이곳에는 흉흉한 제단이 하나 놓여 있었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낡고 웅장한 흔적만 봐선 최소 200년은 훌쩍 지난 유적처럼 느껴진다. 길목 양쪽에 장식하는 무너진 대리석상과 낡은 목조 의자들에서 긴 세월의 느낌이 풍겼다.
루는 제단 위에 나를 앉혔다. 눈이 마주치자 목 안쪽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급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3주간 어디 갔던 거야?”
“왜. 궁금해?”
“…….”
“음. 아무에게나 알려 줄 수 없는 비밀인데.”
“…….”
“칼레파들도 20년을 넘게 징징대고 나서야 들을 수 있던 기밀인데.”
“내가 아무나야?”
“아무나가 아니면?”
뭐야, 그 태도는.
기분이 살짝 바닥을 쳤다.
비밀 운운하며 말할까 말까 간 보는 행위가 열받는 게 아니었다. 나와 그의 관계를 자꾸 떠보는 식의 행동이 열받았다.
‘하. 이런 식으로 자꾸 놀림받는 거 정말 지겹다.’
정말 지겨워.
지겨워서 내 입으로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어.
“나한테 너는 아무나가 아니야.”
“그럼?”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네게 느끼는 이 감정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루가 ‘네가 모르겠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짓기 전에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네가 디안 케트의 일기장을 가져가지 않았어도, 나는 널 만나러 이곳에 왔을 거야.”
나름대로 진심을 다해 마음을 밝혔다고 생각했는데, 정면으로 마주하는 루는 무언가 성에 안 찬 얼굴이었다.
나는 변명하는 기분으로 말을 늘였다.
“퀸 섬에서의 기억을 되찾지 않아도 칼레파까지 찾아왔겠지.”
“…….”
“아니, 사실 다른 용건은 전부 구실에 불과하고 그저 널 만나고 싶어서 온 것 같기도…….”
“…….”
하아.
“또…….”
“좋아, 거기까지. 더 말하게 시키다가는 과호흡으로 쓰러지겠군.”
“현명한 생각이야.”
나는 살짝 흐를 뻔한 식은땀을 닦는 척했다. 제단에 팔을 걸친 채, 뻥 뚫린 천장을 올려다보던 루가 조용히 읊조렸다.
“신의 경지는 균형이 결정짓는다.”
루를 이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니, 양쪽 귀가 절로 활짝 열렸다.
“이 균형은 인간으로서의 자아와 고위 정신체로서의 자아 사이의 균형을 뜻하지. 동대륙의 ‘등선’이라는 말을 들어 봤나?”
“아니.”
“등선이란 간단히 말해,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의 경지에 이른 경우를 뜻해. 등선하면 인계에서 벗어나 하늘로 올라간다지만…… 정확히 어디로 떠나게 되는지는 몰라. 신이 된 자는 돌아오지 않으니까.”
신이 된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루를 쳐다봤다. 그 역시 반신의 경지를 뛰어넘어 완벽한 신이 된다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