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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숨기고 즐기는 평화로운 하녀 생활-183화 (183/195)

183화

나는 마른침을 삼키는 것조차 잊고 바닥을 확인했다.

눈발이 휘날리는 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워서, 누더기만도 못한 커튼이 활짝 열려 있음에도 방 안으로는 달빛 한 줌 떨어지지 못했다. 그저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 소리만 스산한 분위기를 더할 뿐.

나는 드문드문한 그림자를 통해, 떨어진 열매 모양의 머리통이 다섯을 넘는단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푸스코프 성을 점령…….”

“했지.”

“설마 벌써 전부…….”

“처형했어.”

다시 발치를 내려다봤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색과 길이로 짐작하건대 이 머리가 바로 로프스키 세레니예의 것이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루가 내게 넌지시 물었다.

“더 물어볼 건?”

“……아스트로사 왕국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전쟁에는 명분이 필요해. 왕실은 우리를 반란 종자로 규정했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7왕자의 잃어버린 왕위를 되찾아 국가와 왕실의 혼란을 종식한다’는 명분을 지니고 있지.”

다음 대 왕위의 주인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건가. 아무래도 이 강력하고 무자비한 군대에 협력하는 왕족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디안은? 세레니예의 적자인 디안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 디안 세레니예. 마음에 안 들지.”

어둠 속에서 뚱딴지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물론 너도야.”

이번 대답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루를 질타할 수 없었다.

내 감이 틀리지 않다면, 오늘의 루는 몹시 예민한 기색이었다. 피부에 와닿는 그의 심기가 얼음으로 벼려진 칼날처럼 섬찟하게 느껴졌다. 저 멀리서 설핏 들려오는 유령성의 비명 같은 바람 소리보다도 더.

“너는 항상 그렇잖아, 애쉬. 묻는 말에 곱게 대답한 적이 없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바쳐야 하거나, 혹은 협박을 해야 한다거나…….”

평소와 달리 혼잣말처럼 중얼중얼 읊는 목소리를 애써 모른 척했지만, 이어진 발언까지 무시하기에는 내 담력이 부족했다.

“입을 열게 하려면 역시 옷을 벗어야 하나.”

“아니!”

“아니야? 그럼 이제 말해 봐. 어느 머리야?”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썩은 포도알 같은 머리들을 훑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디안의 사생활을 쉽사리 입에 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애쉬.”

다시금 한숨과도 같은 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말이지, 비밀 많은 새끼들이 싫어. 그런 놈들은 십중팔구 도움이 안 되거든. 내부 분위기만 잡치게 만들지.”

그 부분에서 나는 순순히 손을 들기로 했다.

‘디안의 사정이고 뭐고, 이 정도면 그냥 순순히 밝히는 쪽이 낫겠어.’

오늘의 루는 이상하다.

이상하게 집요하고, 떨떠름하고, 강압적이지는 않지만 묘하게 위협적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만큼 어느 정도는 루가 바라는 대로 움직여줘야 했다.

나는 침대 밑에 놓인 머리통 하나를 주웠다.

“이거야.”

재수 없는 면상을 친히 돌려서 보여주는데, 짧게 혀를 찬 루가 언짢은 투로 경고했다.

“곰 인형 안듯이 들지 마.”

“이딴 게 뭐라고 내가 인형 안듯이 안아? 너 실컷 가져. 어찌 되었든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오늘 일은 디안도 분명 고마워 하…….”

……려나?

‘그런데 루는 왜 디안의 등에 상처를 낸 주체를 찾으려는 거지.’

불쌍해서? 그때 실수로 보인 등의 형상이 너무 처참했나? 하지만 누군가를 쉽게 동정할 성격이 아닌데.

“넌 씨발 너무 겁이 없네.”

긴 한숨을 내뱉은 루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지친 얼굴이었다. 그림자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새까만 피가 가슴과 무릎 아래 근방으로 넓게 튀어 있었지만, 그의 안광만은 형형했다.

무정한 금안이 탐색하듯 내 얼굴을 살폈다.

“여자, 겁 없는 성격, 뛰어난 무위, 연두색 눈깔…… 그리고 이 얼굴.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릿속에는 없는데.”

“…….”

“너, 날 어떻게 아는 거지?”

“세레니예의 첨탑 괴물을 모르는 후계자는 없어.”

“그래, 첨탑 괴물을 알아도 ‘루’는 모르지. ‘루’는 아무도 몰라, 그건…… 내가 사육당하던 노예 농장이 불어난 강물에 수몰되면서 함께 버린 이름이니까.”

노예 농장?

걸리적거리는 머리통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온 루가 코앞에 멈춰 선 채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네가 날 아는 척하는 이유가 궁금해. 내 과거를 아는 녀석이면 절대 그럴 수가 없는데.”

검사답지 않게 길고 고운 손가락이 내 턱에 닿는 순간. 번개가 내리꽂히듯 강렬하고 섬뜩한 무언가가 내 심장을 움켜쥐었다.

장담하건대, 이건 루 때문이 아니다.

‘이 불쾌한 기운.’

이 이질적이지만 낯설지만은 않은, 시궁창 속에 피어난 독초의 향처럼 매스껍고 케케묵은 기운은…… 마치 메피스토의 힘을 연상케 한다.

“잠깐만, 루.”

설마, 싶은 불안과 함께 혹시나, 싶은 최악의 가설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턱을 붙잡은 루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틀었으나 루의 커다란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애쉬, 말은 그만 돌리고 얌전히 진실을 밝혀.”

“잠깐.”

“나를 여기서 더 귀찮게 만들면 디안 세레니예고 뭐고 이 방 밖으로도 못 나가게 만들…….”

벗어날 수 없다면 억지로라도 그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했다. 나는 양손으로 루의 머리를 부여잡고 강하게 끌어내리며 소리쳤다.

“잠깐이라고 말하잖아, 이 바보야! 입 닫고 내가 하는 질문에 대답이나 해!”

금색 눈동자가 살짝 크게 뜨였다. 루가 조용해진 틈을 타 내 용건을 빠르게 뱉었다.

“잘 들어. 네게서 꺼림칙한 기운이 미미하게 흘러나오고 있어. 설마 칼레파의 심장을 먹은 거야?”

반응이 없다. 찰나의 침묵에 가슴이 덜컹거리며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먹은 거야?”

물끄러미 눈을 맞추던 루가 짙은 조소를 띠었다.

“뭐가 그렇게 간절해? 자꾸 헷갈리게 만드네. 원래 남의 인생에 그리 관심이 많은 건지, 아니면 나라서 그런 건지.”

그리 말하는 루의 표정은 음울했다. 한껏 비틀어져 침전된 감정이 들끓는 눈이 나를 옭아맸다.

“다른 새끼들한테도 이래?”

턱을 잡고 있던 손은 어느새 내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여차하면 바로 뼈를 아작 낼 것처럼.

“아니면 내가 디안 세레니예를 구할 귀중한 도구라서?”

나는 그저 실소만 나왔다.

도구?

지금 도구라고 한 건가? 그리고, 뭐? 원래 남의 인생에 그렇게 관심이 많냐고? 회생한 후 온전히 생존에만 집중하던 내 앞에 나타나,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네가 감히 내게 그런 소릴 내뱉어?

‘아.’

안 되겠다. 이러다가 과부하가 걸리겠어.

아니, 이미 과부하가 걸렸다.

“개자식! 네가 나한테 먼저 아이를 가지자고 했잖아!”

그 순간, 내 목을 부여잡고 있던 악력이 찰나의 환상인 양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루와 재회한 이래 가장 넋 빠진 얼굴이 내게 반문했다.

“……뭐?”

그 꼬락서니가 얼마나 보기 싫었냐면, 양손 다 주먹을 쥔 채 있는 힘껏 루를 후려칠 정도였다.

“네가, 먼저, 한참 어린 날, 꼬셨다고, 이, 나쁜 새끼야! 쓰레기 자식! 하녀장이 만든 요리만 천 년을 먹여도 시원찮을 놈!”

“무슨 개소리를, 내가 언제…… 윽.”

한참 두들겨 맞던 루는 이건 좀 아니라 생각했는지, 다시금 내 양쪽 팔을 속박하며 바보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 망상병 걸렸냐?”

이미 꼭지가 한번 돌아서일까? 루의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한심스러운 의문에 차분히 대처할 이성이 유지됐다.

“맞아, 나 정신병자야. 그래서 널 루라고 부르는 거고. 이제 네 의문 다 풀렸어? 나도 이제 와서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알 바 아니야. 넌 굉장히 별로거든.”

내가 어떤 욕설을 내뱉든, 정작 얼빠져 있던 루의 얼굴은 어느 순간부터 차츰차츰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는 신경을 돋게 할 만큼 부드러워진 눈으로 내 얼굴 들여다봤다.

“나보다 한참 어리다고? 흐음. 그런 느낌은 전혀 안 드는데.”

“꺼…….”

꺼지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진짜 꺼지면 루의 몸속에 맴도는 힘의 근원이 진정 칼레파의 심장인지 알 수 없게 되니까.

한껏 진지한 얼굴을 한 그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아이는 가졌어?”

“닥쳐!”

“왜 화를 내냐? 내가 먼저 꼬셨다고 네가 말했…….”

듣기 싫은 개소리가 이어지기 전에, 루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앗아 겨누며 경고했다.

“너 죽고 나 죽기 전에 내 질문에만 솔직히 대답해.”

다행히 루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몹시 배부른 표정을 짓는 행태에 내 비위가 상했다.

“칼레파의 심장을 먹었어, 말았어?”

“말았어.”

“거짓말 치지 마! 안 먹었는데 네게서 그런 불결한…….”

“저주야.”

“뭐?”

“내 등에 박혀 있던 푸른색 마도구를 기억해? 로궤의 반신이 내게 저주를 걸었어, 애쉬. 자신의 소중한 아바타가 멀리 도망가지 못하도록, 선수 쳐서 건 족쇄지.”

다정하게 속삭인 루가 남의 일인 양 느긋하게 뒷말을 이었다.

“나흘 후면 내 심장이 멈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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